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후기 - 끝나지 않은 파멸의 연쇄반응
용아맥 첫회차로 오펜하이머 보고 왔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까지의 과정, 핵폭탄 개발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 이후의 집중적인 인물 심경 탐구와 그 속에서의 인물간의 복잡한 관계들.
영화는 3시간의 분량동안 위의 과정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행시켜 갑니다.
마치 영화를 보는게 아닌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스스로의 템포로 진행되는 서사 속에서 스크린에 역사적인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이 한명씩 등장할 때마다 속으로 탄성을 내뱉었습니다.
미스터 썬샤인에서 안중근 의사의 등장과 같은 느낌을 수차례 받았다고 표현해야겠네요.
학부 수업에서 한번씩은 이름을 들어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이렇게나마 보게 되다니.
그들이 만들어내는 지적인 대화는 무지한 학생인 저조차 듣고 있기만 해도 지성의 한계치까지 충전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중성자 핵분열의 실험적 성공 - 입증 - 원자폭탄의 개발 가능성 확실시 - 맨해튼 프로젝트의 설계 - 내폭 구조 설계 - 텔러의 핵융합 수소폭탄 구조 제안 으로 이어지는 과학적,기술적 성취의 진행과정은 그 어느 SF보다 훨씬 과학적인 몰입도가 높았습니다.
영화의 초반, 영화 자체적으로 1.Fission(핵분열) 2.Fussion(핵융합) 이라는 자막이 뜹니다.
처음 그걸 보곤 영화의 파트를 나누는 목차인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것 같았고, 앞으로 진행되는 인물들간의 관계를 입자의 두 반응 과정에 빗대어 간략히 표현한 듯 했습니다.
물론 분열과 융합이라는 지극히 1차원적인 단어 해석에서 비롯된 감상입니다만, 후반부 인물들의 갈등이 빚어낸 연쇄작용들의 파급을 보면 아예 근거가 없진 않은 것 같네요.
트리니티 실험장면은 깔끔했습니다.
내폭실험과정이 완료되고 폭약속에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자리한 뒤 완성된 폭탄을 철탑위로 올리는 과정이 시작되고, 가이거 계수기가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깔리며(체르노빌 드라마에서도 느낀거지만 이 소리만 들으면 왜이리 긴장되는지) 긴장감이 고조됩니다.
그리고 아마 오펜하이머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트리니티 실험은 폭탄의 굉장한 폭발과 함께 성공적으로 마무리 됩니다.
놀란감독의 과하지 않지만 압도되는 연출이 돋보였던 순간인 것 같습니다.
나치의 패망과 완성된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되는 과정은 오펜하이머가 원폭의 실전 사용에 관한 고민을 끝마치기도 전에 일순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스트로스의 정치적 공작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기 시작하죠.
-과학적 윤리관
영화속 과학자들은, 아니 세계대전 당시의 과학자들은 이념의 대립 사이에서 과학적인 성취의 이점을 온전히 모든 인류가 누리게 하기는 매우 힘들었을 겁니다.
통념적으론 과학자는 좀 더 큰 분류-인류 에게 이점이 있는 방향성을 제시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다만 전시상황에선 눈앞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시적인 아군의 이득을 가져오는 방법도 있겠죠.
이 부분을 대하는 과학자들의 태도가 흥미로웠습니다.
오펜하이머가 연쇄반응의 대기폭발 가능성을 제시한 계산식을 들고 아인슈타인을 찾아갔을때, 아인슈타인은 말합니다.
만약 그 계산식이 사실이라면 연구를 멈추고 독일에 알린 뒤, 양쪽 모두 폭탄의 개발을 잠시 중단해야 하지 않겠냐고.
본인 민족의 뿌리를 뽑으려 하는 '악'임에도 알버트는 과학자로서의 선택을 합니다.
또는 텔러와 같이 시작은 과학적 호기심이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군비경쟁과 같은 나라 사이의 대립에 이점을 가져오는 선택을 하는 부류도 있었고요.
라미말렉이 연기한 힐과 같은 인물도 그 사이 어딘가에서 또다른 위치를 잡고 있었던거 같네요.
원폭이 결국 투하되고 그때까지도 실전 사용에 회의적이었던 오펜하이머는 11만이라는 피해 인구수를 들었을때 어떤 기분일지, 이후 왜 수소폭탄의 개발을 알게모르게나마 저지하려 했는지 알것 같습니다.
현재는 기술적 특이점이 거론될만큼 발전속력이 가속화되는 중인데, 인류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을 맞이 했을때 그곳의 인물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요.
-플롯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대화는 비워진채로 영화가 끝날줄 알았습니다.
스트로스의 패배와 오펜하이머의 노년을 보여주며 말이죠.
하지만 역시 감독이 감독인지라, 마지막에 큰 핵폭탄 같은 한방이 있더군요.
오펜하이머가 걱정했던 파멸의 연쇄반응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침 해뜨기도 전에 와서 본 영화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봤습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관계를 집요히 파고드는 스토리는 겹겹이 싸인 납벽돌과도 같았고 인물의 심리묘사는 오펜하이머는 물론 모든 배우들의 배역 그 자체가 된 연기와 상황에 맞는 연출이 맞물려 눈빛 하나만으로도 모든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전기영화적인 성격을 띄고 있음에도 여러 장르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와닿았습니다.
그리고 혼자서만 느낀걸 수도 있는데, 유독 이 영화가 놀란 감독의 색채가 많이 빠진 것 같았습니다.
몇몇 장면의 구성에서만 그 향기가 느껴지는 정도고 전체적으로는 이전의 작품들과 좀 달랐던 것 같네요.
이게 놀란 감독이 지향하는 앞으로의 방향성이라면 저는 이 또한 믿고 볼 수 있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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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이나 테넷보단 플롯의 중요성이 영화의 표면위로 비교적 충분히 떠오르진 않았지만 그 역할을 완벽히 해낸 것 같습니다.
역시 보시는 게 다르네요.^^
전설적인 과학자들이 하나씩 나올 때.. 어벤져스 보는 기분 들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