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하늘에도 슬픔이 (1965) - 1960년대 엄마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의 생존기. 강인한 생명력과 핏줄의 뜨거움. 걸작. 스포일러 있음.
1960년대는 다 못 살았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히 못살고 가난에 찌들어 생존하기 위해 투쟁하던 소년의 이야기다. 1960년대 못살던 사람들조차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냐고 불쌍해했던 소년의 생존기이다. 1960년대에는 이 영화가 눈물바다를 쏟게 만들던 영화였다. 다 못살았으니까 이윤복소년의 비극에 대해서 공감하기 쉬웠고 그래서 다들 함께 안타까워했다. 지금은? 이윤복소년의 가난에 대해 공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윤복소년의 생존본능과 가족에 대한 끈끈한 애착이라는 점에서 감상의 포인트가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무려 대가급 감독 김수용 감독과 대가급 각본가 신봉승 그리고 대가급 배우들 신영균, 조미령, 주증녀 등이 나온다. 하지만 이들이 최선의 연기를 펼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빛을 발하게 하는 사람들은 아역배우들이다. 60년 정도 지난 지금도 스크린을 찢고 아이들의 절절한 절규가 들려오게 만드는 정도 명연이다.
아버지는 장애인에 도박중독자이고,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에게 질려 집을 나갔다. 소년 이윤복은 누이동생 순나와 함께 더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산다. 아버지는 짐이나 안 되면 다행이다. 매일 아프다고 (어디가 아픈 지는 모른다) 앓는 소리를 아이들에게 해대며 동냥해오라고 아이들을 재촉한다. 아이들이 돈이라도 동냥해 오면 언제 아팠냐는 듯이 싱글벙글 도박장에 달려가 다 잃고 돌아온다. 아버지가 이 모양이니, 윤복은 (자기도 초등학생이면서) 껌을 팔러다니고 구걸하면서 동생들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윤복의 여동생 순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인데도 마치 자기가 엄마라는 듯이 동생들을 돌보려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생이 어디 가서 식모를 할까 어디 가서 껌을 팔까 혹은 구걸을 할까 머릿속에 그 생각뿐이다. 밑의 동생 둘은 아직 철이 없어서 먹을 것 재촉하며 윤복과 순나의 마음을 찢어지게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껌을 들고 다니며 거리에서 팔고 동냥을 다니며 동생들을 먹인다. "식모살이하면서 돈을 벌면 지금보다야 낫게 살지 않겠나"하는 말이 초등학교 저학년 입에서 나온다. 아버지는 이런 윤복과 순나를 돕기는 커녕, 밑의 동생 둘과 함께 투정을 하며 윤복과 순나의 어깨에 짐을 더한다.
실제 윤복의 일기에 바탕을 두고 만든 영화이기에 현실성이 매우 강하다. 1960년대 대구의 모습이 보이는데,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없는 산에 닭장만도 못한 집들, 사막같은 가난한 공간 속을 좀비처럼 배회하는 사람들 - 매우 인상적이다. 사막에 여기저기 흙집들이 있는 수준이다. 윤복과 순나가 동생들을 데리고 함께 생존해 가기에는 너무나 처절하다.
윤복은 아버지와 동생들과 함께 흙담집에 사는데, 이 흙담집은 벽 하나가 허물어져서 속이 다 훤히 들여다보인다. 윤복은 아침, 점심, 저녁을 밖에 나가 동냥해다가 동생들을 (그리고 아버지를) 먹인다. 그 중간에 하는 일은 껌을 들고 다방, 댄스홀, 길거리를 다니며 파는 것이다. 그러다가 붙잡혀서 닭장차에 실려 고아원으로 끌려가기도 한다. 고아원에서는 차라리 먹을 것 제대로 먹고 새옷을 입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동생들 때문에 그러지도 못한다. 윤복의 눈에 비치는 것은, 댄스홀에서 즐기는 부유한 남녀들과 자기에게 차가운 사람들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이 영화가 그렇게 감동을 주지도 걸작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것들을 뚫고 윤복의 처절한 생존본능과 몸부림이 스크린 바깥으로 뛰쳐나온다. 어린 윤복은 마치 인류를 대변하는 거대한 존재같다. 이 가난만으로 부족하다는 듯이, 윤복에게 시련들이 닥친다. 깡패들에게 납치가 되어 앵벌이가 될 뻔하기도 하고, 돈을 뜯기고, 고아원에 끌려가고, 간신히 마련한 구두닦이통을 빼앗긴다. 하지만 윤복은 생존에 회의를 품지도 전락하지도 않는다. 윤복이 그 가난에도 불구하고 전락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정신력이 끈질기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영혼까지 전락하여 인생에 패배하도록 만들지 않는 처절한 생존본능과 정신력이 윤복을 지탱한다. 이것이 아주 감동적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순나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아주 강하다. 이 가난한 가족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이 윤복의 정신력과 순나의 모성애다. 못난 아버지와 무책임하게 집을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서, 윤복과 순나는 가족들에게 사랑을 준다. 심지어 학교를 가기에도 어린 윤복의 동생들조차 그 어린 영혼 밑바닥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생에 대한 강한 긍정을 보여준다. 여섯 일곱살짜리 투정만 부리던 누이동생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오빠를 위해서 길거리에 나가 구걸을 해서 푼돈을 벌어온다.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이 가난과 비참의 밑바닥에 떨어진 아이들을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학교도 못들어가고 여섯 일곱살밖에 안 된 여자아이가 이미 철이 다 들었다.
그러니, 이 영화를 두고, 가난한 아이들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눈물을 짜내는 영화라고 해선 안될 것 같다. 이 아이들은 대부분의 관객들보다 더 거대하다. 어린 아이들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의지력 그리고 생존본능은 정말 처절하고 간절해서 관객들은 이 아이들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한다.
이 영화는 어느 사실주의영화 그리고 사회고발영화보다도 더 비참하고 가난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 영화를 사실주의영화로 보기 어려운 것은, 그 사실적인 표현에 감상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윤복과 그 가족들의 비극을 간절하게 살려내기 위한 도구로써 사실적인 표현이 이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신파조 영화가 아니다. 대가 김수용감독의 작품이 그리고 우리나라 영화사 황금기인 1960년대 작품이 그럴 리 있겠는가? 영화는 김수용 감독 고유 스타일이 살아 있는 걸작이다. 화면은 투명하고 수채화적이다. 표현은 아주 간결하고 서정적이다. 등장인물들의 연기는 세련되고 정확하고 깔끔하다. 구성면에서 허술하다거나 없었으면 하거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것이 없다. 등장인물들의 개성은 명확하게 살려낸다. 김수용 감독 특유의 개성이다. 갯마을, 산불, 안개 등을 연상시키는 걸작이다. 이 영화를 보고 생각난 것은,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걸작 로코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강대진 감독의 걸작 마부였다. 그 정도 걸작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거기 가까이 근접하기는 할 정도다.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던 영화였는데, 대만에서 극적으로 발견된 영화라고 한다. 이런 걸작이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사라졌더라면 얼마나 비극이었을까?
** 윤복의 일기는 지금도 출판되어 나오고 있다. 윤복의 동생이 형을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직도 출판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보여진 형제들의 간절하고 강렬한 우애 - 그것은 진실이었다. 무려 57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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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감사합니다!
제목만 들어도 슬픈 영화들... <엄마 없는 하늘 아래 (1977)>, <혼자 도는 바람개비 (1991)> 같은 영화들도 있었지요.. ㅠㅜ
개인적으로 저하늘에도 슬픔이를 이희재 화백의 만화로 접했습니다.
이런 책이 있었군요. 만화의 세계도 참 넓고 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