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터미널> 리뷰
시스템, 그 안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변수
돌이켜 보면 공항에서의 시간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던 적은 손에 꼽는 것 같다. 졸린 눈을 비비며 찾았던 공항의 새벽 공기는 왜 맡기만 해도 그렇게 멀쩡하던 배를 아프게 만드는지, 또 탑승 시간을 맞추기 위해 바쁘게 뛰던 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공항이라는 곳에서의 첫인상이 좋았던 사람은 드물 것이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규칙과 통제에 따라 움직이는 공항이라는 장소의 특성상, 우리는 공항에서 사소한 오류나 오차 하나만 발견해도 쉽게 패닉하고 만다. 비행기 시간이 딜레이 되거나, 게이트가 갑자기 바뀌는 등. 그 어느 곳보다 가장 규칙적이어야 할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가장 불규칙한 곳이기도 하다.
영화 <터미널>은 바로 이 공항. 가장 규칙적인 곳에 나타난 가장 불규칙한 남자, 빅터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중 발발한 내전으로 인해 국적을 잃어버린 빅터. 한순간에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그는 이 공항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아남기로 한다.
영화 <터미널>은 <캐스트 어웨이>에 이은 톰 행크스의 또 다른 살아남기 시리즈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다만 <캐스트 어웨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황량한 무인도와는 달리 이곳은 온갖 먹을 것과 즐길 것들이 즐비한 문명의 중심지인 공항 한복판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것들 중 빅터에게 허용된 것은 하나도 없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가진 돈도 없는 처지의 빅터는 시스템과 머리 아픈 조항들로 똘똘 뭉친 공항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생존한다. 이 도심 속 무인도에서 빅터가 부딪히는 첫 번째 난관은 '언어'다. 할 줄 아는 영어라고는 자신이 향하는 목적지의 주소와, 고작 단어 몇 개뿐인 동유럽 출신의 빅터가 짧은 어휘력으로 어떻게든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마치 미국이라는 사회의 냉정한 현실을 보고만 있는 것 같다.
영화 <월드워 Z>에서도 영어를 할 줄 알았던 아들만 생존하고, 좀비에게 최후를 맞이했던 한 가족의 모습처럼 이곳에서 영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닌,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중요한 무기로 그려진다. 영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채 이 콘크리트 정글 한복판에 떨어진 빅터의 수난은 계속된다. 빅터는 왜 자신이 이런 곤경에 빠졌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자신의 비극을 알리는 코앞의 소식도 이해하지 못한 채 절망에 빠진다. 언어의 장벽은 그렇게 빅터의 비극을 잔인하게도 더 극대화시킨다.
이런 빅터를 가장 가까이에서 돕는 인물들은 그와 처지가 비슷한 이민자 또는 유색인종들이다. 인도인 이민자 출신인 '굽타', 스페인계 이민자 출신인 '엔리케' 그리고 흑인인 '조'까지.영화는 미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상대적으로 비주류에 속하는 인물들이 연대함으로써 난관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통해 미국이라는 사회의 현실을 투영하기도 한다.
그렇게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언어와 식량을 해결한 빅터의 앞에 '돈'이라는 또 다른 현실적인 난관이 찾아온다. 빅터는 더 이상 누군가의 도움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이번 난관을 극복한다.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 '건축'이라는 무기를 통해서.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건축 실력을 뽐낼 수 있었던 빅터는 순식간에 어엿한 공사장 인부가 되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한다. 지금까지 한없이 무력하게만 그려졌던 빅터라는 인물의 역량을 보여주는 장면이자, 어쩌면 우리가 은연중에 이민자들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을 걷어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언어라는 장벽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했던 빅터의 존재감은 그제야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빅터는 점차 이 무인도의 삶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빅터는 자신이 택한 생존법인 '친절'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장 자신이 돌아갈 나라가 사라진 상황에서 빅터는 캐리어에 짐을 넣으려고 애를 쓰는 소녀를 돕기도 하며, 청소한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아멜리아에게 기꺼이 손을 내민다. 아멜리아에게 베풀었던 친절은 사랑이 되어 빅터에게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이런 빅터의 친절은 결국 공항의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말이 통하지 않는 러시아 남자의 통역을 맡은 빅터는, 아버지를 위해 반입한 약물을 뺏길 위기에 처한 그를 순간의 재치로 구해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굽타에게 소문이 퍼지면서 빅터는 순식간에 공항 내의 인기스타가 된다. 언어의 장벽에서 항상 당하기만 했던 빅터가 통쾌하게 우위를 점하며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는 순간이자, 공항이라는 시스템의 피해자였던 빅터가 그 시스템을 반대로 이용해 승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 속의 핵심 플롯인 '갈등'은 공항과 빅터에서 시작된 시스템과 개인의 갈등에서 시작해 백인 남성이라는 메이저 집단의 딕슨 국장과 이민자라는 마이너 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또 빅터와 아멜리아 같은 개인과 개인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사회에서 집단으로, 다시 집단에서 개인으로. 갈등의 종류는 모두 다르지만, 이 갈등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관용과 친절'이라는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다.
공항이라는 시스템의 피해자인 빅터는 끝까지 낙관을 잃지 않으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결국 그 신념이 옳았음을 증명해낸다. 딕슨 국장과 이민자 그룹 사이의 갈등 또한 빅터라는 선한 인물에 감화된 주변인들의 변화로 인해 해결되며, 빅터와 아멜리아의 갈등 또한 서로의 길을 응원해 주는 '관용'으로 마무리된다.
아멜리아를 포함한 <터미널>의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길로 떠난다. 누군가는 사랑을 쫓아, 또 누군가는 오랜 시간 피해 지내왔지만 그리워하던 집을 쫓아. 각자 저마다의 목적지로 향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 결국 어딘가로 떠나야만 하는 '터미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결말이다.
영화 <터미널>은 머나먼 미국이라는 생태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인생과도 맞닿아있다. 어딘가로 떠나는 그 과정 속에서 때로는 누군가와 함께 하기도 하며, 또 누군가와는 결국 다른 길을 선택하기도 하겠지만 결국 언젠가, 어디선가,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목적지로 향한다는 결말. 조금만 한 눈을 팔아도 길을 잃은 것 같은 불안감에 쉽사리 휩싸이는 지금의 시대에,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영화 이야기는 여기서: https://maily.so/weeklymovie
더운크리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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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못봤는데 봐야겠어요 ㅎ
감사히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