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간략후기
2007년에 세상을 떠난 대만 출신 거장 에드워드 양 감독의 대표작으로,
나온지 26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 정식개봉한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보았습니다.
공식 러닝타임이 4시간에서 3분 모자란 만큼 관람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도전'이기도 합니다만,
영화가 주는 감동의 가치는 그 '도전'이라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4시간이 재미있는 경험이라고 장담할 순 없으나,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그림이 이 영화 한 편에 담겨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경험입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실제로 1961년에 있었던 대만 최초의 미성년자 살인사건을 소재로 합니다.
제목에도 '살인사건'이라는 단어가 버젓이 명시되어 있으니 어두운 사회극, 범죄극인가 싶겠으나
제목 속의 '살인사건'은 단지 결과의 하나일 뿐, 영화는 그보다 훨씬 풍성한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4시간에 가까운 시간동안 영화는 주인공 샤오쓰(장첸)를 둘러싼 학교와 가족 등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
밍(양정이)과 샤오마(담지강)와 캣(왕계찬), 허니(임홍명)와 슬라이(첸홍유) 등 관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둘러싼 세상의 공기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담담하게 전개합니다.
가뜩이나 긴 시간 속에 사건과 사연을 빽빽하게 배치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는 제목만 보고선 상상하기 힘들 만큼 몹시 느긋하고 서정적인 톤을 수시로 띱니다.
그러나 이렇게 영화가 시시콜콜 구구절절 늘어놓는 일상의 조각들은
그 사이사이 샤오쓰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거운 사건들과 중첩되며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중국 대륙에서 벌어지던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이른바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게 되면서
국민당은 대만으로 넘어와 '중화민국' 정부가 세워진 후 이어지던 불안한 정세,
그런 와중에 자신들마저도 위태롭기에 다음 세대까지 보호할 자신은 없었던 기성세대의 무력감,
그리고 자신들의 미래를 알아서 지키기 위해 '소년 갱단' 같은 왜곡된 형태의 독자 활동을 이어가던
어린 세대의 폭력이 어우러지며 지극히 평범할 줄 알았던 소년의 여름날에 생채기를 내기 시작합니다.
친구들과의 시끌벅적하던 나날, 첫사랑 앞에서의 설레는 마음 같은 것들로 채워지던 소년기에는
그렇게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가 점점 더 짙고 넓게 물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내성적이지만 평범했던 소년이 어떻게 비운의 주인공으로 변해 가는가를 따라가 보면,
보통의 영화들처럼 비정상적으로 굴곡지고 기구한 사연이 갑작스럽게 덮치는 식이 아닙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시대를 뒤덮고 있던 분열과 폭력이 어른 세대를 굴복시키고,
그런 시대에 대한 새로운 방어기제로서 폭력에 익숙해져 가던 어린 세대의 암흑화는
서서히 소년의 미래마저 시커멓게 부식시켜 갑니다.
일상에 내밀하게 잠입해 들어오는 그 시대의 폭력은 변화할 수 있다고,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던
소년의 미래마저 굴복시키고, 결국 비극은 일차원적인 분노가 아니라
나를 무릎꿇린 시대의 폭력 앞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무력감이 불러오게 됩니다.
영화는 극적인 순간들 위주로 사건을 다루며 러닝타임을 단축시키는 대신
굳이 기나긴 시간동안 소년의 삶을 잠식해 오는 그때 그 세상의 어둠을 찬찬히 바라보며,
영화라는 형태의 대중 엔터테인먼트로 마냥 소비할 수만은 없는,
때론 이렇게 간접경험에 가깝게 그 까마득한 무게감을 느껴봐야만 하는 현실을 마주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얘기하는 건 시대는 '어떻게든'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단지 내가 시대를 규정하는 어떤 사건에 연루되지 않더라도, 나와 관계 있는 사람이 얽히지 않더라도
시대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적응해야만 하는 고유의 공기를 만들기 마련이고,
그 공기 안에서 개인은 무사히 숨쉬기 위해 태도를 바꾸어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내가 나일 수 있을 때 자존감이 가장 높아질 수 있는 존재이지만,
시대 안의 인간은 내가 나이기를 주장한다는 것이 너무 위험한 일이라는 그 슬픈 진실 때문에
어두운 미래로 나아가는 이 영화 속 소년의 이야기는 무섭기보다 서럽게 느껴집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화권 배우 장첸의 데뷔작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새로운 얼굴의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쓸쓸하고도 순수한 분위기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주인공 샤오쓰를 연기한 장첸 배우는 성인 배우 때의 활약 장면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길들여지지 않은 순수와 저항이 공존하는 얼굴이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듭니다.
순정을 안고 시대의 어둠을 그대로 투영하는 그 눈빛은 '동양의 리버 피닉스'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 장첸은 실제 아버지, 형과 함께 가족 연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이 영화가 처음이자 마지막 출연작인 밍 역의 양정이 배우가 전하는
폭력의 시대 안에서 홀로 영롱한, 그래서 오히려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무너뜨리고 마는 '교정되지 않은 아름다움'이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정말 현실에 있을 것 같은 캐릭터로 심심찮은 웃음을 주는 캣 역의 왕계찬,
잠깐 등장하지만 조각 같은 외모로 인물의 이상적 캐릭터를 실감나게 전하는 허니 역의 임홍명 등
지금은 어떻게 지낼지 궁금해질 정도로 활약을 펼치는 어린 배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어린 배우라고 하지만 26년이 지났으니 다들 40세가 넘었겠지요.)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지나서야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접한 에드워드 양 감독의 작품세계는
시대와 긴밀하게 이어져 있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세상을 구성하는
무수한 형태의 빛과 그림자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큰 의지와 작은 기교, 넓은 이야기와 깊은 인물의 영화를 만들어 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분량의 제약이 있는 만큼 영화가 실존하는 세계 그 자체를 담아낸다는 게 쉽지 않은데,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보면서 50여년 전 그 세계 안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느낌을 받았네요.
에드워드 양 감독이 더 오래 머무르며 우리에게 이런 경험을 전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 '더 스페셜 패키지'로 본 만큼 영화가 끝난 후 특별한 기념품들을 받았습니다.
영화 속 주옥같은 장면들이 실린 2018년 캘린더와 엽서 5종, 손거울을 받았네요.
+ 많은 인물들이 나오고 이름들도 비슷한 데다, 각 인물들마다 별명과 본명이 따로 있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이런 부분을 머릿 속에서 꾸준히 정리해 나가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인물들은 생김새도 비슷해서 헷갈리기도 합니다.)
+ 자막에 오타가 상당 부분 보인 점은 아쉬웠습니다.
'애들'이 '얘들'로, '없애버려'가 '없어버려'로 나오는 식의 오타는 그렇다 쳐도
등장인물의 이름이 잘못 표기되는 경우도 있어 더 아쉬웠네요.
(친구 샤오마의 집을 방문한 주인공 샤오쓰가 이름이 뭐냐는 샤오마 어머니의 질문에
(실제로는 당연히 '샤오쓰'라고 답함에도) "샤오마요"라고 자막에 나올 때가 있었습니다.)
아래는 '더 스페셜 패키지' 기념품들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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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영화보면서 잘 와닿지 않던 것들이 이제 좀 느껴지는 것 같아요.
자막오타는 저도 보면서 거슬렸던 부분이었습니다. 좋은 영화 들여왔는데 자막이 좀 그렇네 싶더군요..

뭔가 다시 한 번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그럴 기회가 다시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발견하셨군요.^^

영화가 정말 좋아서 더 아쉬웠네요 ㅎㅎ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