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1)
생각보다 아주 좋은 영화였다. 보수적인 사회와 인터넷이 아직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서, 우리나라 영화산업은 소프트코어 포르노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면서 큰 힘을 얻었던 시대가 있었다. 이번 영화에서는 정XX가 어디를 보여줄까, 이XX은 엉덩이 외에 무엇을 보여줄까 등등 기다리면서 말이다. 대중의 관음증을 만족시키는 것이 우리나라 영화산업 생존의 한 방편이었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보면 걸작에 해당하는 심봤다, 피막같은 영화에도 이런 서비스장면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런 요소는, 당시 영화들의 평가를 상대적으로 절하하도록 만들었다. 심봤다같은 영화 제목의 경우, 포스터가 하도 히트를 쳐서(?) 심봤다라는 단어가 이상야릇한 용도로 사용이 되는 계기가 될 정도였다. 부수적인 목적의 이런 서비스장면들의 선정성이, 영화 전체를 잡아먹은 케이스다.
하지만 영화의 평가를 결정짓는 가장 파워풀한 잣대는 시간이다. 이제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 이들 영화들에 대해 가졌던 대중들의 편견과 오해, 선입견이 씻겨내려가 버렸다. 심봤다는 전형적인 걸작이고 선정적인 면도 사실은 별로 없다. 피막같은 경우 부분 부분 어색한 장면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아주 거대한 구조를 갖고 있고, 무속신앙과 추리물 그리고 사회비판이 결합되었다는 기발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빛난다. 위 두 작품들의 공통점은, 유지인이라고 하는 걸출한 대배우가 이 영화들을 아주 단단하게 떠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정도 카리스마, 명연, 신비한 미모가 결합되어 대작을 떠받친 예는 별로 찾기 힘들 정도다. 그렇다면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는 어떤가? 걸작이라고까지 하기에는 영화가 단단하지 못하고 구조가 허술한 점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지는 아주 탁월한 점이 있다. 그것은 넘치는 매력이다. 영화가 걸작이 되기보다 아주 매력적인 영화가 되는 것이 더 어려울 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순이라고 하는 어느 산골여인의 일대기이다. 남사당패 여인의 딸로 태어난 순이는 어머니에 의해 산속에 혼자 버려진다. 남자와 달아나려는 어머니는 남자를 위해 딸을 버린 것이다. 순이를 구한 사람이 숯굽는 현보다. 순이는 민며느리가 되어 현보와 현보의 어머니에 의해 길러진다. 이 영화의 무대는, 근대화가 닿을락 말락하던 1930년대 두메산골이다. 순이나 현보나 근대화보다는 그 이전 사람들에 가깝다. 순이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라 현보와 결혼을 한다. 순이에게는 이 산이 자기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고 자라서 현보와 결혼하는 것 외에 다른 삶의 방식이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오늘날 이해하는 것은 어려울 지 모른다. 운명을 개척하기보다 주어진 팔자를 받아들이고 거기 순응함으로써 자유를 얻는 사람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처럼 자연에 묻혀 그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인공들이니까. 순이는 바로 이런 인물들을 한 몸으로 상징하는 존재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하는 바로 그 산유화같은 사람이다. 무심히 거기 피어있지만 - 순이는 경국지색에 해당하는 대단한 미인이었지만, 자기가 아름답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순이는 배운 것도 없고 경험도 없고 살아가는 세계도 좁아서, 어휘도 별로 아는 것 없고 말투도 어눌하고 자아라는 것도 섬세하지 못하다.
정윤희는 순이라는 이 인물을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정윤희 외에 순이라는 인물을 이렇게 잘 구현해낼 사람을 다시 알지 못한다. 이 영화 매력의 90%를 만들어내는 것도 정윤희다. 이영화가 전설이 되었다면 그것은 영화 자체가 전설이 된 것이 아니라, 정윤희가 전설이 된 거다.
영화는 순이의 일상에 대해 담담하게 묘사한다. 짧은 저고리 치마 때문에 배를 드러내놓고 뛰어다니고, 열심히 장작 패서 태워 숯을 굽는다. 볼이 미어지게 밥을 먹고 계곡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한다. 일상이래봐야 별 거 없다. 하지만 이런 일상을 산유화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한 것이 감독의 역량이고 정윤희의 매력이다. 우리 전통적인 미학을 영화로 표현한 것들 중 한 절경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산림주사 최봉이 개입하면서 정윤희의 이 평범한 일상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숯 만드는 이들에게는 생사를 좌우하는 무시무시한 존재인 최봉이 등장했을 때, 순이는 산림주사가 뭔 지도 모르고 비키라고 말하고 가 버린다. 최봉은 순이에게 흑심을 품고 현보를 감옥으로 보내고 순이의 평온한 일상을 격렬한 혼돈으로 몰아넣는다.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이가 이런 격렬한 혼돈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자기 중심을 지키며 꿋꿋이 버틴 것이다. 무서운 권력으로 현보를 감옥에 보내고 자기 생활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놓은 최봉에 대해서, 순이는 위압당한다거나 공포에 질리는대신 저항한다. 그녀는 결국 현명한 사람이었고 용기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현보가 감옥에 간 후 혼자 남아 집을 지키던 순이에게 최봉이 위협을 한다. 순이는 갈등하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를 듣는다. 그순간 순이는 현보에게 절개를 지키고 최봉에게 대항할 결심을 한다. 아마 두가지 이유 정도가 생각나는데, 깨끗하고 순결한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자기 어지럽혀진 마음을 가다듬은 것도 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새끼를 남의 둥지에 낳아놓고 도망가버리는 뻐꾸기에서 어머니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자기는 어머니처럼 되지 않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이게 이 영화의 주제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순이는 밤에 자기를 찾아온 최봉을 안고 숯가마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불타버린다. 한참후 감옥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온 현보는 불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순이의 옥가락지를 찾아들고 통곡한다. 순이의 순결함과 깨끗함 그리고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그때 현보 머리 위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려온다. 현보는 뻐꾸기 소리를 따라 우거진 녹음 속으로 사라진다. 이 엔딩장면은 팔자에 대항하기보다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음의 평안과 자유를 얻는다는 우리 전통적인 운명관을 함축하는 명장면이다. 순이의 죽음에는, 산유화가 져버리고 난 자리에 어른거리는 아련함과 슬픔같은 것이 있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자연관 인간관의 미학적 절경이라고 불려도 좋을 만하다.
P.S. 이 영화가 재평가받는 요인들 중 하나는, 리매스터링이 아닐까 한다. 칙칙하고 흐릿한 화면으로는 이 영화가 가지는 화려하고 깨끗한 색채미 순결함을 잘 보여주지 못한다. 리매스터링 이후 이 영화는 그야말로 환골탈태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추천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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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좋아하는 영화인데 넘 좋은글입니다!
정윤희의 매력은 정말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