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탉 (1990) 김인문의 열연. 스포일러 있음.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피로감이 국민들 사이에 퍼져나가던 시기, 무너져가는 가부장제에 대한 고찰을 최초로 다룬 영화가 수탉이다.
김인문으로서는 일생일대의 작품을 만났고, 그의 열연이 이 영화를 떠받친다.
영화는 코메디다. 하지만 내용은 신랄하게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김인문은 어느 중소도시 교외에서 양계장을 한다. 그는 딸 셋, 아내, 장모님에게 눌려 산다. 집안 여자들은 하나같이 드세다.
가부장제를 그린 영화, 가령 마부였다면, 가족들의 고난과 괴로움을 묵묵히 어깨에 얹고서 자기 길을 가며 가족들의 기둥이 되어주는
아버지를 그렸어야 했겠지. 하지만 이 영화 속 김인문은 거세된 수탉 같다.
밤에 아내가 와서 무엇무엇을 보채는데, 김인문은 서지 않는다(?).
"또야? 내가 닭 먹으랬지. 남들은 없어 못먹는 것을 닭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안 먹어? 서방이 아니라 웬수야, 웬수. 나가 죽어."
그러면서 달걀을 막 던지는 아내. 김인문은 구부정하게 서서 달걀을 맞는다.
그리고 김인문 집안의 풍경이 펼쳐진다. 큰 딸부터 어린 딸까지 드세기가 엄청나다. 아내는 경제권까지 틀어쥐고 김인문에게 명령을 한다.
그는 닭 키우고 닭을 가져다가 도매업자에게 넘기는 일 외에 아무 실권도 없다.
닭 납품하러 가서 같은 양계업자들과 수다 떠는 것이 김인문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그런데 양계업자들의 여신이 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직원 옥자다. 거세된 수탉처럼 기죽어 사는 김인문에게는 넘볼 수 없는 도도한 여자다.
옥자 역을 맡은 배우가 최유라다. 이 영화가 아마 최초 주요배역인 듯한데, 단번에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타고 스타가 되었다. 등장하자 마자
완성형 배우였다. 대배우 김인문과 맞짱떠서 팽팽한 대결을 한다.
동생처럼 지내는 김희라는 김인문에게 "형이 안 서는(?) 이유는 같은 여자만 만나서야. 저런 옥자같은 싱싱한 처녀와 그것 하면 금방 팔딱팔딱 살아날 텐데." 라고 한다. 굼뜬 김인문은 기죽어서 밥만 입에다가 퍼넣는다. (나중에 나오지만, 김희라는 다 속셈이 있어서 저런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닥쳐오는 무서운(?) 밤. 아내는 김인문에게 달려들고(?), 서지 않은(?) 김인문은 닭장으로 도망간다.
아침에 닭 남품하러 가서 또 혼자 술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건다.
"당신 참 팔자가 부럽군. 조개(?)에 푹 파묻혀 살다갈 팔자야." "흥, 내가 딸 셋에 아내 장모님 해서 이미 다섯이유. 다섯만 해도 감당 못 하겠어." "아냐, 그것보다 훨씬 더 많아. 당신 포주하면 돈 긁어 모으겠어." "(속으로) 뭐 날더러 포주를 하라구? 이 XX이."
술을 잔뜩 마신 김인문은 한밤중에 철조망에 기어올라가 닭울음을 낸다. "꽁지 빠진 수탉이 오늘은 한 잔 했다. 왜냐고 묻지 마라!"
그리고 너무 취해서 근처 여관에 가서 잔다. 그런데 하필이면 거기가 불건전(?)한 곳이라서 퇴폐서비스를 한다. 비몽사몽간에 김인문은
서비스를 하는 여자가 옥자라는 것을 본다. 도도하기만 하던 옥자가 능숙(?)하게 서비스(?)를 하는 것을 본 김인문은 자기가 현실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구분이 안 간다.
도도한 척 했지만 사실은 창녀로 뛰다가 막 그만둔 옥자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많다. 투잡 쓰리잡 뛴다. 옥자가 여장부 스타일에 이런거 꿋꿋이 견뎌내면 모르겠는데, 사실은 마음도 여리다. 김인문은 동병상련을 느낀다. 둘 다 루저들이다. 옥자는 투잡 뛰는 것이 들켜서 직장에서 쫓겨나고 다시 전직(?)으로 복귀한다. 김인문은 자기 때문에 옥자가 그렇게 된 것 같아 미안도 하고 옥자랑 동병상련이라 측은도 하고 그래서 옥자집을 찾아간다. 옥자가 김인문을 보고 반가와하거나 고맙게 여길 상황이 아니다. "늙으려면 곱게 늙어라"하는 말과 함께 쫓아 버린다.
굉장히 웃긴 장면이 나오는데, 옥자가 창녀로 일하는 사무소(?) 여사장이 전화를 받는데,
"뭐? 나를 지명해 오라고 했다구? 주제에 맛은 알아가지고......야! 이 나이에 내가 가리?" 그리고 옥자를 보낸다.
김인문은 파견나간(?) 옥자를 경찰에게서 구해준다. 그리고 둘은 바다로 간다.
한밤중에 바다에 도착하자 옥자는 모든것이 너무 갑갑하다고 옷을 훌훌 벗고 해변으로 달려나간다. 김인문은 놀라서 주위 눈치를 살피다가 결심한 듯 자기도 옷을 벗고 해변을 달려나간다.
그리고 둘은 함께 앉아 해변에 뜨는 해를 바라본다. 이때 김인문의 표정연기는 엄청나다. "나,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을 거야"
그러자 옥자도 자기 머리를 김인문의 어깨에 기댄다. 같은 심정이다. 여기서 김수철의 음악이 나오는데, 엄청 슬프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그리고 김인문은 집을 나와 옥자와 살림을 차린다. 김인문과 옥자는 달걀장수를 한다.
김인문은 몰라보게 외향적이고 활달하게 바뀌어서 능청도 부리고 농담도 잘하고 한다. 점쟁이 말대로 팔자가 그래서 그런지, 김인문은
주부들에게 엄청난 인기다. 달걀 사러 주부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돈이 굴러들어온다. 그는 수탉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이 영화에는 당시 운동권들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달걀차를 갖고 가는데, 학생운동하던 사람들이 "민주달걀이 왔다"하면서 남의 달걀들을 막 집어다가 전경들에게 던져댄다. 김인문이 아무리 욕하며 말려도 소용 없다. 결국 차안에 가득하던 달걀이 하나도 안 남는다. 학생들은 사화 한마디 없이 몰려가 버린다.
서지 않아서 (?) 아내에게 괄시 받던 김인문은 놀랄만큼 왕성해져서 그 방면(?)에 닳고 닳은 옥자를 넉다운시키는 괴력을 보여준다. 김인문은 남자로서 엄청난 자신감을 갖게 되고 그의 직업이나 모든것이 술술 풀려나간다. 그런데 아내에게 사는 곳을 들키고, 아내는 옥자를 후려갈긴 다음 김인문과 헤어지라고 다그친다. 옥자와 김인문은 어쩔 수 없이 헤어진다.
집에 돌아온 김인문은 다시 전으로 돌아간다. 서지도 않고(?) 무시 받는데다가 아내에게 통제 당하는 꽁지 빠진 수탉이다.
억지로 집에 돌아온 김인문을 살살 달래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딸 그리고 장모는 김인문을 투명인간 취급한다. 심지어는 밥도 안 줘서 김인문은 물로 배를 채운다. 그는 인생에 절망하고 자기 자신도 잃고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감금하고 양계장 속에서 파묻혀 산다.
그러다가 어느날 누군가 찾아온다. 옥자가 보낸 것인데, 과거 김인문이 모은 돈을 갖고 트럭을 한 대 사서 자동차판매하는 사람을 시켜 보낸 것이다.
그는 양계장으로 돌아가서 삽으로 수탉들을 때린다. 그리고 울부짖는다. "이게 사는 거냐? 이러고도 산다고 할 수 있냐?"
그리고 아내에게 가서 "우리 헤어져. 집이고 재산이고 뭐고 다 줄께. " 그리고 옥자가 사 준 트럭 열쇠를 내보이며 "난 ,이것만 있으면 돼"
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트럭을 몰고 신나서 달려나간다. "어디로 갈 것이냐?" 그는 잠시 중얼거리지만 "나도 이제 새 인생이다"하면서 환하게 웃고 달려나간다.
사실 김인문 혼자서 영화를 다 살린다고 할 정도로 그의 열연은 엄청나다. 이 영화는, 무너져가는 가부장제에 대해 그린 최초의 영화가 아닐까 하는데, 그것 외에도, 지방도시 부근의 가난한 사람들과 창녀들 그리고 장터 등을 리얼하게 그렸다. 리얼리즘영화로서도 수준 높다. 아마 옥자는 도시 바깥으로 바깥으로 몰려나간 위기의 계급을 상징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영화 내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고, 속은 또 엄청 여려서 엄청 불쌍하다. 민주화운동을 찬양하는 영화들이 다수 나오던 시기에, 이를 비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남성판 인형의 집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맞다. 김인문은 긴 배우생활에서 이 영화 한편을 남겼으나, 이 영화를 보는 후세사람들은 그가 대배우였다고 기억할 것이다.
추천인 8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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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선생님 중풍으로 고생하시기전에는 등촌동 군군수도통합병원 근처 구두수선소에 앉아서 구두 닦으시는 모습 자주 본 기억이 있네요.근데 검색해보니 돌아가셨네요.연기는 진짜 찐이셨던거 같은데.진짜 김인문선생님 연기하는 모습 다시 보고 싶네요.너털웃음의 달인이지 싶습니다.최불암선생님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셨던 분인데 중풍이 참 야속하네요.위대한 배우중 한분이셨는데 말이죠.이거 말고 kbs단막극 진실을찾아서 보셨나요?그 작품 좋습니다.
링크 걸어드릴께요.한번 보세요.
https://youtu.be/LHoZgeLtxHA
좋은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작품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