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 간략후기
익무의 은혜에 힘입어 이준익 감독의 흑백 사극 영화 신작 <자산어보>를 시사회로 미리 보았습니다.
워낙 말을 잘 하시는 이준익 감독의 GV와 함께 해 더 유익하게 영화를 볼 수 있었네요.
19세기 초 '신유박해'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된 후 그곳에서 조선시대 대표 어류학서인 '자산어보'를 편찬한,
정약용의 친형으로도 알려진 정약전과 그와 특별한 교감을 나눈 어부 '창대'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언제나 역사의 스포트라이트에서 한뼘 정도 빗겨 선 인물들에 주목하며 새로운 화두를 던져 온 감독의 미덕을 거듭 실감하게 합니다.
정치적 암투의 한복판이 아닌 한적한 유배지를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는 수묵화처럼 번져오는 감동으로 보는 이를 흐뭇하게 합니다.
19세기 초 명문가로 이름났던 정씨 가문의 3형제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부터 박해를 당합니다.
가장 독실했던 막내 정약종(최원영)은 참수를 당하고, 형 정약전(설경구)과 정약용(류승룡)은 유배를 당합니다.
정약용이 전남 강진으로 가 다산초당을 만들어 후학을 양성할 무렵, 정약전은 머나먼 섬 흑산도에서 바다 생물에 호기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바다 생물에 대해 호기심만 있고 지식은 없었으니 걱정이던 약전은 창대(변요한)라는 젊은 청년 어부를 만납니다.
바다 생물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고 식견도 있어 보이는 창대에게 약전은 지식을 전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사학 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거절합니다.
창대는 각별한 이유로 홀로 책을 읽고 문자를 공부하며 입신양명을 꿈꾸어 왔으니, '죄를 지어 유배 온' 약전이 탐탁치 않았겠죠.
창대에게 지식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약전은 글을 가르쳐 줄 터이니 바다 생물에 대해 알려달라며 창대에게 '지식 거래'를 제안합니다.
어쨌든 일방적으로 돕는 건 아니고 득될 것도 있으니 창대는 이를 수락하고, 두 사람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렇게 유배지에서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나날이 계속되어 가나 했지만, 결국 세상을 향한 두 사람의 다른 시선은 갈등을 낳게 됩니다.
따로 이야기를 만들어도 충분히 흥미로울 '정씨 가문 3형제'의 이야기를 배경으로만 설명하고,
가장 덜 알려졌고 가장 잔잔해 보이는 정약전과 어느 청년 어부의 이야기로 돌입하는 것부터가 이준익 감독다운 선택입니다.
이준익 감독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극을 가장 자주 만들고, 또 가장 잘 만드는 감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몇해 전에는 <동주>를 흑백영화로 내놓으면서 이 시대의 한국 관객들에게 흑백영화의 가치를 새삼 일깨우기도 했고요.
그런 그가 연출한 '흑백 사극 영화'인 <자산어보>는 일단 기대만큼 탄성을 절로 자아내는 시각적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때때로 드라마틱한 색깔들로 당시를 '재현'하고자 했던 사극 장르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오로지 흑과 백, 그리고 그 사이의 무채색들로 채워진 자연의 움직임과 사람들의 얼굴은 먹으로 빚어낸 수묵화처럼 힘과 기품을 지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화려하거나 독특한 색감, 강렬한 복식이나 배경에 시선을 뺏기기 전에,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공기 자체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것 또한 이준익 감독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사건의 충격파에 매혹되길 거부하고 사람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약전이 흑산도로 오기까지의 배경인 정씨 3형제의 박해와 그 배경이 되는 정쟁의 양상에 대해서는 초반 10분에 다 정리해 버린 후,
대부분의 이야기를 고요한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채워가니 남는 것은 사람과 사람, 그들 사이에 맺어지는 감정과 관계입니다.
우리가 어릴 떄 배웠던 국사 책에서 걸핏하면 한 단락이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었듯,
궁핍해져만 가는 백성들의 삶과 이에 아랑곳않고 포악하게 세금을 걷어가는 관리들의 모습은 익숙한 풍경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시대상을 '배운 것과 그것을 세상에 행하는 것의 괴리'라는 관점으로 색다르게 해석합니다.
성리학이 본디 추구했을 올바른 가치는 비열하고 무책임하게 자기 배를 채우는 권력자들에 의해 훼손당한지 오래.
단지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였을 뿐인 약전에 대해 반대 세력은 성리학을 방패삼아 '사학'을 추종한 대역죄인이라며 공격합니다.
이미 배운 대로 행할 수 없는 세상에 염증을 느껴 자연에 매료되어 가는 약전에게 창대는 어쩌면 정반대편에 선 사람입니다.
창대는 지식의 본디 가치와 힘에 대해 비로소 눈을 뜨면서 그렇게 배운 바에 따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순수한 믿음을 지녔기 때문이죠.
둘은 어쩌면 잠깐의 교차점에서 만난 후 다른 방향으로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었을지 모르나,
결국 그들이 벗이 되어 가는 것은 추구하는 방법이 달랐어도 그 뜻은 같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배운대로 행하고 본대로 기록하여 세상의 진실을 발굴하고 지킨다는 뜻 말이죠.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 알려고 한다는 것은 곧 세상 곳곳에 세워진 장벽을 허물고 그 속으로 만나려 들어가려 한다는 의지일 것입니다.
당장의 욕망과 이윤에 눈이 멀어 권력은 벽을 쌓고 백성의 아우성은 틀어막히던 세상에서,
내가 아는 것을 알려주고 내가 모르는 것을 익혀가며 서로의 깊이를 더해가는 약전과 창대의 우정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그 과정이 참 무던하고 어떻게 보면 투박스럽다 싶다가도, 역사의 거대한 파도를 넘어 오롯이 떠오르는 그들의 감정은 끝내 마음을 울립니다.
동반자 관계를 특히 더 잘 그리는 이준익 감독의 연출을 따라, 이 영화에서 처음 만나는 설경구, 변요한 배우의 호흡은 기대보다 더 매력적입니다.
그 긴 필모그래피를 거친 후 이 영화로 첫 사극 연기를 보여주는 설경구 배우는 고뇌하다 깨달아가는 학자의 얼굴을 깊이 있게 그려냅니다.
소탈하고 따뜻하면서 유머러스한 사람의 모습, 유별나고 고집스런 학자의 모습, 넓고 따뜻한 스승의 모습을 넘나들며 묵직한 중심을 이룹니다.
청년 어부 창대 역의 변요한 배우는 극적인 변화와 성장을 이루는 인물을 따라 요동치는 연기 폭으로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시대적, 사회적 메시지를 온몸으로 겪어내는 캐릭터로서 설득력 있는 화자의 역할 또한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약전과 정겨운 러브라인(?)을 이루기도 하는 가거댁의 이정은 배우는 흑산도의 인간적인 활기를 실어나르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창대의 오랜 동네 친구인 복례 역의 민도희 배우 역시 예의 맛깔나는 사투리 연기로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이외에도 류승룡, 조우진, 방은진, 정진영, 최원영은 예상외로 화려한 우정 또는 특별출연진을 자랑하는데,
깜짝 이벤트 개념의 카메오가 아닌 필요한 곳에서 각자의 방점을 찍는 주요 인물들로서 극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200여년이 지난 지금의 세상은 어쩌면 영화 속 조선시대보다도 더 비정한 곳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눈 앞의 사람들, 발 아래 세상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우리가 발견하고 배우고 반응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따라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흑색'이 될 수도, 모든 것을 펼쳐내는 '자색'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흑백의 수목화처럼 그려진 자연 속에 담긴 약전과 창대의 고즈넉한 우정은 아마 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요한 답이 때론 역사의 가장자리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 2003년 이준익 감독이 <황산벌>을 내놓았을 당시만 해도 사극에 사투리가 나온다는 것이 대단히 신선했는데,
<자산어보>에 이르니 (코미디가 아님에도) 사극에서 쓰이는 사투리가 이제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익무 덕에 좋은 영화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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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처럼 번져오는 감동...이란 표현 딱입니다.^^
간략후기가 길이가 ㄷㄷㄷ
잘읽고 갑니다 ㅎㅎㅎ
나주 정가 형제 순서에 약간 혼동이 있는 듯합니다
첫째는 약현(1751년 ~ 1821년, 형제 중 유일하게 천주교를 믿지 않음, 이복형제)
둘째 약전(1758년 4월 8일~1816년 6월 30일, 안드레아)
셋째 약종(1760년 ~ 1801년 4월 8일, 초대 천주교도 전도회장_아우구스티노)
막내는 정약용(1762년 8월 5일 ~ 1836년 4월 7일, 아호 다산, 요한)
흑백에 자연을 담으면 다 수목화같다고 하셨죠~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