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과 실존주의(스포)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가장 큰 감동을 주는 건 말이 쉽지 상당히 어렵죠. 그건 모든 영화 창작자들의 꿈일텐데 픽사는 그걸 몇 번이나 해냅니다.
투명한 상상력, 따뜻한 이야기, 독창적 비주얼, 정교한 드라마 구성 등 모두 흠잡을 데가 없지만, 개별 요소를 알맞게 조율하고 조화시키면서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솜씨는 '마법'이라는 단어 외에 표현할 길이 떠오르지 않네요. 픽사는 그 희귀한 비법을 찾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영화를 보다보니 장 폴 사르트르의 대명제가 떠올랐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도구는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존재합니다. 도끼는 나무를 패기 위해 만들어졌고 옷걸이는 옷을 걸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도구는 어떤 목적(본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만들어집니다(실존). 하지만 인간은 반대입니다. 인간은 태어났지만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본질이 없는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다가 인간은 자신이 아무 이유없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나는 왜 사는 걸까?"라는 허무주의적인 자문에 답을 내리기 힘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러한 허무를 통해서 진짜 자유를 맞게 됩니다. 내가 살아가는 게 있어서 나를 구속하는 (원래 정해져 있던) 본질은 없기 때문에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죠.
<소울>에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이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과 맥이 통하지 않나 싶습니다.
<소울>은 '삶 자체가 아름답다'는 단순한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르트르가 인간이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중요시했던 것처럼,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묵직하게 던지고 있어요.
삶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지만, 과거와 현재, 미래에 걸쳐 쌓이는 나의 모든 경험이 내가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죠. 정해진 목표를 부여받으며 태어나고 스스로를 그 목표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능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의미는 있다고요.
고등학교 윤리 수업, 또 대학교 교양 강의 때 봤던 내용을 뜻밖에 여기서 보게 되네요 ㅎㅎ 말씀대로 영화의 주제가 사르트르의 명제와 큰 틀에서 비슷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