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고사 매뉴스크립트 (1965) 걸작. 스포일러 있음.
사라고사 원고는 단연 걸작이다. 이런 영화 다른 데서 본 적 없다.
이 영화에는 기 승 전 결 없다. 액자식 구성이다.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 다른 사람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또 그 주인공이 한 이야기 속 주인공이 다른 사람에게 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이런 식이다.
나중에 가면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인지 혼란이 온다.
물론 난센스 영화는 아니다. 액자식 구성 속에 또다른 액자식 구성이 들어가고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결과는 환상과 혼란, 끝없이 흘러가는 것 같은 네버엔딩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는 어느 시간과 장소에 속하는지 누구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이야기인지 아리송해진다.
시간과 장소가 모호한 허공에 붕 뜬 이야기들 - 이것이 몇 겹씩 들어가고 들어가니 그 효과는 대단하다.
구성에 더하여, 내용 (이야기) 자체도 세상에서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해괴하고 환상적이다.
첫 액자는 아주 인상적으로 시작한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해서 전투가 벌어진다. 프랑스군 장교가 포화를 피해 어떤 집으로 숨어들어온다.
테이블에 놓인 먹을 것을 하겁지겁 먹는데, 웬 책이 하나 펼쳐져 있다. 호기심에 보는데, 이 책이 세상에 기이한 것이다.
뭐라 잔뜩 써있는데 스페인어라 읽을 수는 없고, 그림만 본다. 밧줄에 매달려 덜렁거리는 시체들, 옷 벗은 여자들 등.
그때 스페인군들이 집에 들어온다. 프랑스군 장교가 거기 있는 것 아닌가? 체포하려는데 프랑스군 장교는 놀라기는 커녕
"친구. 이 책 다 읽을 때까지만 기다려주게." 스페인군 장교는 놀란다. 도대체 뭐가 적혀 있길래?
둘이 머리를 맞대고 책을 읽는다. 프랑스군 장교가 스페인어를 몰라 책을 못 읽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자, 스페인군 장교는
자기가 읽어주겠다고 한다. 책은 알폰소라는 스페인군 장교가 스페인 황야를 혼자 지나면서 겪은 경험을 자기가 적은 것이다.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세상에 기이한 경험을 했다. 스페인군 장교는 놀란다. "알폰소라면 우리 할아버지 아냐?"
그리고 영화 본편이 시작된다. 알폰소가 황야를 혼자 건너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영화 자체는 액자 속에 있다.
이런 영화 본 적 없다.
시종 둘을 거느리고 황야를 건너가던 알폰소는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멀리 돌아가자는 시종들이 이해가 안간다.
시종들 왈, 그 길은 저주 받은 길이라 귀신을 만난다고 한다. 시종들에게 호통을 치고 알폰소는
혼자 그 길로 간다. 알폰소는 호탕한 스타일에 복잡하게 생각 않는다. 귀신이 막상 나와도 껄 껄 웃으면서 말을 걸 타입이다.
그런데 귀신은 안 나오고 그냥 황야에 길이 펼쳐진다. 그러다가 오두막이 나온다.
그리고 그 앞에는 교수대에 덜렁덜렁 매달린 시체 두구가 있다. 그리고 거대한 독수리.
알폰소는 오두막에 들어가 쉰다. 그러자 방 안 뒷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헉! 가슴을 드러낸 인도 여인이다.
인도 여인이 왜 이런 스페인 황야 오두막집에 있는가? 인도여인은 자기 주인인 공주 둘이 지하실에서 알폰소를 기다린다고 한다.
인도여인만도 놀라운데 공주 둘이 오두막집 지하실에 있다니?
무섭다고 도망칠 알폰소가 아니다. 그는 호탕하고 당당하게 지하실로 따라간다.
떡하니 차려진 음식에 공주 둘이 있다. 자기들은 레즈비안인데 한 남자에게 결혼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남자가 알폰소라는 것이다. 무언가 이상하다. 그래도 이런 청혼을 물리칠 알폰소가 아니다.
그는 호탕하게 둘과 결혼을 한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알폰소는 오두막에서 혼자 해골을 쓰다듬으며 잠을 자고 있다.
알폰소는 황야를 마침내 빠져나와서 어느 마을로 간다. 신부가 환대를 해준다. 신부는 마치 살살 꾀듯이
방금 지나온 길에서 신비한 일을 경험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알폰소는 절대 인도공주와의 일을 발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알폰소를 악마에게 빙의된 사람으로 몰아 처형하려 한다.
그런데 두 남자가 달려와서 알폰소를 구해준다. 바로 오두막집 앞에 매달려 덜렁덜렁거리던 남자들이다.
알폰소가 당신들 죽지 않았냐고 묻자 "우리는 산적인데, 정부에서 우리들 명성을 죽이고자 일부러 비슷한 사람을 골라 거짓처형한
것이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 산적들은 인도 공주 오빠들이었다.
그들은 공주 처소인 지하실로 돌아가서 공주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한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알폰소는 오두막에서 혼자 해골을 쓰다듬으며 잠을 자고 있다.
뭐 영화 전체가 이런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보면 된다.
액자 속 액자 속 액자 이런 식으로 영화가 흘러가기 때문에 굉장히 기묘한 느낌을 준다.
호러영화도 나오고 코메디도 나오고 시대물도 나오고 쟝르가 막 전환된다. 그런데 감독이 거장인지 이런 전환이 굉장히
스무스하게 되어 있으며 어느 쟝르가 되든 안정적으로 효과적으로 감독한다. 뭐 몇십분만에 호러영화가 됐다가 환상물이 됐다가
시대물이 된다. 한 영화 안에 쟝르 두개 정도가 있다 하는 정도는 이 영화에 아예 비교가 안된다.
걸작영화이고, 따라가면서 보기도 힘든데, 만든 사람이 있다니 놀랍다.
단, 이 영화는 이런 환상적이고 효과적인 구조를 가지고 사회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탐구를 하지는 않았다.
아주 재미있고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가지고 환상적인 대성당을 구축해 놓은 것이 이 영화다.
너무나 아름답다.
추천인 2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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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네요.
전 같은 감독의 《모래시계 요양원》을 보았는데 기억에 남네요
폴란드 영화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독특한 느낌이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