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 간략후기
- 줄거리 언급 있습니다 -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작으로도 선정된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신작 <멘>을 보았습니다.
<28일 후> 등의 각본가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감독 데뷔작인 <엑스 마키나> 이후 <서던 리치: 소멸의 땅> 등
연출작에서 특유의 날카롭고도 불편한 상상력으로 마니아층을 형성해 온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이번 영화 <멘>에서 그 상상력의 날카로움과 불편함을 거의 극단으로까지 끌고 간 느낌입니다.
비교적 단순한 이야기 위에서 형용할 수 없는, 때로 납득할 수조차 없는 이미지들로 치닫는 영화는
극명하게 호불호를 탈 수도, 어쩌면 그 중 다수가 불호를 표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하퍼(제시 버클리)는 자신의 남편이 눈앞에서 추락해 죽는 순간을 목격했습니다.
이후 심신의 안정을 취하기 위해 살고 있던 런던을 벗어나 한적한 시골 마을의 오래된 저택으로 휴가를 옵니다.
저택의 주인이자 관리인인 제프리(로리 키니어)는 꽤나 유별난 캐릭터 같지만 살갑게 하퍼를 맞이합니다.
친구와 영상통화 하며 집 자랑도 하고, 고요한 숲으로 나와 여유롭게 휴식을 누리는 시간도 잠시,
하퍼는 벌거벗은 남자같이 생긴 사람이 멀리서 지켜보더니 숲에서부터 집까지 자신을 따라온 것을 알게 됩니다.
하퍼는 경찰에도 도움을 청해 보지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낮은 노숙자라며 남자를 금방 풀어줍니다.
하퍼가 지닌 상처에 대해 주제넘은 조언을 하는 목사부터 놀아주지 않는다고 욕지거리를 해대는 소년,
남의 무서움을 유난떠는 일로 여기는 술집 주인까지 마을 곳곳의 남자들이 하퍼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도사린 공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멘>은 이야기 면에서 어떤 극적인 진척이랄 것이 없음에도 상당히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영화입니다.
낯선 곳에서 겪는 이상한 사람들과 현상에 대한 공포스러운 이야기는 호러 장르에서 익숙한 외형입니다만,
동굴, 사과, 민들레 홀씨 같은 상징적 이미지들이 넘실대니 해석의 여지는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한번 놀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아름답던 전택은 이내 주인공의 불안에 잠식되고,
그 안에서 자라나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는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 변형되고 증식되죠.
이런 종류의 영화는 어찌된 영문인지 알려고 파고들면 들수록 더 어려워지니, 그저 느끼는 게 답인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끊임없이 한 여성을 괴롭히는 공포, 즉 '감정'에 대해 다루기 때문입니다.
때로 해석의 범위를 넘어서 징그럽게 증식되는 그 감정에 힘겹게 맞서는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영화에서 하퍼를 괴롭히는 공포는 다양하게 제시됩니다. 일단 표면적으로 그녀를 스토킹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벌거벗은 형상을 하고 갈수록 혐오스런 이미지로 가까워져 오는 그 남자는 뭘 바라고 그녀를 쫓아오는지 밝히지도 않습니다.
그저 본능처럼 그녀를 갈구하는 듯, 그녀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주시하고 다가와 더 큰 공포감을 자아냅니다.
두번째로 하퍼를 둘러싼 (같은 얼굴을 한) 마을 남자들의 태도입니다. 그들 중에 하퍼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벌거벗은 남자로 인해 괴로운 심경을 토로하는 그녀에게 돌아오는 반응은 유난 떨지 말라는 심드렁한 태도이며,
보기 드물게 하퍼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듯 하던 목사도 곧 "남편에 대한 죄책감이 있지 않느냐"며 주제넘게 충고합니다.
가장 유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면 쓴 소년은 숨바꼭질 제안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하퍼에게 험한 말을 쏘아붙이죠.
이들은 하퍼로 하여금 '잠자코 있어야 하는, 고분고분하게 수용해야 하는 사람'이 되게끔 심리적인 압박을 가합니다.
여기에 비극적으로 끝나버린 하퍼의 결혼 생활 마지막 순간의 장면들까지 수시로 떠오르며 하퍼를 옥죄어 옵니다.
이혼하자는 하퍼에게 남편은 '자신과 이혼하면 죽어버리겠다'며 협박을 가하고 급기야 손찌검까지 가했습니다.
분명 협박하고 때린 것은 남편이었건만, 남편의 이런 태도로 인해 하퍼는 전혀 가질 필요 없었던 죄책감을 떠안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내가 정말 그를 죽게 한 게 아닐까'라는 강요된 죄의식이 안으로부터 비명 소리를 키우고 메아리 되어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아마 영화를 본 분들이 가장 충격을 받으실 후반 10여분은 고여서 썩어가는 부당한 죄의식을 비로소 끄집어내고,
그 죄의식을 떠안게 하는 사회의 폭력적인 시선에 맞서고자 하는 고통스런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란한 점프 컷 같은 효과도 없이 징그러우리만치 긴 호흡으로 전개되는 이 장면은 보는 이 또한 고통스럽겠지만,
그만큼 숨죽이게 하는 인내와 저항 끝에 공포에 휩싸였던 여성이 마침내 강해지는 순간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런 느낌 때문인지 기괴하기 짝이 없는 장면임에도 개인적으로는 외려 흥미롭게 지켜 보았습니다.
폭력이라기보다 행위예술에 가깝게 휘몰아치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은, 배우들도 연기하면서 무척 재미있겠다 싶었습니다.
관객도 납득하기 쉽지 않은 장면들을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은 더더욱 만만치 않았을텐데,
하퍼 역의 제시 버클리와 제프리를 비롯한 마을 남자들을 1인 9역으로 표현하는 로리 키니어는
흡사 2인극과도 같은 구성의 이 영화에서 팽팽한 대립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영화를 훌륭하게 장악합니다.
이번 <멘>에서도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인간의 안으로부터 자라나는 감정으로 상상 너머의 공포를 시각적으로 구현합니다.
그러나 이번 영화가 다른 점이라면, 그 지독하게 파고드는 공포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는 이가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호러 장르에서 남성 살인마-여성 생존자의 대결 구도는 사실 무척 흔하지만, <멘>은 이 구도를 살짝 비틀어
'남성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귀결되는 다양한 남성들이 다양한 형태로 가하는 폭력에 맞서
공포에 떨고 비명 지르던 여성이 점점 더 강인해지며 맞서 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그렇게 기괴한 바디 호러를 넘어 강요된 죄의식과 나약함을 극복하고 의연해지는 여성의 투쟁에 대한 은유로 나아가는 영화입니다.
추천인 29
댓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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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버클리 좋아해서 보고 싶은데 A24 무셔워요. 그래도 이 글 보면 또 보고 싶어지고.ㅋㅋㅋ
멘 보신 분들이 다 이 리뷰 보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