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리뷰 - 강스포 단평 + 감상가이드
"Oppenheimer, 2023"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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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지식이 필요한가? (약스포)
저는 원래, 영화를 보기 전에 ’배경지식‘을 알아야 하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리즈물 제외) 한 영화 안에 내용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해 사전공부가 필요하다면, 그건 감독이 과욕을 부렸거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이죠. 역사/전기영화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자체의 묘사로 역사적 인물에 충분히 공감하게 되거나, 영화 감상을 통해 사건과 인물에 대해 더욱 알고 싶게 만들어야지, 영화감상 전에 공부를 안 하면 문제가 되는 그런 영화는 오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본작은 배경지식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 2시간 동안은 그렇습니다. 뒷부분에 대한 내용은 4번 사항을 읽어주세요.)
어차피, 배경지식을 알고 가도 어려울 거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게 꼬아놓은 시간교차 편집, 끊임없이 등장하는 과학자들, 빠른 편집과 몽타주... 본인이 ’과학자‘가 아닌 이상, 어차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대신, 놀란 감독 특유의 연출력이 있습니다. 전형에 맞춰 상황을 전개해나가기 때문에 '아 대충 어떤 상황이구나..' 를 알수는 있고, 인물과 장면을 끊임없이 등장시켜도 스포트라이트는 결국 오펜하이머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에 '오펜하이머의 주변과 감정선'만 따라가시면 됩니다. 인과와 관계를 따지기보다, 인물들의 고뇌와 인생사에 있어 철학적인 고찰을 곱씹으며, 인류의 (정치적이 아닌, 기술적인) 위대한 도전의 길을 같이 걸어가시면 됩니다.
+그래도 복잡한 영화 힘들어하신다면, 어떤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정도는 알고 가시면 이해가 쉬우실겁니다.
2. 지루하다는 의견이 있던데? (약스포)
본작은 대중적인 영화가 결코 아닙니다. 놀란 감독만의 작가주의적 특징들이 테넷 이후 또 한 번, 극대화된 영화입니다.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기까지 2시간 동안, 작품에는 기승전결이 없습니다. 가쁘게 진행되는 과학적인 논쟁들, 복잡하게 흘러가는 여러 정치사안 등의 묘사들이, 오펜하이머와 과학자들이 나치와의 원자폭탄 개발 경쟁을 앞두고 얼마나 긴박하고 절박했는가, 그 분위기를 조형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상황을 하나하나 찬찬히, 친절하게 짚어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앞서 말한 것처럼 이해하기 어려워질 것이고, 이 부분이 충분히 불친절하다 여기실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영화가 인물 소개도 차근차근 해주고, 인물들의 관계 및 심리묘사를 충분히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보기 굉장히 힘드실 겁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결국 지루해지실 겁니다. 저는 감독의 독보적인 연출력이 상황이해를 보완해준다고 본 긍정적인 입장이지만, 이 경우에도 한계가 찾아옵니다. 밀도 있는 장면과 분위기가 쉬지 않고 빠른 페이스로 진행되다 보니, 몰입하는 관객에게도 체할 수준의 정보량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평상시 ’불친절한 내러티브‘에 얼마나 면역이 있었는가에 따라 호불호가 상당히 갈릴거라고 생각합니다.
3. 그럼 어떤 부분이 좋았나. (강스포)
3-1. 놀란 감독 특유의 연출.
저는 무조건, 몽타주보다 미장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란 감독의 스타일은 참 좋아합니다. 불친절하다고들 생각하는데 저는 의외로 담백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지나치게 빠른 편집 때문에 오해를 사는 것 같은데, 상황을 크게 왜곡시키거나 한 화면에 너무 많은 상징을 담는 것을 극도로 피하면서, 긴장감 있는 분위기 + 순간순간 흡인력 있는 대사를 통해 관객의 고놔와 뽕을 제대로 불러일으키는 스타일입니다. 본작에서는 지루할 수 있는 전기영화에 긴박감을 더하는 방식으로, 연출과 주제가 서로 윈-윈 했다고 생각합니다.
3-2. 오펜하이머에 대한 묘사.
전기영화가 인물을 편향되게 묘사하기 참 좋은 장르인데, 본작은 오펜하이머의 중립성에 대해 훌륭하게 묘사해냅니다. 비상하며, 결단력도 있고, 최소한의 도덕적 윤리를 지닌만큼, 이론이 현실이 되어감에 따라 점점 고뇌에 빠지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독단적이고 오만하며, 성격적 결함도 많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결정을 회피해버리고 마는 인물입니다.
정치적인 성향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어느 한쪽만을 지지하지 않으며, 굳건한 애국심을 지니지만 다른 국가들의 정치/전쟁 사안에도 관심을 가지고 깊이 통감하며, 정으로 가득하 애국 못지않게 동료애도 중요하게 여기는 중립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말대로, 한 극단에 치우치기 보다 열린 사고를 추구하는 인물이죠. 이런 묘사를 통해 관객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불러일으킵니다.
가장 상징성이 좋았던 부분 - 원자폭탄 개발 성공을 통해, 오펜하이머는 그토록 바랐던 안정과 평화의 시대를 복구해낸 동시에, 끝내버렸다는 것. 위대한 업적이 가져온 여파를 그대로 감당해야만 하는, '천재'의 숙명을 곱씹는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의 대사와, 이 부조리를 표현하는 킬리언 머피의 연기도 정말 훌륭했습니다.
3-3. 소재/주제의 균형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는 과학자들의 이야기지만, 그 소재 안에서 갇히지 않습니다. 정치, 역사, 도전, 이중적인 인간의 삶, 개인적인 고뇌와 철학적인 고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과학지식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인물들이 순간순간 내뱉는 묵직한 대사의 말맛을 곱씹으며 우리들의 삶에 대입해서 읽어내다 보면, 과학자들의 이야기여도 이입되는 부분들이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4. 마지막 1시간이 좀 뜬금없고 아쉬웠다 (강스포)
(이 부분은 사전지식이 있으면 이해가 좀 쉬우실 것 같습니다. 갑자기 정치극으로 바뀌는 만큼, '과학정보'보다 '트루먼 대통령 당시 메카시즘의 광풍'에 대한 '역사 정보' 쪽으로 알고 가시길 추천드립니다.)
2시간에 걸친 도전은 원자폭탄 개발 성공과 함께 끝이 납니다. 전개는 비록 불친절하고 복잡하지만, 오펜하이머에게 집중하고 + 인생철학을 말하는 배우들의 대사 하나하나 말맛을 곱씹으며 = 위대한 도전을 마침내 끝내게 됩니다.
그 후.. 보편적인 주제를 던졌던 전기영화는 갑자기 정치첩보극이 되어버립니다. 재판과 청문회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상징과 은유로 풍부했던 장면들이 갑자기 플랫한 증거물이 됩니다. 몽타주를 빡세게 건 만큼, 인과나 관계에 집중하지 않고 긴박한 분위기 속 인물들의 고뇌를 느끼면 좋다고 말씀드렸는데, 영화가 갑자기 톤을 바꿔 인과나 관계를 파헤치기 시작한 거죠. ’회고록‘ 정도로 여겨졌던 스트로스 제독(로다주)의 흑백화면도 암투로 비춰지며 뜬금없어집니다. 주인공이 갑자기 두 명이 되며, 화자도 스포트라이트도 붕 떠버립니다.
이 1시간이 상당히 아쉬웠습니다. 분위기나 장르가 갑자기 바뀌고, 스트로스 제독이 오펜하이머와 대립하는 인물이라는 반전도 뜬금없고 (사전지식이 없던 상황에서는), 인물들의 감정이나 재판의 전략도 너무 복잡하게 꼬아놔서 1시간 만에 말할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순서 좀 가다듬고 상황 압축해서, 재판이나 추궁에 대한 쓸데없는 정보는 확 줄이고 오펜하이머가 과학자로써 느낀 고뇌와 부조리를 더 이야기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스크라
추천인 7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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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감독님 작품은 닼나-인셉션 시기가 최애이긴 한데, 최근의 연출스타일도 정말 좋아합니다 ㅎㅎ.
오펜하이머가 감독색깔이 가장 적은 영화라고 느끼신 분도 있었던 것 같은데, 저는 놀란감독답다~ 생각하며 몰입해서 봤습니다 ㅎㅎ.
역시 후반 한 시간에서 많이 엇갈리네요
후반 한 시간이 참 아쉽습니다 ㅎㅎ
영화보고 1시간 반만에 쓴거라, 아마 비문도 많고 좀 중언부언했을겁니다 ㅎㅎ;;
긴 글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영화의 톤이나 문법이 갑자기 확 바뀌는 바람에 영 안 와닿았던..
그래도 그의 인생의 마지막이 씁쓸했다고 한다면, 후회와 회환에 갇힌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상징적이게 되겠네욥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