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진살인사건 (1975) 긴다이치 코스케 최초 등장. 스포일러 있음.
긴다이치 코스케는 젊은 객기에 샌프란시스코에 갔다가 거의 죽을 뻔한다.
그때 도움의 손길을 주고 그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구보 긴조라는 성공한 사업가다.
긴조는 어떤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긴다이키 코스케에게 전보를 보낸다.
자기 딸인 구보 가츠코가 이치야나기 겐조라는 지방 유력가문 후계자와의 결혼 첫날밤에
칼에 난자당한 누더기같은 시체로 발견된다. 그녀의 남편도 곁에서 난자당해 죽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밀실살인이다.
집이 두터운 판자로 지어진 나무상자같이 견고해서, 안으로 잠겨진 벽을 뜯고 들어가는 데
큰 시간이 소모되었을 정도다. 가츠코와 그 남편을 죽이고 빠져나갈 구멍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더군다나, 눈이 함빡 내려서 온 땅에 눈이 깔렸는데, 범인의 발자국 하나 집 주변에 없다.
범인은 날아 들어와서 날아 나갔나?
범인은 도대체 왜 가츠코와 겐조를 죽였으며 (그것도 칼로 잔인하게 난자해서?) 어떻게 빠져나갔는가?
은인의 전보에 긴다이치 코스케는 만사 제쳐두고 달려온다.
그는 밀실살인사건의 트릭을 멋지게 풀어내고 범인을 찾아내지만, 씁쓸함만을 가진 채 떠난다.
밀실살인트릭을 푸는 영화이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치야나기가문은 그 지방에서 유력가문이기는 하지만, 쇠퇴하려는 기미가 보인다.
어쩌면 당시 일본을 상징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이치야나기 겐조는 이치야나기가문의 우두머리다.
그는 교수이고 학자이다. 가문의 권력 또한 손에 쥐고 있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들을 갖고 있다.
당시 일본이 지닌 문제들의 종합판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가 학자이기 때문에 일본의 정신문화를 이끌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유학한
신여성 가츠코와 결혼하려는 것이라 선언한다. 비록 가츠코가 신분이 낮은 소작농출신 딸이라고 해도 말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겐조는 신분제로부터 자유롭고 혁신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손님이 왔다가 가면 그 자리를 닦고, 손님과 악수라도 하면 자기 손을 꼭 닦는 결벽증 환자다.
혁신적인 현대인과 권위적이고 결벽증적인 환자의 결합 - 꽉 막힌 사람이
개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일을 하려고 한다.
영화는 한마디로 겐조를 "미성숙하다"라고 정의한다. 정신적으로 "사춘기"라는 것이다.
비록 교수에다가 유력가문의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고 나이가 40인데도 말이다.
이 인물 겐조에 대해 알면 알수록 범인이 누군지 분명해진다.
미국에서 유학한 신여성 가츠코는 처녀가 아니다. 자유롭게 연애하고 헤어지고 하는 것이 사람 아닌가?
개방적이고 현대적이라는 겐조는 이것을 보아 넘기지 못한다. 그렇다고, 결혼을 파혼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과 권위의식이 용납하지 못한다. 다들 반대하는 결혼을 고집 부려 진행한 것이 자기 아닌가?
이제와서 파혼한다면, 그것은 큰 수치다. 가츠코와 결혼한 다음 그녀를 죽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데, 가츠코를 죽이면 자기는 살인죄로 재판을 받는다.
남이 나를 이 문제로 심판하는 것은 용납 못한다. 내가 나 자신을 심판하겠다.
그래서, 나도 함께 자살한다.
누군가 결혼 첫날밤에 들어와 자기와 아내를 살해한 것처럼 꾸며서 자살/살인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해가 잘 안가는 사고방식이다.
심지어는 영화 내에서 긴다이치와 긴조도 잘 이해가 안 간다고 한다. 싫으면 그냥 파혼해 버릴 것이지 왜
이렇게까지 했느냐고 말이다. 영화 내에서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도 왜 겐조가 이렇게 했냐 하는 내용이다.
어떻게 밀실살인을 달성했느냐 하는 것보다 말이다.
이 영화의 무대는 2차세계대전 발발 직전이다. 즉, 군국주의의 광기가 일본을 지배하던 때이다.
이 소설이 당시 억지스럽다 하는 평을 듣지 않고 호평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당시 일본 정신세계는
겐조의 이 알 수 없는 엽기적인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1975년이다. 40년 전에 쓰여진 소설의 내용을 1970년대의 눈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1970년대 일본인들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되었고, 미성숙하고 비뚤어진 행동이 되었다.
영화 자체가 왜 40년 전 군국주의시대 일본인들은 이렇게 행동했을까 토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겐조가 "그래, 그럴 수도 있지"하는 시각에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편협하고 권위주의적이고 미성숙한 추물로 그려진다. 막판에 진상이 다 밝혀지자, 긴다이치와 긴조는
겐조의 내면세계에 대해 공포마저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추리영화로서는 너무 복잡하다.
시간과 장소를 교차편집해서 막 섞어놓았기 때문에, 차근차근 추리를 하는 내용이 아니다.
내러티브 자체에 신경을 안쓰는 영화 같다.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보다는, 이미지와 이미지들이 강렬하게 충돌하는 영화 같다.
난해한 영화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긴다이치에 대한 영화도 아니고, 추리에 대한 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는 겐조에 대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