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트] 간략후기
익무의 은혜에 힘입어 이정재 배우의 감독 데뷔작 <헌트>를 최초 일반 시사회로 개봉 전 미리 보았습니다.
일반 관객에게 처음 영화가 공개되는 자리였던데다가 빼어난 금슬을 자랑하는 이정재-정우성 배우의 GV가 함께 해 더욱 뜻깊었네요.
사실 30년 간 연기 생활을 해 온 베테랑 배우의 첫 장편 연출 데뷔작이라는 점 외에는, 제목이나 스토리 라인 등
여러 부분에서 시선을 잡아챌 만한 신선함은 느껴지지 않았던 게 사실인데 결과물은 상당히 놀라웠습니다.
이정재 감독이 말 그대로 '이를 갈고' 만든 듯한 영화에는 만만치 않은 두께의 현대사를 장르적으로 관통하는 뚝심과,
배우로서 직접 느낄 액션의 뜨거운 현장감을 관객들도 고스란히 느끼게 하려는 집요함이 담겨 있습니다.
1980년대 대한민국, 해외 순방 중인 대통령을 타겟으로 한 테러 위협이 끊이질 않아 안기부는 초긴장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던 중 망명을 신청한 북한 고위 관리를 통해 북에서 보낸 스파이가 안기부 내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박평호(이정재)를 위시한 국내팀과 김정도(정우성)을 위시한 해외팀은 스파이 '동림'을 색출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합니다.
암약 중인 스파이로 인해 일급 기밀 사항들이 유출되면서 안기부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스파이 색출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는 가운데
과거의 악연으로 얽힌 박평호와 김정도는 서로를 용의선상에 올려두고 뒤를 캐기 시작합니다.
스파이를 찾아내지 않으면 스파이로 지목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스파이일까요. 아니 누가 스파이가 되어야 할까요.
영화는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한 두 남자의 불꽃 튀는 대결 위에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겹치며 선굵은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이름처럼 남성적인 영화들을 많이 만들어 온 제작사 '사나이픽쳐스'의 작품이고, 이 영화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신세계>의
주연을 맡기도 했던 이정재 배우가 주연과 연출을 겸했고, 조직 내에 숨어든 스파이를 색출하는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보기 전 외형적으로는 꽤 기시감이 들었습니다만, <헌트>는 그 예상을 힘차게 뛰어넘으며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영화는 1980년대 초라는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 위에서 예상보다 훨씬 풍성하고 다채로운 층위의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한국 현대사에 기록될 수많은 이들이 단 몇 년 사이에 일어난 격동의 1980년대를 영화는 꽤나 직접적으로 다루는데,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한다고는 하지만 관객들은 어떤 인물과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는지 대부분 짐작이 가능할 겁니다.
때문에 영화 속에서 박평호와 김정도 두 남자가 거쳐 가는 일련의 사건들이 그저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사건이 아님을 잘 알고,
그런 만큼 두 남자가 맞닥뜨리는 상황과 그들의 행보는 극적 재미와 스릴 이상의 함의로 묵직하게 돌진해 옵니다.
두 남자를 통해 엿보이는 시대의 단상은 권력욕이 깃든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개인의 신념이 희생되고 이용당했던 시대입니다.
안기부에서 해외팀과 국내팀의 핵심 역할을 맡고 있는 박평호와 김정도는 언뜻 자신들의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움직이는 듯 하지만,
두 사람이 스파이 색출 작전에 뛰어들기까지의 조직적 환경과 서로를 스파이로 의심할 만큼 응어리진 감정으로 얽히기까지의 과정은
그 모든 행보가 오롯이 자신들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님을, 떠밀리고 내몰린 끝에 일어나는 어떤 필사적인 몸부림임을 깨달아 갑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는 이러한 첩보 스릴러물에 한번씩 등장하기 마련인 이른바 '후까시'의 낭만조차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거에 빠져 있을 시간에 총질 한 번 더 하겠다는 듯, 영화의 액션 장면들은 힘과 사실감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총격전은 웬만한 할리우드 영화 부럽지 않도록 감각이 얼얼해지는 사운드로 채워져 있고,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에서도 두 주인공 배우들을 비롯해 몸을 사리지 않는 육탄 액션을 구사하는 모습으로 아찔함을 안깁니다.
멋지다기보다 처절해 보이는 그 액션 장면들은 장르적으로 훌륭한 동시에, 그토록 처절한 결전의 배후에 있는
권력의 탐욕과 이념 대결의 무상함을 함께 떠올리게 하며 장르 영화의 쾌감 이상의 감흥을 자아냅니다.
두 남자가 핵심 주인공이지만 거쳐 가는 사건이 많고 그에 따라 등퇴장하는 등장 인물들 또한 상당히 많은데,
이처럼 솟구치는 에너지를 동반하여 굴곡진 서사를 전개하다 보니 당장 지나갈 때는 미처 눈치를 못 채다가
돌아보면 세세하게 짚지 못해 여기저기 허점이 느껴지는 부분도 없진 않습니다.
그러나 섣불리 감정을 소모하며 리듬을 늘어뜨리지 않고 인물들의 투철한 신념을 동력삼아 마지막까지 질주하는
연출의 흡인력에 적어도 한 눈 팔 틈은 없다는 점은 영화가 지닌 예사롭지 않은 대중적, 장르적 에너지를 실감케 합니다.
이런 가운데 그야말로 '용호상박'으로 맞부딪치는 이정재, 정우성 배우의 힘은 재회하기까지 걸린 23년이 시간을 무색케 합니다.
누구도 섣불리 의심할 수 없게끔 팽팽하게 대립하는 명분과 신념을 지닌, 그래서 단순한 적수라고 규정하기에는
훨씬 복합적인 감정으로 얽혀 있는 두 사람의 관계성은 이 두 배우가 이들을 연기해야 하는 당위성을 입증합니다.
단지 그들이 한 작품에서 20여년 만에 다시 만난 것에만 의미를 두지 않는, 흐른 세월만큼 더 깊고 다층적인 감정으로
더 다채롭게 바라보게 되는 관계를 그려내는 두 베테랑 배우의 내공을 만나는 기회로서 무척 귀한 시간을 선사합니다.
얼음과 불같은 상반된 캐릭터로 박평호와 김정도를 보필하는 방주경 역의 전혜진, 장철성 역의 허성태 배우도 노련한 연기를 보여주며
작전에 휘말리는 대학생 조유정 역의 고윤정 배우는 [스위트홈] 등 전작보다 진일보한 연기로 극에 또 다른 색깔을 더합니다.
더불어 <1987>에선 그렇게 사람을 울리더니 이번엔 그와 상극인 안기부 부장을 서슬퍼렇게 연기한 김종수 배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연기 경력으로 일가를 이룬 배우들이 감독으로 데뷔하는 사례가 꾸준히, 그리고 꽤 성공적으로 나오고 있는 가운데
이정재 배우가 감독이라는 타이틀로 처음 내놓은 <헌트> 또한 성공적인 배우 출신 감독의 데뷔작으로 남을 만합니다.
'배우 출신 감독'이라는 전제를 떼고 보아도 시대상을 관통하고 인물들을 격돌시키며 장르적으로나 메시지적으로 주저함이 없는,
첩보 액션물로서의 활력와 시대극으로서의 성찰을 모두 추구하는 야심과 성과는 역작으로 보아도 손색 없을 것입니다.
서로를 의심하되 자기 신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고 질주하는 영화 속 두 주인공들처럼,
명확한 지향점과 주제의식을 품고 질주하는 영화의 에너지에 믿고 몸을 맡길 만합니다.
익무 덕에 좋은 영화 잘 보았습니다.
아래는 GV 현장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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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전혜진 배우님 연기 넘 좋았어요ㅠㅠㅠ 개봉하면 2회차 무조건 갑니돠,,😭
놀라운 데뷔작.. 흥행도 좋은 성과 내길바랍니다.
주변에 알리고싶은데 기간이 좀 많이 남았네요 ㅎㅎ ;;
개봉하면 3회차 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