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단도직입적으로 쓰레기 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보고 실천하자다.
학교에 새로 부임한 선생님이 초등학생 정도 되보이는 학생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주인공인 학생이 3명을 조건 없이 도와주면 그 보답으로
내가 도와 준 3명이 또 조건 없이 3명을 도와준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그럼 3명이 각자 3명씩 9명을 도와주고 9명이 각자 3명씩 27명을 도와주는 셈이니
결과적으로 세상이 아름다워 질 수 있지 않겠냐는 접근 방식이다.
학생이 제안한 아이디어는 관객 입장에서 흥미롭지만 전형적인 피라미드 경영 방식이다.
물론 세상이 아름다워 질 수 있는 접근 방식이다. 감독이 그렇게 연출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아이디어를 실제 내가 속한 사회에 적용하면
원자재는 아름답지 않는 세상이고 원자재를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공하는 주체자는 나다.
따라서 나는 아름답지 않는 세상을 목격해야 하고 나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자연스럽게 아름답지 않는 세상에 속한 자. 타인이 된다.
무엇보다 사물의 아름다움은 오로지 나의 판단에 결정되기에 지극히 주관적이다.
백수가 나에게는 추악해 보여도 타인에게는 여유롭게 보인다면
백수의 추함은 오로지 나만의 시점이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별 생각과 목적 없이 사람들을 도와줄거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를 학습한 사람들은 목적이 생긴다.
과연 내가 도와준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쳤을까 만약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면
나는 세상과 사람들에게 실망하게 된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사람의 의지가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된 건 해방을 꿈꾸는 한국인의 의지 때문이 아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발의 핵탄두 때문이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된 건 대기업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오로지 한국인의 문화와 기질만으로 일구어낸 성과가 아니다.
나의 의지로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자칫 선민사상으로 빠질 수 있다.
정리하자면 영화에서 언급하는 아름다운 세상의 조건은
끔찍한 세상이고 끔찍한 세상을 나의 의지로 바꿀 수 있다는 건
돈 필요 없는 사람한테 억지로 돈을 빌려 주고 이자 쳐서 갚으라는 것과 같다.
결과적으로 선함이 연예인 패션이 유행타듯 사람들에게 형식적으로 퍼질 뿐이지
그게 선함은 아니다.
내가 연예인 패션 흉내낸다고 연예인이 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연예인 패션 유행은 언젠가는 식는다.
과연 선함과 아름다움은 연예인 패션 유행처럼 식을 수 있는 가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