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제서] 간략후기
익무의 은혜에 힘입어 브랜든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SF 스릴러 영화 <포제서>를 시사회로 미리 보았습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감독은 그 유명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아들이기도 한데, 어깨 너머로 그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합니다.
인간이 완전히 도구화되면서 증발되는 책임과 윤리의 문제를 불편, 불안, 혼란으로 가득찬 비주얼로 신랄하게 드러냅니다.
폭력적이고 혼돈스럽다가도 기이하게 아름다운 비주얼, 실재하는 세계와 의식의 구분이 모호해지며
가중되는 혼란은 굳이 상식적, 논리적으로 정돈할 필요 없이 그저 그대로 느끼면 그만일 따름입니다.
타인의 몸을 탈취해 암살의 도구로 활용하는 조직이 있습니다. 타겟의 가족이나 지인을 납치하여 요원의 의식을 심으면,
타인의 몸에 들어간 요원은 짧게는 몇분부터 길게는 며칠에 걸쳐 적응하고 명분을 쌓는 기간을 거친 뒤 타겟을 제거합니다.
요원은 몸을 빼앗긴 자의 목숨을 끊음으로써(외부에서 보이기로는 자살) 자기 본래 몸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주로 고위층 타겟을 대상으로 쓰이는 이 수법은, 제3자가 사건에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의심을 살 위험이 적고
필요에 따라 사건까지 이르게 되는 현실적인 내러티브를 만들기도 하기 때문에 암살 의혹을 띄울 그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의식을 침투한 뒤 정해진 시간 안에 나오지 못하면 동화되거나 뒤섞이는 부작용 또한 갖고 있습니다.
타샤(안드레아 라이즈보로)는 이런 암살 방법에 상당히 특화된 요원인 한편, 몸을 훔친 대상과의 연결을 남겨두는 성향을 보입니다.
상관인 거더(제니퍼 제이슨 리)가 어느날 회사에 거대한 부를 안겨줄 수도 있는 큰 작전을 타샤에게 제시하고,
타샤는 정신적으로 쉽지 않은 상태임에도 가족과 잠시 떨어져 작전에 뛰어들기로 결심합니다.
테이트(크리스토퍼 애봇)라는 남자의 몸에 투입되어 거물을 암살해야 하는 작전에서 타샤는 긴 시간을 쓰게 되고,
작전에 들이는 시간만큼 타샤의 의식이 휘청거리게 되면서 작전은 위기에 빠집니다.
타인의 몸에 들어가 암살을 시도한다는 <포제서>의 컨셉은 언뜻 '크리스토퍼 놀란' 류의 SF 스릴러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브랜든 크로넨버그 감독은 누가 부전자전 아니랄까봐, 그런 장르적 쾌감과는 거리가 먼 부분에 집중합니다.
영화는 요원이 어떻게 이 장치를 가지고 작전을 성공하는가가 아니라 이 장치가 요원에게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가를 추적합니다.
근본적으로 조직이 타겟을 암살하는 데 쓰는 이 방식은 몸을 도용할 타인의 의지 따위는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손에 피를 묻히고, 목적한 바가 끝난 후에는 자살로 그의 육체를 폐기합니다.
그렇다고 몸을 도용하여 암살을 행하는 이의 상태가 멀쩡한가 하면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침투한 타인의 몸에서 느끼는 감각이 내 감각인지 그의 감각인지 구분이 필요하면서도,
그에게 완전히 적응하려면 그의 감각을 내 감각과 합일해야 하는 혼돈스런 상황이 살인이라는 비윤리적 행위와 만나면서,
누군가를 해하는 목적을 띤 이에게는 매우 폭력적으로 자신의 감각을 확인하게 되는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살인이라는 임무를 위해 인간의 육체는 물질화되고 정신은 자원화되며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하는 존엄성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역시 누가 부전자전 아니랄까봐 브랜든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러한 비판적 메시지를 파격적인 비주얼로 빚어냅니다.
혼란해지는 감각 속에서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더 극단적으로 실행되는 폭력을 핏빛 이미지로 그려내고,
납득하기 쉽지 않은 의식 속 풍경들이 뭉개지고 흔들리며 펼쳐지는 가운데 온갖 색으로 발광하는 빛으로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등
어렵게 부여잡고 있던 논리를 점점 놓치게 되는 주인공(들)의 머릿속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의 육체와 의식을 해체하고 조종할 수 있게 되서 욕망은 점점 더 교묘하면서 동시에 점점 더 폭력적으로 날뛰고,
책임과 윤리는 그에 반비례하여 점점 소멸되는 세계를 영화는 해석하려 들기보다 그저 느끼라고 하는 듯 합니다.
다만 기술의 힘을 빌어 세상 모든 것을 해체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이 곧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가 매섭게 날아들 따름입니다.
여느 상업영화에서 흥미진진하게 다룰 법도 한 소재를 가지고 파국으로 몰아붙이는 영화의 솜씨가 꽤 난감하고 불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흥미를 끄는 것은 분명하나 인간의 존엄을 내다버릴 수도 있는 상황을 주제로 오락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그 끝에 도사릴 파탄까지 내다보는 것은 오히려 문제 삼아야 하는 것에 대해 문제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시선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와 의식이 해체되어 가며 그 절대적인 가치마저 훼손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그 결과 인간성이 증발되고 마는 순간을 단순히 풍경의 일부로 건너다 보지 않고 무거운 방점으로 찍는 태도는,
<포제서>를 자극을 좇는 기이한 악취미의 장르물이 아닌 무게와 깊이를 지닌 사유의 결과물로 받아들이게 하기 충분합니다.
익무 덕에 좋은 영화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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