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깊은 욕망 (1968)
신들의 깊은 욕망이라는 영화에서 매혹적인 것을 발견하기란 무척 어려웠다.
이마무라 쇼헤이라는 일본 감독은 우리나라로 치면 김기영 감독과 비슷한 것 같다.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생물로서의 인간의 욕망을 끈적끈적한 색채와 감촉으로 분석한 차가운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 신들의 깊은 욕망은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와 비슷하게 턱없이 거대한 인간의 그 어떤것을 포착하려 시도한 작품이다. 주제 과잉, 사건 과잉, 등장인물 과잉으로 말미암아 영화가 파탄이 난 듯하다.
1) 딸과 상간하여 자식을 낳은 할아버지, 누이동생과 상간한 아버지, 고모를 사랑하는 아들, 유부녀와 죽고 못사는 아버지, 남편을 버리고 틈만 나면 외간남자에게 달려가는 아내 - 이것이 이마무라 쇼헤이가 바라보는 오키나와섬 원주민이다. 이런 극단적인 가족 설정으로 사회규범같은 것을 초월한 야만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을 그리겠다는 생각은 너무 단세포적이 아닐까? 너무 과잉이다.
2) 누이동생과 상간하여, 섬의 타부를 어긴 죄로 우물을 파는 아버지. 끊임없이 나오는 섬의 신화는, 오빠신과 누이동생신이 교접하여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3)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바깥세상을 보고 온 아버지는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섬으로부터 누이동생과 탈출하여 새로운 섬에 정착할 계획을 갖고 있다.
4) 섬에 공장을 세우러 온 기술자가, 공장에 꼭 필요한 물을 찾아 섬을 헤멘다. 섬 원주민들은 기술자가 섬의 문화 (미신?)을 파괴하지 않도록 돕는 척하며 방해한다. 꼭 카프카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기술자는 매일매일 물을 찾아 방황하지만 거기 닿을 수 없다.
5)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섬은 필연적으로 문명에 의해 파괴되어 디즈니랜드화 될 수밖에 없다.
6) 섬의 원초적인 순수성을 상징하는 토리코라는 처녀는 백치이다. 아마 할아버지가 딸과 상간하여 근친상간의 결과 태어났기 때문일까? 그는 도시로부터 온 엔지니어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지만 버림 받고 차가운 바위가 되어버린다.
이런 많은 주제들이 하나의 영화 안에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이 주제들이 하나로 융합되도록 어떤 구성이나 장치가 되어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도 않다.
산만하게 쌓아올려져 있다. 그래서 영화 평을 보면 위의 주제들 중 하나만 적는 경우가 많다.
누구는 이 영화가 근친상간에 대한 영화라고도 하고, 누구는 이 영화가 문명에 의한 순수하고 원초적인 섬의 파괴, 누구는 이 영화가 일본에 의해 파괴된 오키나와의 비극을 그린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위 모든것을 다 갖고 있다. 그것도 어느 하나는 강조되고 다른것들은 좀 간략화된다 하는 것이 아니라, 위 주제들 모두 세밀하게 묘사된다. 과잉이다. 영화가 산만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감독은 원초적인 인간에 대해 별 상상력이 없는 듯하다. 딱 스테레오타입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원초적인 인간은, 근친상간이라는 타부를 갖고 있으며,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을 신으로 섬기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어리석고 백치이다. 하지만 그래서 순수하다. 그들은 다른 생물들처럼, 생태학적인 냉혹한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딱 문명인이 원주민에게 가지는, 스테레오타입적이고 진부한 이미지다.
뭐 원초적인 인간이라는 것은 딱 이럴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아는 것도 새롭고 흥미롭게 표현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 예술 아닐까? 이것이 부족한 듯했다.
어떤 이미지들은 충격적이라기보다 불쾌하다. 영화를 찍기 위해 거미를 죽이고 문어를 죽이고 돼지를 바다에 빠뜨려 상어에게 물어뜯게 피바다로 만든다.
원시적인 자연상태의 잔인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뜬금없이 너무 자주 나오고, 너무 적나라하다. 이런 충격적인 장면도 영화적인 창의성으로 만들어내야지, 동물들이 죽임을 당하는 고통스런 순간을 그대로 보여주어서 충격과 불쾌감이나 주려는 것은 너무 안이한 것 아닐까?
개연성 없고 인물들의 성격이나 설정도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바뀐다. 가령 섬의 억압적인 문화가 불만인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동안 군대에 징집되어 끌려가 넓은 세상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는 참전한 동안 성스러운 섬을 보았다면서 누이동생에게 거길 가자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끌려갔다는 그 전장은 아주 먼 곳이 아닌가? 그 전장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영화 마지막에 아버지는, 작은 보트를 타고 거길 가겠다고 누이동생을 데리고 망망대해에 몸을 던진다.
아버지의 동기도 뒤죽박죽이다. 처음에는 섬을 탈출한다고 하다가, 중간에는 섬에 남아 신을 모신다고 고집부리다가, 종내는 배를 타고 누이동생과 성스러운 섬으로 도망가겠다고 한다. 더 이해를 못할 것이, 아버지의 최후이다. 어느날 누이동생의 남편이 자연사로 죽는다.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 그렇다면 오해를 받지 않게 그 자리에서 해명을 해야했을 것 아닌가? 그런데 그 대신에, 아버지는 누이동생을 데리고 도망을 친다. 당연히 누이동생 남편을 살해하고 도망을 친 것으로 오해받아 살해당한다.
영화는 부분부분에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거장성이 빛난다. 오키나와섬의 뜨겁고 척박한 환경이라든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공포스럽고 절박한 삶이 아주 잘 그려져있다. 원주민들은 섬 모든것이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모든 신에 대해 공포를 갖고 있다. 그냥 섬 모든 것이 공포스런 것이다.
백치이며 원초적인 뜨거움으로 욕망과 사랑을 갈구하는 토리코도 잘 그려졌다. 일관성이 없기는 하지만, 집요한 어리석음과 정열로 섬을 거부하고 이상을 갈구하는 아버지도 잘 그려져있다. 하지만 이런 빛나는 부분부분들이 모여 빛나는 전체를 이루지 못한 것이 참 애석하다.
무엇보다도 난삽하고 재미가 없다. 이 영화가 실패했던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IMDB에서 7.7이라는 걸작에 가까운 수작으로 호평을 받고 있으니, 내가 너무 영화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있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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