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를 보고 (스포O)
영화는 응창기배 결승전에서 조훈현이라는 인물이 승리한 업적을 자막으로 먼저 띄우고, 상대는 산소호흡기를, 조훈현은 담배를 마시는 모습으로 막을 엽니다. 당시 뉴스 필터를 씌워 시대의 질감을 살려 현실감을 살린 뒤로 곧바로 이창호의 아역 캐릭터를 붙임으로써 호기로운 신동과 스승의 첫 만남을 발 빠르게 그려냅니다. 이후에 펼쳐지는 전개는 사실 클리셰적인 관계성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스폰을 거부하던 조훈현이 영재 이창호를 만나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사제지간이 형성되고, 주변에서 천재, 신동 소리를 해서 들뜬 태도를 누르는 등 인간적으로도 스승이 되어주며 유사 가족의 형태가 형성되는 식으로요. 그렇게 관계를 형성해놓고 시간을 건너뛰어서 30분 만에 유아인 배우가 등장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게 됩니다.
영화는 조훈현과 이창호, 두 인물이 바둑기사로서 자신의 길, 바둑, 정체성을 찾는 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이창호라는 인물이 성인이 돼서 슬럼프가 오고 기죽는 모습으로 대조시키고, 스승과의 스타일 차이 등 이견 차이로 갈등을 빚으며 출가 선언하는 등 평탄하지 않지만 그런 갈등을 통과의례 삼아 자신의 길을 찾아가게 됩니다. 길을 잃을 때 바나나우유나 신발끈 등 소품을 활용해 무심한 듯 디테일을 챙기기도 하네요. 자칫 무겁기만 할 수 있는 영화에서 가는 데 순서 없다는 말에 대한 리액션이나 60이 아닌 80처럼 바둑 둔다는 대사 등 이병헌 배우가 영화에 코믹 릴리프를 담당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자신의 길을 찾은 제자 이창호와 스승 조훈현의 대결이 성사됩니다. 극 중 조훈현의 아직 10년은 이르지, 라는 대사처럼 생각보다 둘의 매치가 러닝타임의 절반 즈음되는 지점에서 성사되니 이르게 성사되기도 합니다.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답게 대국 장면이 중요하게 나오는데 물론 바둑에 대한 정보가 있을수록 판국의 흐름을 읽어서 좋겠지만, 모른다고 하더라도 영화의 음악, 편집, 촬영 등으로 하여금 친절하게 리듬이 조성되어 이해에 지장이 없습니다. 더불어 뛰어난 두 배우의 감정 설득력에 긴장감이 고조되고요. 잠시 경기장에서 잠시 공감각을 벗어나 시계가 가득한 곳에 이창호를 옮겨 평온을 찾게해서 판국을 뒤집거나 조훈현이 패배하는 순간 카메라가 회전하는 등 영화적인 장치와 기술 등으로 이야기가 영화적으로 잘 전달되고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그렇기에 러닝타임의 중반부에서 이르게 매치가 된 측면도 있을 겁니다) 이창호가 승을 거두고 난 뒤에 생기는 균열과 파장을 그리고 거기에 집중하며 중요히 다룹니다. 제자에게 패배해 자존심과 자존감을 상실한 조훈현과 자신의 방식대로 승리를 거둬 기쁘면서도 맘껏 기뻐할 수 없는 이창호. 두 인물의 감정의 파장을 그리는 겁니다. 승부가 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감정이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사람이 대국을 복기하면서 관계가 본격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둘의 접전이 연이어 벌어지고, 그 때마다 이창호가 승리를 거두고, 지하철 광고도 이창호로 바뀌게 되면서 조훈현이라는 인물의 내면은 붕괴되어 버립니다. 이를 흑돌이 녹아내리는 등 시각적 묘사로 하여금 조훈현의 심리를 묘사하는 게 인상적이었네요.
고욕스러운 한 지붕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하면서 맞이한 과묵한 두 남자의 작별에 찡한 뭉클함이 오는데 연기의 공이 크다고 생각이 드네요. 두 연기 선후배 배우의 연기 배틀을 보는 것 같은 영화였달까요. 능글맞으면서도 자존심에 금이 가서 무너지는 등 인간적인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이병헌 배우와 느릿느릿하고 멀뚱하면서도 어딘가 (바둑기사로서) 응큼한 구석이 있는 이창호라는 인물을 거의 박제하듯 연기하는 유아인의 연기 합은 보는 이의 숨까지 눈치보게 하니까요. 특히 이 작품에서의 유아인 배우의 연기는 무척이나 강렬합니다. <사도>에서의 연기도 좋았지만 <버닝>처럼 과하게 표출하지 않고 미니멀리즘으로 최대한의 감정 효과를 내는 연기의 힘이 상당하네요.
영화의 결말까지 봤을 때, 세간의 이목에 두 사람 모두 마음 고생을 겪지만 극이 처음부터 끝까지 조훈현이라는 인물에게 붙어서 극을 풀어내는 만큼 조훈현이라는 인물의 ‘바둑은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내적 성장 드라마로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사제지관의 관계성이나 바둑 영화로 봤을 때도 후반부 클라이맥스의 팽배한 승부에서 진지하게 임하는 태도는 시기나 경쟁심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으로 해석하는 게 적합해보이고요. 그렇기에 결말부 승리의 쾌감보다 다시 찾은 둘의 관계 회복, 조훈현이라는 인물의 회복에서 오는 드라마의 울림이 크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겠죠. 무심과 성의에 이른 이야기의 종결법과 실화에서 오는 감동의 힘도 크고요.
- 별점 : ★★★
추천인 6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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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제 귀가 졸렸나보ㅓ요ㅠㅠ 감사합니다


주인공이 조훈현인데 그 부분은 수정을 하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