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벌 (1978)
두명의 절세가인에 대한 이야기다.
그 아름다움을 세상사람들이 놓아두지 않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절세가인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고전적인 것이다.
영화는 어느 한적한 산길을 두 대학생과 한 여자가 노래 부르며 걷는 장면에서 시작한더. 평범한 장면 같지만 고화질로 보면 부드러운 능선, 반짝이는 잎들, 입자가 고운 흙들, 투명한 산바람같은 것들이 참 싱그럽다. 두명의 잘 생긴 청년들과 한명의 절세가인이 즐겁게 노래 부르며 그 길을 걸어 어디로 가는가? 이 빛나는 순간에 살인사건이니 불행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여지나 있는가? 두 대학생은 리서치를 하러 오지에 찾아왔다가 거기에서 산유화처럼 아름다운 고토에라는 처녀를 만난다.
산유화처럼 아무도 보아주지 않고 산간오지에서 피었다가 시들어버렸을 고토에는 두 청년들 사이에 놓인다.
이후 벌어질 사건 전개를 생각하면, 차라리 혼자 산간오지에서 피었다가 시들어버리는 편이 고토에게는 더 나았을 것이다.
고토에는 두 대학생들 가운데 다쓰야라는 청년을 선택한다. 그리고 아름답던 세 사람 간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고토에는 경악하게 된다. 다쓰야는 신분이 이만저만 높은 것이 아니라, 황실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산 하나를 소유한 가문이라 하지만 기껏해야 시골 토호다. 다쓰야는 어머니를 거역할 수 없어 시간을 일단 벌어두고 차근차근 어머니를 설득해보자고 한다.
대신, 이전에 자기가 선물로 주었던 반지를 올려달라고 고토에에게 부탁한다. 황실의 보물인 반지라서 함부로 남에게 줄 수 없다고 어머니의 질책이 있었던 것이다. 절망 겸 분노한 고토에는 다쓰야를 비난하고 잠시 후 다쓰야는 머리가 깨진 시체로 발견된다. 그와 단둘이 방안에 있던 고토에는 충격 때문에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기억도 못한다. 그런데 다쓰야가 살해당할 당시, 그 방은 안에서 잠긴 밀실이었고 고토에와 다쓰야 밖에 그 방안에 없었다. 자기가 다쓰야를 죽였다고 믿은 고토에는 다쓰야의 딸인 도모코를 낳고 시름시름 앓다가 일찍 죽는다.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전개다. 도모코도 어머니 고토에의 아름다움을 물려받아
절세가인으로 자라난다. 도모코가 혼기에 접어들자 그녀 주변에 남자들이 모여든다. 그런데, 그 남자들을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연쇄살인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긴다이치 코스케가 초빙되어 사건을 파헤치며 과거로 과거로 파고든다.
여왕벌이라는 제목은, 너무나 아름다운 두 여인이 자기 주변에 모여드는 남자들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뜻에서 붙은 것이다.
사실 말하자면, 고토에나 도모코나 여왕벌같은 것은 아니고, 그냥 순수한 여자들이다. 그녀들을 여왕벌로 보고 라벨을 붙이는 것은
남자들의 욕망이다. 고토에만 해도 옛날 사람이라 남자들의 이런 시선과 욕망에 그냥 수줍게 흔들려버렸고, 그 결과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딸인 도모코는 좀 더 적극적인 사람이다. 고토에에게는 없던, 생명력과 활력, 의지가 넘치는 여자다. 이것이 그녀를 구원하고 그녀 주변 사람들을 구원하게 된다. 이 엔딩장면이 자못 감동적이었다.
이 영화는 금색야차같은 이수일-심순애 이야기에다가, 연인들의 동반자살 이야기를 합친 것이다. 사실 매끄럽다는 이야기는 못하겠다. 좀 뽕끼도 느껴진다. 하지만 그 대신, 깊이도 얻었다. 오랜기간 축적된 신파조 문학의 깊이와 저력을 능숙한 작가 요코미조 세이지가 가져온 것이다.
줄여서 이야기하면 평생 심순애만 바라본 이수일과, 그런 이수일만 바라본 다른 여자가 동반자살하는 이야기다. 서로 다른 연인들의 순애보가 세 번 겹친 삼중 순애보다. 약간 과해서 좀 쳐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자리에,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라 하더라도 나설 자리가 없다. 어느쪽이냐 하면, 나는 아주 좋게 이 영화를 보았다.
산간오지로 대표되는 고토에와 도모코의 순수성에 대비되는 것이, 교토의 궁궐로 대표되는 다쓰야 어머니와 황실 일원이다.
자기가 결혼을 반대해서, 아들도 죽이고 며느리도 비참하게 죽인 어머니는 늘 회한 속에서 산다. 심지어 아들의 무덤조차 고토에의 집 부근에 있어서, 자기 아들 무덤조차도 몰래 숨어서 다녀와야 하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이런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구원하는 것이 도모코다. 이수일도 심순애도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까지 다 품는 정신적 포용력을 발휘해서 모두 구원하는 도모코의 모습이 이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만든다. 진실을 알면 그 어린 도모코가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릴 것이라 긴다이치 코스케나 할머니나 걱정했으나, 의외로 어린 도모코는 긴다이치 코스케도 할머니도 다 압도한다.
사실 이런 종류의 섬세한 고전적 멜로드라마는 거장감독 이치가와 곤이 장중하게 영화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전 보았던 눈물의 호수라는 좀 전형적인 1960년대 멜로드라마도 특별한 감정적 위력을 발휘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1976년 이누가미 가 사람들의 성공 이후 매년 두편씩 공장에서 찍어내듯 긴다이치 코스케 영화를 만들었던 이치가와 곤 감독은 이 영화를 범작으로 만들고 만 듯하다.
가끔씩 눈부시게 번뜩이는 감성과 명장면이 보이기는 하지만, 영화는 전반적으로 범작에 속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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