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간략후기
몇 차례의 연기 끝에 드디어 극장에 선을 보인 픽사의 새 애니메이션 <소울>을 보았습니다.
<몬스터 주식회사>, <업>, <인사이드 아웃> 등 여러 픽사의 명작들을 연출한 피트 닥터 감독의 신작인 이 영화는
흔히들 상상하는 '사후세계'라는 개념의 반대편에 '생전세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한 듯 합니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 영혼이 형성되는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후회없는 현재를 살아라'는
교훈적이지만 고리타분할 수 있는 메시지 대신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위로를 전합니다.
우리가 특히 최고작으로 꼽는 픽사 영화들이 그랬듯, <소울> 또한 우리를 가르치는 대신 어루만집니다.
밴드부 교사를 하며 뉴욕에 사는 조 가드너(제이미 폭스)는 이제 막 학교로부터 정규직 확정을 받은 참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재즈 밴드의 피아노 세션으로 합류할 기회를 제안받은 참이기도 합니다.
집에서는 안정적인 정규직 교사의 길을 권하지만 어려서부터 품어 온 뮤지션의 꿈을 놓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후자를 택하며 찾아온 기회 앞에 한껏 들뜨지만, 그것도 잠시 사고로 세상과 이별할 위기에 놓입니다.
'머나먼 저 세상'으로 가려던 그의 영혼이 몸부림 끝에 떨어진 곳은 '태어나기 전 세상'.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는 그곳에서 조는 얼떨결에 영혼 '22'(티나 페이)의 멘토가 됩니다.
유독 유서깊은 말썽쟁이로 소문난 '22'를 멘토링하는 데 성공해야만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기는데,
과연 조는 멘토링을 무사히 마치고 바라던 세상으로 돌아가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전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의 기본 덕목인 '캐릭터의 매력'을 물론 충분히 갖추었지만,
<소울>은 확실히 '어른들도 즐길 수 있는'이 아닌 '어른들이 더 즐길' 애니메이션입니다.
특히 사회 생활을 많이 한 어른일수록 더 가슴에 꽂힐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그 메시지로 향하기까지
상상력 - 상상력의 시각화 - 시각화를 통한 캐릭터와 이야기 구축 - 캐릭터와 이야기를 통한 메시지 전달의
모든 과정이 단단하게 갖추어져 있어 관객은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조합의 세계에 그저 몸을 던질 뿐입니다.
<소울>이 훌륭한 영화인 건 메시지만이 아니라 이에 이르기 전에 갖춰진 이 탄탄한 영화적 구조 때문이기도 합니다.
촘촘하기로 정평이 난 픽사의 세계관 구현 능력은 이번 영화에도 특히 빛을 발합니다.
누구도 만나본 적 없을 '태어나기 전 세상'은 영혼이 형성되는 방식과 나름의 규율과 체계, 조직을 이루며
이 모든 것들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와 절묘한 접점을 맺으며 역동적으로 운영됩니다.
이 '태어나기 전 세상'을 2D 기반의 초현실적, 추상적 표현으로 그린 것은 매혹적인 승부수입니다.
본편에 앞서 상영되는 '토끼굴'이 2D 셀 애니메이션의 질감을 지녔는데도 픽사에서 만든 작품인 것처럼,
선과 면, 파스텔 컬러와 흑백 컬러로 이루어진 <소울> 속 '태어나기 전 세상'은
이제 픽사가 비단 3D만이 아니라 컴퓨터로 만들 수 있는 모든 질감의 애니메이션을 구현한다는 증명과 같습니다.
이와 대비되어 조 가드너의 현생이 펼쳐지는 뉴욕의 풍경은 완전한 현실에 가까운 묘사력을 자랑합니다.
바쁘게 북적거리는 거리, 가게 안에 복작거리며 꽃피는 사람들의 이야기, 어둔 카페를 가득 채우는 음악의 풍미,
건물들 사이로 문득 햇살이 비쳐올 때의 온기 등 일상의 순간들을 사진처럼 포착합니다.
실사에 가까운 픽사 애니메이션의 절대우위적 묘사력은 늘 느껴왔지만 그게 '리얼리티'와 연결되진 않았었는데,
<소울>은 픽사가 우리가 호흡하고 맞닿는 현실을 작정하고 불러올 때 빚어내는 감동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빈틈을 찾을 수 없는 기술력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메시지에 날개를 다는 것이죠.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삶이란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제1의 목표입니다.
살면서 의미 있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고민하던 조에게, 모든 과정이 삶으로 뛰어들기 위해 구축된 그 세계는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는 이미 목표에 이르렀고 목표를 이루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려줍니다.
만약 우리가 이처럼 목표 지점 위에 이미 서 있고 목표를 이루는 중이라면, 어떤 목표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삶이 초래할 수 있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불안'과 '목표를 이룬 뒤의 허무함'도 느낄 필요가 없을 겁니다.
어떤 결실은 대단한 성과와 의미를 발견하지 않더라도, 그저 완전히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태어나기 전 세상'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삶에 부여하는 의미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현실로 넘어와서는 바로 재즈라는 음악이 그러한 삶의 가치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죠.
악보와 같은 규범이나 지향점으로부터 자유로워도 몰입만으로 하나의 곡을 만들어내는 재즈처럼,
우리의 삶 또한 보고 듣고 만나고 느끼는 모든 것이 우리만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삶을 겪을수록 고갈되는 이 깨달음을, 굽이치는 영화 속 재즈 사운드가 우리 마음 속에 다시 촉촉하게 채웁니다.
누구나 함박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 구현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불편한 골짜기'를 해소하기 위해 인체 비율을 적당히 만화적으로 과장하는 경향은 지켜가면서도,
주인공 조 가드너를 비롯한 영화 속 인간 캐릭터(특히 흑인 커뮤니티)들의 흥과 익살,
따스하고 풍부한 감정을 생생하게 빚어내며 살아 숨쉬는 현실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한편 조의 멘티 영혼인 '22'를 비롯한 '태어나기 전 세상'의 구성원들은 선과 면으로만 이루어져 있음에도
유연하고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부여해 생동감과 귀염성을 모두 충실하게 발휘합니다.
포스터에도 함께 등장하는 비중있는 동물 캐릭터 '미스터 미튼스'도 무척 사랑스럽습니다.
한편 데이빗 핀처 감독과 주로 호흡을 맞춘 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의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는
이번 영화로 픽사와 처음 작업을 했는데, 현실 세계를 채우는 고전적인 재즈 사운드와
'태어나기 전 세상'을 채우는 형이상학적인 모던 사운드를 넘나들며 훌륭한 조화를 보여줍니다.
픽사의 영화는 언제나 뜻밖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우며 하염없이 감동을 줍니다.
<소울>은 꿈을 좇으라며 무턱대고 독려하는 대신, 살아감으로 이미 만들어지는 기적을 예찬하며
이미 목적지 안에 있고 목표를 성취해 가는 중인 우리들의 가치를 따뜻하게 상기시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올 때 어느 순간 태어나 세상과 호흡하는 매우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매일 해내고 있음을 스스로 기특해 하는 우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픽사의 최고작 반열에 또 한 편의 영화를 올리게 되었네요.
추천인 14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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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잘봤습니다. 관람 기대되네요.^^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게 글자로 표현되니 더 기분이 좋아지네요.
굿즈 욕심이 없고 또 요즘 바빠서 딱 오늘 오전에 상영되는 한 지점 한 타임에만 시간이 되서 막 보고 지하철에 있는데, 오티 욕심이 나기도 하네요...ㅎㅎ
연차쓰고 자유로운 하루를 보내는 중인데, 오늘 하루를 마음껏 즐기며 살아봐야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맨앞자리 앉을만한 작품이 나온거 같아요.
영화보면서 이렇게 위로받은건 처음있는 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