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에 진심인 이 감독님
스포와 뇌피셜이 가득한 글입니다. 감안하시길.
허트 로커, 제로 다크 서티등의 작품으로 아카데미에서 인정받은 명감독 캐서린 비글로우는 데뷔 당시부터 웬만한 남성 감독보다 액션 더 잘 찍는 여성 감독이라는 평을 받아 왔습니다. 이후에도 작품을 낼 때마다 훌륭한 액션 연출 뿐만 아니라 테러나 전쟁 등의 거대한 폭력을 마주한 인간들의 내면과 심리에 대해서 냉정하지만 깊이있는 통찰을 보여주고 있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캐서린 비글로우의 작품에는 재미난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캐스팅인데 특히 나쁜 남자에 대해 진심이란 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영화 같으면 악역 캐스팅 1순위인 배우들을 데려다가 선역, 또는 주인공으로 기가 막히게 잘 써먹는다는 점이죠.
그럼 이 분이 어떤 악역 배우를 데려와 갱생(?)시켰는지 함 보시죠.
블루 스틸(1990)/클랜시 브라운
하이랜더(1986)에서 클랜시 브라운(...)
쇼생크 탈출(1994)에서 클랜시 브라운
블루스틸(1990)에서 클랜시 브라운.
하이랜더의 광전사, 쇼생크 탈출의 악랄한 간수장, 스폰지밥의 악덕 사업주 집게사장까지... 영화, 드라마, 심지어 성우를 통털어 클랜시 브라운은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악역배우 중 한 명입니다.
그런 클랜시 브라운이 비글로우 감독의 초기작 블루 스틸(1990)에서는 주인공 제이미 리 커티스를 도와 연쇄살인마 전남친을 추적하는 조력자 형사로 나옵니다. 처음에는 제이미에게 툴툴대고 야박하게 대하지만 곧 그녀를 인정하고 심지어 사랑에 빠지는 제법 로맨틱한 역활이죠. 덕분에 베드씬까지 나오는데 예상외로 준수한 외모에 조각같은 몸매를 보여줍니다.
젊은 날 제이미 리 커티스의 깔끔한 경찰 정복차림, 리볼버의 6발 장탄제한이 스릴감을 더하는 근사한 총격전과 더불어 비글로우 감독의 독특한 나쁜 남자 취향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블루 스틸은 클랜시의 길고 긴 필모에서 정말 몇 안되는 선역 중 하나입니다.
폭풍 속으로(1991)/ 게리 부시
이제는 전설이 되버린 형사 버디물의 걸작, 리썰 웨폰 1편(1987)의 최종보스로 관객들에게 강렬하게 눈 도장을 찍은 게리 부시는 이후에도 언더 시즈(1992) 같은 영화에서 꾸준히 악역으로 활약합니다. 제가 봤던 영화들에서 대체로 이 분이 나왔다하면 거의 악역이거나 악역에 준하는 나쁜 놈 역이었죠. 심지어 이 분의 아들 제이크 부시도 아버지만큼은 아니어도 꾸준히 악역 전문 배우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비글로우 감독의 폭풍 속으로(1991)에서 게리 부시는 신참 FBI 요원 키아누 리브스의 파트너로 나옵니다. 처음에는 애송이 취급하지만 나중에는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도와주는, 전형적인 입 걸고 산전수전 다 겪은 속깊은 선배 포지션이죠. 당시 리썰 웨폰 시리즈에 한창 심취해 있었던 터라 갑자기 선역으로 등장한 게리 부시를 보고 사실은 쟤가 범인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만... 끝까지 키아누를 믿고 도와주는 든든한 선배이자 파트너로서 임무를 다하고 아쉽게도 순직합니다.
재밌는 건 이 작품의 악역인(...이라기보다는 반동인물에 가깝긴 하지만 어쨌든,) 패트릭 스웨이지는 이 작품 전까지는 선역 전문 배우였다는 겁니다. 그의 전작은 그 유명한 사랑과 영혼(1990)이었죠.
스트레인지 데이스(1995)/ 랄프 파인즈
쉰들러 리스트에서 랄프 파인즈.
스트레인지 데이즈에서 랄프...
랄프 파인즈는 근사하고 기품있는 영국 신사 분위기로 등장하는 작품이 많지만 살펴보면 은근히 악역 지분도 많은 배우입니다. 영화 데뷔작부터가 나쁜 남자의 원조이자 최고봉인 폭풍의 언덕(1992)의 히스클리프 역이었으니...뭐 말 다했죠. 이후 쉰들러 리스트(1993)의 잔악한 수용소장 역으로 데뷔한지 얼마나 됐다고 당당히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에 오르더니, 이번 세기 들어서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끝판왕 볼드모트를 맡아 세계구급 악당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여하튼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연기력 때문에 우리는 이 아저씨가 꽤 많은 영화에서 악역을 맡았던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곤 합니다.
재미있게도 스트레인지 데이스에서 랄프 파인즈는 그의 전매특허였던 두 가지 이미지인 말쑥한 영국 신사도, 냉혹한 악당도 아닌, 전혀 색다른 역활을 맡습니다. 바로 전뇌마약에 취해 헤롱대는 히피 역이죠. L.A 폭동의 시발점이 된 로드니 킹 사태를 SF로 풀어낸 이 작품에서 그는 대충 빗어 넘긴 장발에 실크 셔츠를 입은 채 하루종일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며 전뇌마약에 빠져있습니다. 심지어 이전 비글로우 작품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자기 몸 하나는 지킬만한 전투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는 그런 거 조차 없어서 뭘 하려면 개인 보디가드인 안젤라 바셋(지금은 블랙 팬서의 여왕님으로 더 유명한,)의 힘을 빌려야만 합니다.
랄프가 마약에 쩔은 히피역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싶으시겠지만, 보다보면 예상외로 랄프 파인즈의 귀족적이고 섬세한 외모가 묘한 모성애과 보호본능을 일으킵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리즈 시절 랄프의 미모가 하드 캐리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ㅋㅋㅋ) 무엇보다 전작 쉰들러 리스트에서 매일 아침 먹기 전 유대인 한 명을 즉결처형하는게 일과이던 그 잔악한 나치가 여기선 연인을 떠나보내고 마약에 취해 자신을 지킬 힘조차 없는 병약한 꽃돌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비글로우 감독의 나쁜 남자 심미안은 대단합니다.
허트 로커(2009)/제레미 러너
다머(2002)에서 제레미 러너
타운(2010)에서 제레미 러너
허트로커(2009)에서 제레미 러너
어벤저스의 맏형이자 완다의 멘토, 호크아이 제레미 러너가 어딜 봐서 악당이냐 싶으시겠지만, 제레미 러너의 출세작은 연쇄살인범 제프리 다머를 다룬 영화 다머(2002) 였습니다. 물론 제레미가 다머였고요. 차기작 SWAT(2003)에서 제레미는 돈을 위해서라면 옛 동료들을 해치는 것조차 서슴치 않는 전직 부패경찰로 나왔죠.
허트 로커(2009)로 전세계 영화팬에 눈도장을 찍은 후에도 마찬가지, 차기작 타운(2010)에서 그는 벤 애플렉과 함께 강도단의 일원으로 나옵니다. 여기서도 그는 폭력적이고 무식한, 이른바 화이트 트래쉬를 연기합니다. 의리는 있지만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길가다가 실수로라도 절대 시비털리고 싶지 않은 그런 캐릭터죠.
어쨌든 비글로우 감독이 허트 로커로 제레미를 훌륭하게 갱생시킨(?) 결과, 차기작에서 마블 어벤져스의 호크아이로 낙점, 이후 헐리우드에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만약 제레미가 허트로커에 출연하지 않았다면, 호크아이 역에 간택되지도 않았을 테고 결과적으로 더 오랜 시간 악역 전문 배우를 했을지는... 며느리도 모를 일입니다.
제로 다크 서티(2012)/제이슨 클라크
제이슨 클라크에 대해 말하자면....딱 한 마디로, 어딜 봐서 이 아저씨가 우리 편이야? 싶은 그런 비주얼(...)의 소유자시죠.
이후 아니나다를까 터미네이터 제네시스(2015)에서 당당히 악역 T-3000역을 맡았습니다.
그래도 이 분은 혹성탈출 2편(2014)에서 선량한 주인공을 맡은 적도 있다보니, 앞으로도 주구장착 악역만 할 거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비글로우 감독의 나쁜 남자 선구안을 한 번 믿어보죠.
PS.
경우는 다르지만 K-19 위도우 메이커(2002)에서도 캐서린 비글로우의 캐스팅 비틀기는 여전합니다.
스타워즈의 영원한 쾌남아 한 솔로이자 가장 미국적인 페이스의 소유자 해리슨 포드를 덜컥 소련군 잠수함 함장으로 캐스팅한겁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소련 정부에 의해 낙하산으로 꽂힌 함장이라 선원들과 동고동락하던 선임이자 부함장인 리암 니슨보다도 부하들의 신임을 받지 못할 뿐더러, 낙하산이라는 자신의 처지 때문인지 초반엔 부하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맹목적으로 정부의 명령만을 따르는 쪼잔한 모습마저 보입니다. 물론 후반에는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긴하지만요. 이쯤되면 과연 비글로우 감독다운 캐스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해리슨 포드야말로 미국 영화상 최고의 Bad Ass중 한 명 아니겠습니까.
추천인 4
댓글 4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다시 생각해보니 가오갤 크리스 플랫도 특수부대원 중 한 명으로 나오더군요. 군복이 의외로 잘 어울려서 놀랬습니다.
클랜시 브라운의 하이랜더 괴연은 사람들이 너무 잘 몰라서 늘 안타깝습니다. 암튼...
비글로우 감독이 남배우들에게서 매력 이끌어내는 솜씨가 대단하네요
하이랜더에서 클랜시가 내뱉은 대사 "사라지느니 불타없어지는게 좋지!!!"는 커트 코베인이 유서에서 인용하기도 했었죠. 개인적으로도 정말 좋아하는 연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