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주의> - 추석 연휴 힐링을 안겨줬던 유일한 영화 [교실안의 야크]
9월 30일부터 10월 4일까지 5일간의 추석 연휴. 코로나 이후 처음 맞는 추석인지라 긴 명절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딱히 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언제나 그렇듯 동네에 있는 메가박스와 CGV 두 극장의 시간표를 확인해 본다.
예년과 같은 명절용 대작은 없지만 이런 저런 영화는 많이 걸려있다. 그래 보다보면 뭐 하나는 걸리겠지.
하루 당겨진 문화의 날인 29일부터 30일까지 하루 두편씩 이틀간 4개의 영화를 봤다.
국제수사, 담보, 해수의 아이,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
아쉽게도 개인적으로, 그래 이 영화다 싶은 것도 없고 주위에 꼭 보라고 추천할 만한 영화도 없었다.
동네라지만 하루 2편씩 연달아 영화를 보려면 4~5 시간이 소요되는데 보고나면 피로가 오히려 쌓이는 느낌이니..
그렇게 추석 당일을 쉰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자 또 좀이 쑤신다. 아직 3일이나 남았는데 이렇게 집에서 TV만 보며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 아쉽다. 뭐 볼게 없을까? 동네 두 극장에선 더 이상 볼 영화가 없다.
그럼 예술영화쪽은 어떨까? 문득 익무에서 엄청 호평 받았던 영화가 떠오른다. 뭐였더라?
교실안의 야크. 부탄 영화란다. 찾아보니 평점이 9점이 넘는다.
좋아 적어도 작품성 하나는 건질 수 있겠네.
그런데 암만 찾아봐도 상영관이 이렇게 없을 수 있나?
동네 극장은 물론이고 집에서 가까운 구로와 여의도 아트하우스에서도 이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다. ㅜㅜ
보니까 전관 아트하우스인 명씨네가 아침 조조와 늦은 밤 2번인가 상영하고 3개관이 아트하우스인 압구정에서
저녁 6시 단 한번 상영한다. 흐음..이리 평이 좋은데도 제 3세계 영화라서 그런가? 상영관이 넘 아쉬운데..
애매한 시간, 집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1시간 넘게 가야하는 곳. 아 그냥 집에서 TV나 보며 쉴까?
오전 내내 고민하고 점심 먹고 낮잠 자고 일어나서, 아직도 연휴는 사흘이나 남았는데
이렇게 뒹굴거리단 방구석 폐인되겠네 싶은 마음에 덥썩 예매를 하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그렇게 올해 처음으로 간 CGV 압구정. 명절 연휴답게 조용하다.
관객은 나 포함 10여명 남짓. 모두 혼자 온 사람들이다. 그렇게 조용히 영화가 시작됐다.
조용한 나라 부탄에서 교사로 일하기 보다는 호주로 이민가서 노래를 부르는게 꿈인 젊은 남자가
외딴 오지마을에서 내키지 않는 교사일을 하게 되지만, 순수한 아이들과 친절한 마을 사람들,
그림같은 자연 풍경에 동화되어 서서히 달라진다는 것은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어렴풋이 예상 가능한 이야기였다.
이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이 영화는 놀랍도록 담백하게 펼쳐보였다. 우리가 흔히 영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사건을 만들지도 않았고, 주인공 유겐이 마을의 처녀 살돈에게 마음이 있음이 보이는데도
둘의 러브라인을 억지로 만들어 내지도 않았다. 추석에 본 다른 영화들처럼 과장된 유머도, 억지 신파도,
현란한 영상미도, 말장난도 없이 오직 아름다운 부탄 오지마을의 전경과 그만큼이나 때묻지 않은
그 곳 사람들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뿐이었다.
단지 그게 전부였는데 그 어떤 코미디 영화보다 재미있었고, 그 어떤 신파영화보다 마음을 울컥하게 했다.
MSG 가득한 인스턴트 음식들을 먹다가 명절에 시골에 내려가 어머니가 차려주신 건강한 비빔밥 한 그릇을 뚝딱한 느낌이랄까?
문득 20여년전이 떠올랐다. 지금과는 다른 젊은 시절의 장이모우가 내놓았던 너무나도 순수했던 영화
'책상서랍속의 동화' 와 '집으로 가는 길' 을 극장에서 보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두 영화 모두 슬픈 영화가 아니었음에도
너무나도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극 중 인물들의 마음에 동화되어 그런지 기분 좋은 눈물이 났었더랬다.
정확히 20년만에 그런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만났다. 아마 평생 가보지 못할 곳, 평생 만나보지 못할 사람들이겠지만
이렇게 스크린으로나마 아직 저런 세상이, 저런 사람들이 존재하는구나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 만으로도 어찌나 좋던지.
영화적[전형적] 이지 않은 현실적인 엔딩도 무척이나 좋았다. 마음이 먹먹해 지는 결말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8시. 해는 지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서울밤의 공기마저 이리도 상쾌하게 느껴지다니.
층마다 성형외과로 가득찬 고층빌딩이 늘어선 압구정 대로를 걸어 명절 연휴에도 문을 여는 부대찌개 집에 갔다.
이런 좋은 영화를 봤으니 소주 한잔 안 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칼칼한 부대찌개에 라면 사리 넣어서 한 입 먹어본다.
MSG 가득한 강렬한 얼큰함이 밀려온다. ㅎㅎ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살아가는 서울이지.
부탄을 떠나 현실인 서울로 돌아오지만 기분이 좋다. 힘이 난다.
추석 연휴 이후 좋은 영화라는 입소문이 나서 그런지 오히려 그 때보다 상영관이 늘어난 느낌이다.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영화인데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게 기분이 참 좋다.
다음주면 내 생일이고 생일날 1년동안 못 본 선배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때 선배와 다시 한번 이 영화를 같이 봐야겠다.
함께했던 오랜 시간만큼, 얼굴을 못 본 시간 만큼 영화를 안주 삼아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다.
추천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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