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리뷰] 소녀, 여자, 배우…정유미
지난해 배우 정유미는 논란의 아이콘이었다. 자의건 타의건 논쟁의 중심에 섰던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영화화 주인공을 맡으면서부터다. 한쪽에서는 '페미배우'라며 비하하기 시작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정유미 팬덤이 더 크게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을 의도했는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82년생 김지영'을 기점으로 정유미는 한국영화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배우가 됐다. 그런데 '독보적인 정유미'는 정말 '82년생 김지영'부터 시작됐을까? 2003년에 단편영화로 데뷔해 올해로 연기경력 18년차인 이 배우의 지난 시간은 그저 '스타'로 살았던 시간일까? 나는 2014년에 정유미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도 미쳐 깨닫지 못했지만 '독보적인 정유미'는 꽤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이 글은 '독보적인 정유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소녀, 정유미
정유미는 198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서울예대 영화과 연기전공 02학번으로 입학해 2003년 김종관 감독의 '사랑하는 소녀'로 데뷔한다. 정유미와 김종관의 만남 중 관객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이듬해 만든 '폴라로이드 작동법'이다. 초창기 김종관 감독의 영화는 이야기보다 '시(詩)'에 가까웠다. 단편영화가 시적 표현이 자유로운 만큼 그의 영화들은 시적이었고 정유미는 그 속에서 '시어(詩語)'의 역할을 했다. '시어' 정유미는 여린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올망졸망하지만 정성껏 배치된 이목구비는 속을 알 수 없는 소녀의 사색을 보여준다. 그 얼굴은 김종관의 영화를 거쳐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과 정지우 감독의 '사랑니'로 이어진다.
'달콤한 인생'의 미애는 아주 작은 역할이다. 거친 남자들의 세계를 다룬 '달콤한 인생'에서 정유미는 희수(신민아)와 함께 대립된 세계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사랑니'에서 정유미가 연기하는 어린 조인영은 옛 사랑의 설렘을 고스란히 간직한 얼굴을 하고 있다. 꽤 소녀스런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정유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림 속의 소녀에 머물지 않는다. '가족의 탄생'과 '좋지 아니한가', 드라마 '케 세라 세라'를 거치면서 정유미는 '소녀'의 정의를 확장시킨다. 대상으로써 소녀가 아닌 정체성을 가진 소녀로써 사건을 주도하고 이끄는 역할을 한다. 썩 난해한 역할('10억', '차우')을 할 때도 있었지만 정유미의 초창기는 '소녀'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는 데 있다.
여자, 정유미
결과적으로 정유미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함께 한 것은 일대 사건이다. 초창기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여성은 전형적으로 대상화됐기 때문이다. 정유미가 홍상수 감독과 처음 조우한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의 '여성 대상화'가 끄트머리에 머문 즈음이다. 정유미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두 번이나 이름으로 대표됐다('옥희의 영화', '우리 선희'). 이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름으로 대표된 경우('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오! 수정')가 많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례적이다. 현재 홍상수 영화의 대표적인 여자 캐릭터는 김민희가 모조리 맡고 있지만 정유미는 그 이전 홍상수 영화의 여자였다(페르소나라는 말이 맞는건지 고민해봐야겠다). 정유미는 작은 체구에 비해 마치 '속삭이는 일'을 할 줄 모르는 것처럼 목소리가 크다. 신경질적이다 못해 찌질한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을 압도해버리기에 목소리가 큰 정유미는 아주 적절하다. 나는 최근 '도망친 여자'를 보고 '홍상수식 여성주의'라는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했다. 홍상수에게 '여자'를 가르쳐 준 인물이 정유미(혹은 고현정)일지도 모른다(표현이 괴상하지만 초기 홍상수 영화의 남성적인 시선에 비하면 많이 여성적으로 변했다). '여자, 정유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홍상수 영화에 머물러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정유미에게는 흔치 않은 드라마 행보가 있다. '로맨스가 필요해 2012'나 '연애의 발견', '내 깡패같은 애인' 등이다. 각자 지향하는 바가 다른 세 작품이지만 이 작품에서 정유미는 연애와 삶에서 자신이 속한 계층을 대표한다. '내 깡패같은 애인'에서는 취준생을, '로맨스가 필요해', '연애의 발견'에서는 젊은 연인 중 여자를 대표한다. 이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고 지지했다는 점에서 '정유미가 계층을 대표했다'는 것은 정당성을 얻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유미는 목소리가 크다. 이는 '계층을 대표하는 목소리를 크게 내다'와 통하는 표현이다. 이것은 자신이 속한 계층에 국한되지 않는다. '내 깡패같은 애인'과 '로맨스가 필요해' 사이에는 정유미에게 정말 중요한 영화 '도가니'가 있다. 정유미는 이미 자신이 속한 집단뿐 아니라 모든 집단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소리(울림)가 큰 배우다.
혹자들은 '여배우라는 표현은 성차별적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유미의 이력에서 '여자'라는 표현은 생물학적 자신의 지위를 인정하고 그 지위에서 목소리를 내겠다는 의도로도 읽힌다. '82년생 김지영'을 선택한 그녀가 괜한 선택을 한 게 아니라는 의미기도 하다.
배우, 정유미
정유미를 여성주의적 배우로 가두는 것은 그를 너무 좁게 보는 일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정유미는 곧 연기경력 20년차를 바라보는 배우다. 최근 정유미는 '더 테이블', '부산행', '염력', '보건교사 안은영' 등을 거치며 여러 얼굴을 보여줬다. 올망졸망한 이목구비에서 확장성이 있을까 의심도 해봤지만 이목구비의 확장성은 그녀의 목소리만큼 무한하다. 순해보이는 그 얼굴이 악당이 될 때 얼마나 개성이 있는지도 볼 수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나 찰지게 욕을 내뱉는지도 볼 수 있었다. '현재의 정유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배우의 확장성이다. '82년생 김지영'은 그 확장성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82년생 김지영' 속 정유미는 육아의 무게를 얼굴 깊숙히 담아내고 발현한다. 또래의 배우에게서 본 적이 있었나 싶은 무게감이다('82년생 김지영'을 소설로 읽지 않은 입장에서 언급하는데 이 영화는 한 쪽이 지나치게 열광하고 한 쪽이 지나치게 폄훼할 영화는 아니다. 젊은 세대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둥글게 지내는 영화다).
정유미의 확정성과 무게감은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쌓아온 결과다. 정유미는 긴 경력동안 목소리를 내고 얼굴로 표현하는 법을 꾸준히 연마해왔다. '82년생 김지영'과 '보건교사 안은영'으로 보여준 얼굴과 말의 표현력은 이 배우가 지금부터 작정하고 확장할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초석이 된다(여기에는 '더 테이블'에서 보여준 활기차면서 서정적인 '말'도 무시할 수 없다. 그저 앉아서 대화만 한 영화지만 정유미는 대화에 많은 것을 담아 표현한다). 정유미의 개봉 대기작은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다. 톱배우들이 대거 합류한 멀티캐스팅 영화지만 정유미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롤을 찾아 적극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정유미를 보는 일은 재미있다. 그렇게 목청 큰 배우도 본 적 없고 그렇게 눈이 슬픈 배우도 드물다. 그렇게 욕이 찰진 배우도 낯설었고(사무엘 잭슨?) 그렇게 계층을 대표하는 얼굴도 드물다. 올망졸망한 이목구비는 계층을 대표하기 좋다. 정유미는 김태용, 홍상수, 김종관 등 중견 한국감독과 많은 작업을 했다. 그러나 누구의 페르소나도 되지 않았다. 정유미는 자신이 속한 계층의 페르소나다. 정유미도 나이를 먹는다. 그러나 정유미의 계층은 이동하지 않는다. 대신 확장될 뿐이다. 정유미는 자신이 속한, 거쳐온 모든 계층의 페르소나다. 정유미는 늙어도 필모그라피는 남고 정유미의 스펙트럼은 더 넓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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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력》에서의 짧고 굵은 역할은 가히 씬스틸러급이었고 윤식당으로 예능까지 접수하더군요
할 일 없는 일부 네티즌들이 별 논란같지도 않은 논란 만들고 프레임 씌우는데 정유미는 그것과 무관하게 승승장구 할 겁니다. 차기작이 기대되는 배우 중 하나에요
"정유미는 참 이상한 배우다. ‘사랑니’를 통해 스크린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다. 작은 화분에서 자족적으로 광합성을 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틔워왔을 것 같은 섬세한 촉수와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야생의 에너지가 역설적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그 느낌은 여러 해가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배우들은 종종 연기 스타일이나 성향에 따라 이리저리 묶여 거론되기도 하지만, 정유미는 다른 누구와 비교해가면서 설명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그는 한국에 없는 배우다. 극중에서 어떤 짓을 해도 튀지않고 누구의 상대역을 맡아도 어긋나지 않는다."
이동진평론가가 10년전 정유미에 대해 쓴 글인데 공감돼서 가져왔어요ㅎㅎ
특정 양집단에서 자기들 멋대로 사상검증하며 정유미를 가두려고 노력하는데 정유미 오랜 팬으로서 정유미는
특정사상이나 틀에 가둬질 배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캔디 주인공은 아니어요.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