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CAV][배드 럭 뱅잉] 섹스, 위선 그리고 동영상
언젠가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라는 제목만으로 모두들 19금 영화일 거라고 기대했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영화를 감상해 보니 생각했던 19금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실망을 안겨준 건 이 작품만이 아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지치고 스트레스 받던 어느 날,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개봉했던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폴 버호벤 감독의 <원초적 본능>과 <베네데타>는 뛰어난 작품임에도, 노출 장면에 초점이 맞춰지고 부각되어서 아쉬운 작품입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이라지만, 영화 속에서의 노출 신에 대한 시선은 아직도 보수적입니다.
오히려 폭력적인 장면들이 노출 장면보다 심의에서 좀 더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논란과 화제의 그 영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작품을 선 감상했던 관객들이 국내에서는 절대 개봉 못할 것 같다고 했던 그 작품 <배드 럭 뱅잉>이 CGV에서 어른들을 위한 시네마 바캉스로 무삭제판을 개봉했습니다. 극장 정식 개봉판은 감독이 편집한 편집본으로 개봉된다고 하니, 두 버전을 함께 비교해 봐도 좋겠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말아요.
멍청한 의견일 테니까.
맞아요, 멍청할수록 더 중요하다고 하니까요.
배드 럭 뱅잉
영화는 처음부터 충격적인 영상으로 시작합니다.
영화를 보고 몸이 잠시 굳어버렸고, 혼자 보아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전문적인 영상이라기엔 아마추어적이고, 생활이 묻어나는 두 남녀의 행위가 지나간 뒤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역할 플레이를 하는 듯한 자극적인 영상 속에는 아마도 옆방에서 있는 나이 든 여인이 아이를 재우라고 말합니다.
이 상황을 통해서, 일반 가정에서 두 부부가 함께 섹스하고 있는 장면을 촬영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일상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인 생리적 욕구에 해당하는 성욕.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자,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임에도 우리는 늘 드러내는 걸 두려워합니다.
친한 사이에서도 섹스나 성적인 주제는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이야기하기 힘든지 생각해 보면, 너무 사적인 행위여서 혹은 어떤 낙인이 찍힐까 봐 조심스럽습니다.
사회적, 윤리적 시선과 자라온 환경 속에서 주변 상황들을 생각해 보면, 대놓고 이야기하는 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몰래, 은밀하게 애정표현을 해오셨던 부모님 세대를 보고 자랐었습니다.
사고가 정지되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감독의 의도조차 파악할 수 없었지만 총 3부로 구성된 이 영화를 다 감상하고 나니 생각이 달라집니다.
1부 일방통행
한 평범한 여인이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거닐고 있습니다.
종종 통화를 하면서, 어디론가 향하는 에미. 전화 통화로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직업이 교사라는 것과 현재 몹시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점입니다. 남편과 함께 촬영했던 은밀하고 가장 사적인 영역인 섹스 동영상이 그만 여기저기로 퍼지게 된 것입니다. 컴퓨터 수리를 맡겼다가, 포르노 사이트로 유출된 영상은 금세 풀려버립니다. 그 영상을 학생들이 보게 되자, 학부모들과 동료 교사들은 그녀를 학부모 회의로 불러냅니다.
1부는 에미가 학부모 회의로 가기까지 부쿠레슈티를 지나가는 모습을 관찰자 시점으로 보여줍니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엄격했던 시기의 상황을 담은 이 영화는, 코로나가 재유행하던 시기 힘겹게 촬영되었다고 합니다. 통제된 상황 속에서 간신히 촬영되었음에도 감독의 상상력을 마르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평범한 거리를 거니는 모습이지만, 에미를 향한 주변 상황들은 차츰 변해갑니다.
조용히 거리를 거닐던 에미를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선과 상황들은 점차 노골적으로 바뀝니다.
핸드폰과 에미를 번갈아보다가 욕망이 담긴 말과 행동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유유히 지나가는 길 속에서 보게 되는 풍경들도 어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대놓고 무언가를 상징하는 듯한 아이스크림 모형이라던가, 마네킹의 모습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올 법한 누드상 등, 일상 속에 얼마나 노출이 많이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불편한 폭력적인 상황들에 노출되는 모습도 그려냅니다.
2부 일화, 기호, 경이에 관한 소사전
자연스러운 듯, 자연스럽지 않은 장면들을 보여주던 영화는 갑자기 다큐멘터리로 흘러갑니다.
현재 루마니아를 설명해 주는 과거의 복잡한 정치, 역사적 상황들을 여러 가지 그림들과 기록 영상들로 보여줍니다.
1부와 함께 2부 역시 충격이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다 따라잡기엔 뇌 속 과부하가 생길 것 같아서 의식의 흐름처럼 감상했습니다. 인간의 혐오와 편견은 어디서부터 오는가에 대해서 나열한 영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란 과거로부터 얻는 교훈이 없는 종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가 개인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던 시대적 상황과 정교회를 바탕으로 하기에, 여성을 이중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생긴 것입니다. 겉으로는 수동적이고 정숙함을 요구하기에, 능동적이면 직업적으로 매춘을 하는 여성이라는 플레임을 씌우는 이중적인 시선 말입니다. 코로나19로 거리 두기가 엄중해진 상황과 맞물려 개인의 자유는 생존권에 밀려서 어느 때보다도 위축되고 있습니다.
영화정보 전문 사이트인 IMDB에 따르면 474개의 키워드의 이야기들이 정말 다양하게 스쳐 지나갑니다.
루마니아를 대표하는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 독재자 차우셰스쿠, 루마니아 상황을 다룬 우라사와 나오키의 마스터 키튼 12권
1989년 루마니아 자유 민주 혁명 - 분노한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이 주도하던 혁명이었습니다.
루마니아 하면 떠오르는 게 뭐가 있는가.
루마니아는 동유럽 국가이지만, 남유럽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국가입니다.
슬라브족보다는 라틴족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국가기도 합니다.
우선 체조 올림픽 사상 10점 만점을 기록했던 나디아 코마네치가 생각나고, 냉전 시기 자유를 위해서 서방국가로 떠난 다른 동유럽 국가의 선수들과 달리, 그녀는 독재 정권 속에서 생존을 위해서 조국을 떠났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의 유명한 만화 <마스터 키튼>에서 보았던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와 함께 붙어 다니는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이 대표적으로 떠오릅니다. 대책 없는 인구증가 정책으로 루마니아는 많은 부작용을 얻게 되었습니다. 낙태와 피임 금지로 인한 성병의 증가, 가임 여성에게 4명 이상의 아이를 출산하도록 한 정책은 국민들을 기아로 몰아갔습니다. 힘겨운 경제 상황 속에서 키우기 어려운 아이들은 고아원에 버려졌고, 가축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은 아이들은 2만 명가량 굶주려 죽었습니다. 무사히 자란 아이들은 독재국가의 비밀경찰로 자라거나, 일자리가 없어 부랑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결국 이들의 분노는 독재자에게 향했고, 민주화로 가는 과정에서 독재자를 총살하는 유혈사태를 겪은 국가이기도 합니다. 세계 대전 당시에는 나치에 협력해서 유대인과 집시들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루마니아의 근현대사를 마치 파노라마처럼 보는 기분이 들었던 영상 속에서 우리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막장드라마 같은 다른 나라의 역사와 과거 속에서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봅니다.
낙태가 다시 위법이 되는 판결을 받는 시대를 역행하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인간은 왜 역사를 반복하는가.
3부 실천과 빈정거림
1부에서 학부모 회의로 소환되어, 학교로 가던 에미의 상황을 관찰자 시점으로 찬찬히 보여줍니다.
3부는 좀 더 본격적입니다. 예의를 차리려 했던 학부모 회의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밑바닥에 깔려있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사생활에 대한 예의 따윈 이미 사라집니다. 영상을 접한 학생들이 자식인 부모들은 창녀 같은 교사밑에서 교육받을 수 없다고 대놓고 에미를 모욕합니다. 심지어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외도하면서 찍은 영상이 아니냐며 진실을 매도하기도 합니다.
동영상이 노출되기 전까지는 역사를 가르치는 우수 교사였던 에미의 삶은 하루아침에 뒤집힙니다.
남편과 동의하에 찍은 영상임에도, 그 영상이 노출되어 학부모들 앞에서 재상영됩니다.
끝까지 봐야 한다며, 바나나를 먹으며 그 장면을 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특정 성행위에 대해서 비난하면서, 교사의 자질을 바로 끌어내리기도 합니다.
교사들, 운전 기사들, 장교들, 편집장들, 성직자들, 기업인들, 중년 남성들 사이에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는 사회적 편견과 혐오들을 아무 말 대잔치로 논리 없이 그냥 내뱉는 모습은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입니다.
SNS 상에서 가장 많이 벌어지는 마녀사냥과 유사한 모습입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적절한 사실이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에 기반한 것이 아닌, 원색적인 비난과 선동, 개인 신상을 털어가는 감정적 상황에 집중합니다. 개인 정보와 사생활 보호에 대한 존중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고, 알아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너무나 익숙한 관종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에미는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여서, 교사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감독이 이에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3가지 결론을 제시합니다.
관객인 여러분은 어떤 결론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도 감독님이 GV를 한다면, 어떤 결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지에 대해 충분히 관객들과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정성일 평론가님의 강의가 절실하게 필요한 작품이 아닐까요.
단순히 자극적이고 외설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 작품입니다.
그 한 가지로 만 이 영화를 판단한다면, 몹시 좁은 시야로 작품의 일부분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왜 이런 상황인가 과거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을 보여준 뒤 관객에게 결론을 제시하는 감독의 스토리텔링이 독특하고 기발하게 다가온 작품입니다.
머릿속이 순간 하얗게 변하면서, 뇌의 과부하 과정을 겪게 된 후 3가지 방향으로 제시하는 결말 중 어느 것이 가장 짜릿했냐고 물어본다면, 영화를 감상한 대다수의 분들 생각한 그 결론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꾸준히 소개되고 있는 라두 주데 감독님의 작품은 <배드 럭 뱅잉>으로 처음 접해봅니다.
제71회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이번 작품을 비롯해서 <아페림!>,<상처입은 마음>,<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가도 상관하지 않는다>등 꾸준히 다큐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역사와 정치적 사건들을 다룬 그의 작품들이 궁금해집니다. 그의 전작들을 봤다면, 루마니아의 피로 얼룩진 정치 역사적 근현대사에 대해서 미리 알고 본다면 감상이 한결 수월할 것 같습니다.
쥬쥬짱
추천인 19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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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가 참 끔찍한 과거를 갖고 있었더라고요.
그와는 별개로 흥미진진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별 관심이 없었거든요. 체조랑 나디아 코마네치 외에는 떠오르는 국가가 아니어서...
근데, 역사적으로 아주 암울한 과거를 가지고 있더라구요.
아직도 경제가 이후로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다고 하니까 안타깝죠.
잘읽었습니다 👍 👍 👍
마스터키튼 거의 외우다시피 봐서 일부는 이해하면서 2 3부를 봤어요
후기쓰면 마스터키튼 언급해야지 했는데 ㅋㅋ
루마니아인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블랙코메디인데다 1부 강렬한 초반 이후부터 2부까지는 다큐형식이라 우리가 다 이해하는거 자체가 무리인 영화죠 3부가 그나마 사이다급😅
좋은 후기 잘 읽었습니다
근데, 정말 이탈리아인 줄 알았어요. 처음엔.
제가 딱히 루마니아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닌데, 체조를 좋아해서...
나디아 코마네치도 알고, 루마니아도 체조 강국이라 그거로만 알고 있다가,
마스터키튼보고 차우셰스쿠라는 무능하면서 악날한 독재자를 알게 되었었네요.
놀라운 건 차라리 독재자 시절이 그립다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최근 루마니아에 동성애 결혼에 대해서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가 국민의 반대가 있어서 끝났다는 걸 알았어요.
인간은 정말 역사 속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병크짓을 반복하는 어리석은 종족입니다.
3부 장교복 입고 헛소리하던 캐릭이 그 예로 보였어요
그런 의도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네요.
태블릿 영상을 마지막까지 봐야지 할 때, 당사자 본인에게는 참 굴욕적인 상황이었는데,
에미가 기죽지 않고, 떳떳하게 대응하면서 할말 다하는 모습이 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라면 주눅들어서 아무것도 못 했을 꺼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