• 다크모드
  • 목록
  • 아래로
  • 위로
  • 댓글 17
  • 쓰기
  • 검색

[멘] 간략후기

jimmani
2075 29 17

IMG_20220711_233049_891.jpg

 

- 줄거리 언급 있습니다 -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작으로도 선정된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신작 <멘>을 보았습니다.

<28일 후> 등의 각본가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감독 데뷔작인 <엑스 마키나> 이후 <서던 리치: 소멸의 땅> 등

연출작에서 특유의 날카롭고도 불편한 상상력으로 마니아층을 형성해 온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이번 영화 <멘>에서 그 상상력의 날카로움과 불편함을 거의 극단으로까지 끌고 간 느낌입니다.

비교적 단순한 이야기 위에서 형용할 수 없는, 때로 납득할 수조차 없는 이미지들로 치닫는 영화는

극명하게 호불호를 탈 수도, 어쩌면 그 중 다수가 불호를 표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하퍼(제시 버클리)는 자신의 남편이 눈앞에서 추락해 죽는 순간을 목격했습니다.

이후 심신의 안정을 취하기 위해 살고 있던 런던을 벗어나 한적한 시골 마을의 오래된 저택으로 휴가를 옵니다.

저택의 주인이자 관리인인 제프리(로리 키니어)는 꽤나 유별난 캐릭터 같지만 살갑게 하퍼를 맞이합니다.

친구와 영상통화 하며 집 자랑도 하고, 고요한 숲으로 나와 여유롭게 휴식을 누리는 시간도 잠시,

하퍼는 벌거벗은 남자같이 생긴 사람이 멀리서 지켜보더니 숲에서부터 집까지 자신을 따라온 것을 알게 됩니다.

하퍼는 경찰에도 도움을 청해 보지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낮은 노숙자라며 남자를 금방 풀어줍니다.

하퍼가 지닌 상처에 대해 주제넘은 조언을 하는 목사부터 놀아주지 않는다고 욕지거리를 해대는 소년,

남의 무서움을 유난떠는 일로 여기는 술집 주인까지 마을 곳곳의 남자들이 하퍼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도사린 공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멘>은 이야기 면에서 어떤 극적인 진척이랄 것이 없음에도 상당히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영화입니다.

낯선 곳에서 겪는 이상한 사람들과 현상에 대한 공포스러운 이야기는 호러 장르에서 익숙한 외형입니다만,

동굴, 사과, 민들레 홀씨 같은 상징적 이미지들이 넘실대니 해석의 여지는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한번 놀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아름답던 전택은 이내 주인공의 불안에 잠식되고,

그 안에서 자라나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는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 변형되고 증식되죠.

이런 종류의 영화는 어찌된 영문인지 알려고 파고들면 들수록 더 어려워지니, 그저 느끼는 게 답인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끊임없이 한 여성을 괴롭히는 공포, 즉 '감정'에 대해 다루기 때문입니다.

때로 해석의 범위를 넘어서 징그럽게 증식되는 그 감정에 힘겹게 맞서는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영화에서 하퍼를 괴롭히는 공포는 다양하게 제시됩니다. 일단 표면적으로 그녀를 스토킹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벌거벗은 형상을 하고 갈수록 혐오스런 이미지로 가까워져 오는 그 남자는 뭘 바라고 그녀를 쫓아오는지 밝히지도 않습니다.

그저 본능처럼 그녀를 갈구하는 듯, 그녀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주시하고 다가와 더 큰 공포감을 자아냅니다.

두번째로 하퍼를 둘러싼 (같은 얼굴을 한) 마을 남자들의 태도입니다. 그들 중에 하퍼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벌거벗은 남자로 인해 괴로운 심경을 토로하는 그녀에게 돌아오는 반응은 유난 떨지 말라는 심드렁한 태도이며,

보기 드물게 하퍼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듯 하던 목사도 곧 "남편에 대한 죄책감이 있지 않느냐"며 주제넘게 충고합니다.

가장 유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면 쓴 소년은 숨바꼭질 제안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하퍼에게 험한 말을 쏘아붙이죠.

이들은 하퍼로 하여금 '잠자코 있어야 하는, 고분고분하게 수용해야 하는 사람'이 되게끔 심리적인 압박을 가합니다.

여기에 비극적으로 끝나버린 하퍼의 결혼 생활 마지막 순간의 장면들까지 수시로 떠오르며 하퍼를 옥죄어 옵니다.

이혼하자는 하퍼에게 남편은 '자신과 이혼하면 죽어버리겠다'며 협박을 가하고 급기야 손찌검까지 가했습니다.

분명 협박하고 때린 것은 남편이었건만, 남편의 이런 태도로 인해 하퍼는 전혀 가질 필요 없었던 죄책감을 떠안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내가 정말 그를 죽게 한 게 아닐까'라는 강요된 죄의식이 안으로부터 비명 소리를 키우고 메아리 되어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아마 영화를 본 분들이 가장 충격을 받으실 후반 10여분은 고여서 썩어가는 부당한 죄의식을 비로소 끄집어내고,

그 죄의식을 떠안게 하는 사회의 폭력적인 시선에 맞서고자 하는 고통스런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란한 점프 컷 같은 효과도 없이 징그러우리만치 긴 호흡으로 전개되는 이 장면은 보는 이 또한 고통스럽겠지만,

그만큼 숨죽이게 하는 인내와 저항 끝에 공포에 휩싸였던 여성이 마침내 강해지는 순간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런 느낌 때문인지 기괴하기 짝이 없는 장면임에도 개인적으로는 외려 흥미롭게 지켜 보았습니다.

폭력이라기보다 행위예술에 가깝게 휘몰아치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은, 배우들도 연기하면서 무척 재미있겠다 싶었습니다.

관객도 납득하기 쉽지 않은 장면들을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은 더더욱 만만치 않았을텐데,

하퍼 역의 제시 버클리와 제프리를 비롯한 마을 남자들을 1인 9역으로 표현하는 로리 키니어는

흡사 2인극과도 같은 구성의 이 영화에서 팽팽한 대립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영화를 훌륭하게 장악합니다.

 

이번 <멘>에서도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인간의 안으로부터 자라나는 감정으로 상상 너머의 공포를 시각적으로 구현합니다.

그러나 이번 영화가 다른 점이라면, 그 지독하게 파고드는 공포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는 이가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호러 장르에서 남성 살인마-여성 생존자의 대결 구도는 사실 무척 흔하지만, <멘>은 이 구도를 살짝 비틀어

'남성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귀결되는 다양한 남성들이 다양한 형태로 가하는 폭력에 맞서

공포에 떨고 비명 지르던 여성이 점점 더 강인해지며 맞서 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그렇게 기괴한 바디 호러를 넘어 강요된 죄의식과 나약함을 극복하고 의연해지는 여성의 투쟁에 대한 은유로 나아가는 영화입니다. 

 

신고공유스크랩

추천인 29


  • 망고무비

  • 성길

  • 세니타이저
  • 장르영화러버
    장르영화러버

  • Nov
  • 828
    828

  • 필립
  • 쥬쥬짱
    쥬쥬짱
  • 타미노커
    타미노커
  • 죠랭이
    죠랭이
  • 최덕구
    최덕구
  • 강꼬
    강꼬
  • espresso
    espresso

  • 롤롤2
  • 햇밤
    햇밤

댓글 17

댓글 쓰기
추천+댓글을 달면 포인트가 더 올라갑니다
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1등
맞아요 전원풍경 아름다워서 초반에 힐링되었다가 후반부 상당히 불편했어요 그런데 영화보고 가끔 생각나네요 그 감정의 불편함이
11:21
22.07.16.
jimmani 작성자
롤롤2
워낙 강렬해서 한동안 사라지지 않죠 ㅎㅎ
11:23
22.07.16.
profile image 2등
좋은 평 잘 읽었습니다. 진짜 여러가지 상징으로 가득한 영화였습니다. 다시 보면서 분석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네요 (당장 다시 볼 것 같지는 않지만....)
11:42
22.07.16.
jimmani 작성자
최덕구
감사합니다. 금방 다시 보기는 또 쉽지 않은 영화죠 ㅎㅎ
11:48
22.07.16.
profile image 3등
분명 영화를 볼 때는 어렵다고 느끼지 않아서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후기글 읽으면서 알아가는것도 많네요 정리도 되구요. 글 잘 읽었습니다!!
11:44
22.07.16.
jimmani 작성자
죠랭이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11:48
22.07.16.
profile image

제시 버클리 좋아해서 보고 싶은데 A24 무셔워요. 그래도 이 글 보면 또 보고 싶어지고.ㅋㅋㅋ

11:50
22.07.16.
jimmani 작성자
쥬쥬짱
제시 버클리를 좋아하신다면... 지나가긴 아까운 영화일 수도 있겠습니다 ㅠ
13:03
22.07.16.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목에 스포 안달으셔도 괜찮으신가요...? 혹시나해서여😅
12:00
22.07.16.
jimmani 작성자
까투리
스포일러 공지 없는 씨네21 리뷰에 나온 수준으로만 언급해서 따로 표기는 안했습니다. 다만 글 앞에 줄거리 언급 있다고 표기는 해놓겠습니다.^^
13:05
22.07.16.
jimmani
아하 되게 자세해서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13:45
22.07.16.
<멘> 관련하여 읽은 리뷰 중 가장 공감이 갔습니다! 마지막 문단에 해주신 말씀이 이 영화의 확실한 주제의식인 것 같아요.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09:52
22.07.18.
jimmani 작성자
세니타이저
공감해 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10:04
22.07.18.
profile image
좋은 후기 잘 보고 갑니다! 찾아본 리뷰중에 제일 이해하기 쉽게 엄청 잘 쓰신것 같아요.
멘 보신 분들이 다 이 리뷰 보셨으면 좋겠네요!!
10:45
22.07.18.
jimmani 작성자
머스터드
좋게 봐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13:34
22.07.18.
jimmani 작성자
성길
저는 CAV 기획전 관람으로 받았습니다!
17:33
22.07.19.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에디터 모드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공유

퍼머링크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나야, 문희] 예매권 이벤트 15 익무노예 익무노예 2일 전12:07 1617
공지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1] 시사회에 초... 17 익무노예 익무노예 3일 전20:03 2467
공지 [총을 든 스님] 시사회 당첨자입니다. 4 익무노예 익무노예 3일 전19:54 1822
HOT 디즈니 플러스) 왓 이프 시즌3 1화 - 초간단 후기(약 스포) 3 소설가 소설가 2시간 전23:50 452
HOT 2024년 12월 22일 국내 박스오피스 1 golgo golgo 2시간 전00:01 637
HOT 저스틴 발도니 WME 에이전시에서 퇴출 2 카란 카란 5시간 전21:37 760
HOT 김민주, 김혜윤 SBS 연기대상 1 NeoSun NeoSun 4시간 전21:50 900
HOT 히든페이스 관객수 100만명 돌파 축하 인증샷 공개!! 3 카스미팬S 6시간 전20:07 1162
HOT 뇌를 좋아하는 좀비들의 귀환! 1 기다리는자 6시간 전20:03 792
HOT <최애의 아이: The Final Act> 실사화, 원작 팬과 신... 3 카란 카란 6시간 전20:37 621
HOT 매트릭스 주말 포스터 받았어요! 2 진지미 5시간 전21:37 573
HOT <수퍼 소닉3> 키아누 리브스 & 벤 슈와츠 일본 인... 7 카란 카란 14시간 전12:15 791
HOT <나폴레옹>을 보고 나서 (스포 O, 추천) - 리들리 스... 6 톰행크스 톰행크스 7시간 전19:03 598
HOT 단다단 애니메이션 2기 PV 공개, 2025년 7월 방영 예정 5 션2022 9시간 전16:52 719
HOT 올해의 영화 투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TV부문은..... 3 스티븐킴 스티븐킴 9시간 전17:23 694
HOT 곽도원 리스크 이겨낸 [소방관] 250만·손익분기점 돌파‥3억 ... 5 시작 시작 10시간 전16:00 2143
HOT <모아나 2> 300만 관객 돌파 3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10시간 전15:58 729
HOT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GO> PV 공개 4 션2022 11시간 전15:09 746
HOT 광음시네마 롯데 괜찮네요 2 왈도3호 왈도3호 11시간 전14:44 640
HOT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티저 예고편 8 카란 카란 12시간 전13:55 1545
HOT 더니 빌뇌브, ‘듄‘ 영화화 비하인드 스토리 언급 2 NeoSun NeoSun 14시간 전12:06 1384
HOT 라이언 존슨의 차기작 ‘오리지널 SF’ 5 NeoSun NeoSun 14시간 전11:47 2065
HOT 자레드 레토,<마스터브 오브 더 유니버스> 실사판 출연 4 Tulee Tulee 15시간 전10:59 1312
1161479
normal
기둥주 1시간 전01:00 222
1161478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00:43 236
1161477
normal
뚠뚠는개미 2시간 전00:01 409
1161476
image
golgo golgo 2시간 전00:01 637
1161475
image
이상한놈 2시간 전23:56 544
1161474
image
소설가 소설가 2시간 전23:50 452
1161473
image
hera7067 hera7067 3시간 전23:35 516
1161472
image
3시간 전23:19 272
1161471
image
hera7067 hera7067 4시간 전22:27 552
1161470
image
NeoSun NeoSun 4시간 전21:50 900
1161469
image
NeoSun NeoSun 4시간 전21:41 341
1161468
image
hera7067 hera7067 5시간 전21:38 165
1161467
image
진지미 5시간 전21:37 573
1161466
image
카란 카란 5시간 전21:37 760
1161465
image
hera7067 hera7067 5시간 전21:30 606
1161464
image
hera7067 hera7067 5시간 전21:25 177
1161463
image
NeoSun NeoSun 5시간 전21:16 296
1161462
normal
Sonatine Sonatine 5시간 전21:09 129
1161461
image
NeoSun NeoSun 5시간 전20:53 472
1161460
image
NeoSun NeoSun 5시간 전20:52 510
1161459
image
NeoSun NeoSun 5시간 전20:50 226
1161458
image
카란 카란 6시간 전20:37 621
1161457
image
카스미팬S 6시간 전20:07 1162
1161456
normal
기다리는자 6시간 전20:03 792
1161455
image
그레이트박 그레이트박 6시간 전19:41 213
1161454
image
NeoSun NeoSun 7시간 전19:26 323
1161453
normal
카스미팬S 7시간 전19:03 356
1161452
image
톰행크스 톰행크스 7시간 전19:03 598
1161451
normal
Sonatine Sonatine 8시간 전18:30 300
1161450
image
뚠뚠는개미 8시간 전18:19 644
1161449
image
e260 e260 8시간 전18:15 449
1161448
image
e260 e260 8시간 전18:15 556
1161447
image
e260 e260 8시간 전18:13 379
1161446
normal
기운창기사 기운창기사 8시간 전17:45 313
1161445
normal
RandyCunningham RandyCunningham 8시간 전17:41 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