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세계> - '사회인'으로 거듭날 때의 고단한 물음표 (스포)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멋진 세계>는 전과 10범의 전직 야쿠자 '미카미'가 13년 간의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미카미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인생의 절반을 교도소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지독하리만치 고집스럽고 단순합니다. 법과 질서보다는 스스로의 신념이 중요하다 믿으며 언제나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굉장히 충동적이고 다혈질적인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교도소에서 나와 처음으로 올라탄 버스에서 '이제 평범하게 살거야'라고 굳게 되뇌이죠. 과연 그는 그가 바라던 대로 '평범'해질 수 있을까요? 그도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쉽지 않아요. 사회는 나이든 전과자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가 갖고 있던 고가의 손목시계가 녹이 슬어 못 쓰게 되었듯이, 젊을 적 그가 품고 있었을 능력과 기술도 녹슬어 빛을 바랬습니다.
무엇보다 큰 장애물은 미카미 자신의 '야성'입니다. 시비가 붙은 동네 양아치를 두들겨패고 물어뜯음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한 듯 소년처럼 순수하게 웃어보이는 야성. 사회의 반듯한 울타리 속에 야생의 늑대를 위한 공간은 없습니다.
운이 좋게도 그는 진심으로 그를 대하는 사람들을 몇몇 만나게 됩니다. 감옥에서 처음 나와 도움을 받은 신원 보증인 노부부, 사려깊은 공무원, 진심어린 직언을 해주는 마트 점장, 그리고 다큐 촬영으로 만난 작가 지망생 청년.
(어릴 적 자신을 떠난 어머니를 찾기 위한 다큐 기획도 끝내 실패로 돌아가 유소년기에서 비롯된 미카미의 응어리를 해소해주지는 못합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미카미에게 비슷한 조언을 해줍니다. 일단 참고 기다릴 것, 물러나는 게 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사회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신원 보증인의 아내가 해준 말도 '삶이란 인내의 연속'이라는 거였죠?
미카미는 요양보호시설에서 일하며 이들의 말처럼 스스로의 야성을 죽이고 사회의 반듯한 규격에 맞추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곳보다도 온정적이고 평화로워야 할 것 같은 복지 시설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또 다른 야만과 잔인한 폭력이었죠. 그리고 마침내, 그는 불의를 응징하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과 본능을 꺾고 인내하며 허허실실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회인'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 날 미카미가 퇴근하며 입가에 머금은 것은 잘 참았다, 어른이 되었다며 스스로 대견해하는 만족감에서 오는 웃음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보다 평생 내면에서 펄펄 날뛰었던 순수한 야성이 오늘 잘려나갔음을, 앞으로도 수없이 잘려나가 거세될 것임을 깨달은 씁쓸한 미소를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극 초반부터 꾸준히 건강에 이상이 있었음을 확인하고도 직장을 갖고 사회에 섞여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그는, 결국 '사회인'이 되던 날 밤에 쓸쓸히 숨을 거둡니다.
처음엔 이런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결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소 혼란스러웠는데, 저는 고민한 끝에 요양보호시설에서의 불의를 목격하고도 전혀 그답지 못하게 참아냈던 것이 사실상 개인이 지켜온 신념과 야성의 죽음이지 않았을까... 라는 쪽으로 해석하게 됐습니다.
물론 익무에 올라온 많은 리뷰글처럼 미카미가 선량한 이웃들의 진심이 담긴 응원과 조언대로 결국 인내하는 법을 배웠고, 짧게나마 사회에 녹아들어 평범한 행복을 누렸다는 꽤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해석도 물론 존중합니다. 오히려 이 쪽이 더 옳은 영화 읽기일 수도 있죠.
하지만 저는 유소년기의 결핍으로부터 시작해서 영영 빗나간 애어른으로 성장한 미카미에게, 이 사회는 자신의 본성을 거세할 만한 가치가 있는 멋진 곳이 아니었다... 는 씁쓸하고 비정한 해석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지네요. 두 해석 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제목의 느낌도 완전히 달라지는 것도 재미있어요.
분명한 건 어느 쪽으로 영화를 읽든 참 잘 만든 멋진 영화라는 겁니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영화는 이게 처음인데 느낌이 좋네요. 야쿠쇼 코지도 늘 그랬듯이 정말 대단한 연기를 펼쳐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죠.
지방에는 상영관이 정말 너무할 정도로 없어서ㅠ 서울까지 가서 보고 내려왔습니다. 아직 안 보신 익무인들도 내려가기 전에 얼른 보고 오시고 생각에 잠겨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추천인 8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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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후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익무님과 비슷한 느낌으로 영화를 봤네요.
<유레루> 이후 두번째로 본 감독님 영화였는데, 다른 작품들도 꼭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