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멘' 간단 리뷰
1. 한국인은 녹즙을 좋아한다. 부모님 세대부터 녹즙을 즐겨마셨고 지금도 어느 부모님은 가족의 건강을 위해 온갖 녹색 채소를 갈아서 즙을 낸다. "건강을 위해 녹색 채소를 자주 먹어야 한다"는 조언을 실제로 영양학자나 의사가 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어느 영향력있고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가 그런 이야기를 했을 것 같다. 그 믿음의 근원은 '녹색'이라는 색깔 때문이었으리라. 한국인에게 '녹색'은 자연을 상징하는 '건강한' 색깔이다. 그런데 서양인에게 녹색은 전혀 다른 색으로 인식되고 있다. 서양의 애니메이션이나 어린이 영화를 보면 마녀가 만드는 독약이나 괴상한 물질의 색깔은 녹색이다. 피터 잭슨의 '고무인간의 최후'에서 외계인의 의식을 행하는 물질도 녹색(정확히는 민트색)이고 감마선에 노출된 헐크도 녹색이다(이 경우에는 돌연변이를 상징하는 색깔). 서양인들의 인식을 정확하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이들이 만든 콘텐츠에 등장하는 녹색은 위험하고 불길한 색이다.
2. 알렉스 가란드의 영화를 세 편 보면서 인식하지 못한 사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색은 녹색이다. 장편 데뷔작 '엑스 마키나'에서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의 집이자 모든 이야기가 시장되는 장소는 녹색의 숲 속에 있다. '서던 리치: 소멸의 땅'에서 한 번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쉬머 역시 숲 속에 있다. 그리고 '멘'에서 하퍼(제시 버클리)가 미지의 존재와 마주한 곳 역시 숲이다. 이 중 '멘'은 특히 숲을 찍으면서 녹색의 컬러감을 강조했다. 유난히 쨍한 녹색으로 둘러쌓인 장소에서 하퍼의 불안은 처음 시작된다(더 정확히는 잠재된 불안이 발현되는 곳이다). '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악과와 아담, 이브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성경을 먼저 꺼내야 한다. 명백하게 성경을 중심으로 해석하고 거기에 별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더해야 하지만(성경에 별자리 이야기가 나오진 않을 것 같다), 본 필자는 성경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자신이 없다(성경을 전혀 모른다). 그래서 알렉스 가란드의 영화를 관통하는 색인 '녹색'에 대해 물고 늘어져 볼 생각이다.
3.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양영화에서 녹색을 불길하고 위험한 색으로 묘사한 경우는 아주 많다. 그 중에서 알렉스 가란드의 영화 속 녹색은 좀 더 특별하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에서 녹색의 실체가 위협을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녹색이 불길했던 다른 영화들에서 녹색은 독약이나 유독성 화학물질, 혹은 헐크를 표현했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주인공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대상이다. 반면 '엑스 마키나'에서 녹색은 집을 둘러싼 배경에 불과했고 '서던 리치'에서 녹색은 쉬머의 공간에 불과했다. '서던 리치'의 경우 녹색이 위협이 됐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이 영화에서도 녹색은 배경이었고 위협이 된 실체는 곰팡이나 배양된 세균같은 색을 띄고 있다. 온전한 '녹색'으로 등장한 건 나무, 풀과 같은 배경뿐이다. '멘'에서도 쨍한 녹색은 인물이 머무는 배경에 불과하다. 얼굴에 녹색을 뒤집어 쓴 미지의 실체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그는 더 이상 하퍼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4. 알렉스 가란드의 영화에서는 녹색을 강조하기 위해 그것과 대비되는 색도 등장한다. 네이든의 집에서는 녹색을 찾기 어렵고 케인(나탈리 포트만)과 그 일행들이 입은 옷은 흙 색깔에 가깝다. 하퍼가 머무는 집 역시 나중에는 붉은 빛이 돌고 있으며 하퍼가 머물렀던 런던은 녹색을 찾기 힘든 도시다. 알렉스 가란드의 영화에서 녹색이 직접 불안을 조장하는 경우는 없다. 그저 인물들이 불안을 느끼고 그것이 관객에게 전이되도록 하는 공간이 녹색일 뿐이다. 녹색은 불길하고 위험한 색깔이라는 인식은 변함이 없지만, 실체적 위험에서 녹색은 오히려 배제된다. 이는 마치 "알렉스 가란드는 녹색을 위험하지 않은 색으로 인식한 게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알렉스 가란드는 누구보다 녹색에 대한 두려움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고 자신의 영화에서 그것을 활용한다.
5. 그의 영화에서 녹색은 모두 나무와 풀잎의 색이다. 그는 '녹색=자연'이라는 한국인의 인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이게 정말 한국인의 인식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내가 한국인이고 '녹색은 건강한 색'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이렇게 서술했다). 이는 녹색을 유독화학물질이나 독극물 등 인공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기존 사고와 다르다. 그의 영화에서 녹색은 곧 자연이다. 그가 쓴 소설 '비치'(대니 보일이 영화화 한 작품)에서도 섬의 자연을 상징하는 색은 녹색이다. 자연의 녹색은 전면에 나서는 법이 없다. 식물이 살아서 인간을 공격하는 B급 감성의 접근을 하지 않고 자연의 녹색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둔다. 그리고 실제 위협이 되는 존재는 녹색의 하수인들이다. '엑스 마키나'에서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인격을 가진 로봇이지만, 지극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비인간적이 결정을 내린다. 논리는 가장 자연원리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리는 걸 의미한다. '서던 리치'에서 위협이 되는 존재는 누가 봐도 녹색의 하수인이니 설명을 생략하자. 그리고 '멘'에서는 녹색을 뒤집어 쓴 미지의 실체가 등장한다. 그는 마을에서 위협이 되는 모든 남자들의 씨앗과 같다. 그의 영화 속 위협이 되는 모든 존재는 자연원리에 부합해 움직인다. 사실상 자연은 위협의 조종자가 되는 셈이다. 자연은 힘이 세다. 그래서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6. 녹색의 위협을 이야기하기 위해 중요한 장면이 있다. 얼굴에 나뭇잎을 뒤집어 쓴 미지의 존재가 하퍼를 마주하게 되고 그는 하퍼에게 민들레씨앗을 분다. 흩날리는 민들레씨는 하퍼에게로 향하고 그 중 하나가 하퍼의 입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누가 봐도 정자와 난자의 수정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 이후 흐름이 완전히 뒤바뀐다. 끝없이 실체를 잉태하고 낳는 것은 하퍼가 아닌 '남자'다. 반복되는 출산장면은 자연원리에 부합하는 것 같지만, 수컷이 출산하는 이 장면은 자연원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적인 출산 장면을 거쳐 나타난 존재는 발목이 부러지고 손이 3개가 된 남편 제임스(파파 에시두)다. 그는 하퍼에게 폭력을 일삼고 집착하다가 결국 하퍼가 보는 앞에서 투신자살했다. 손이 3개가 되고 발목이 부러진 모습은 투신자살한 그의 시신과 똑같다.
7. 출산의 불안을 느끼는 것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행위로써 출산의 주체인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가 불안이 될 수 있다. 반복되는 출산장면은 하퍼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영화 내내 등장한 마을 남자들의 존재, 폭력적인 말들,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제임스의 여러 '진상짓'부터 시작한다. 영화 내내 하퍼를 불안하게 한 것은 사실 남자로부터 비롯됐다. 애초에 마을 남자들의 얼굴이 모두 한 사람(로리 키니어)인 이유도 남자의 캐릭터성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남자'면 됐다(다만 '가장 가까운 남자'인 남편은 조금 특별해야 해서 다른 배우를 쓴 듯 하다). 즉 '멘'에서 위협이 된 존재는 하퍼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불안과 공포다. 마치 '솔라리스'처럼 트라우마가 실체가 돼 정면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다만 그 트라우마가 좀 더 광범위하고 모호하다. 모든 공포의 순간이 지나고 죽었던 제임스가 처참하게 망가진 초라한 모습으로 등장했을 때, 그는 더 이상 하퍼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옆에 나란히 앉은 하퍼는 무언가 끝났다는 표정을 짓는다. 다음날 하퍼의 친구 라일리(게일 랜킨)가 하퍼를 찾았을 때 그녀는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8. 하퍼의 트라우마와 공포는 대단히 근원적이다. 그것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자연원리에 근접하면서 선악과의 종교원리에도 부합한다. 사실 이 둘은 반대되는 개념이다. 종교에서 두려움의 존재는 오직 신(神)만 있을 뿐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종교(인간이 풀어서 쓴 그것)는 자연에 빚을 지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먹은 선악과 역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들의 몸을 가려준 나뭇잎 역시 녹색이다. 종교적으로 해석하자면 자연은 신이 창조한 것이 되겠지만, 영화는 그것을 반대로 두고 있다. '멘'에는 신(神)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이나 예수를 상징할만한 그 어떤 실체도 없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서도 신이 등장한 걸 고려하면 누가 봐도 아담과 이브를 상징하는 이 영화에서 신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의외다. 이 영화에서 신은 곧 자연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전면에 나서지는 않는다. 신 역시 마찬가지다. 즉, 이 세계관에서 신은 곧 자연이다.
9. 결론: '멘' 역시 전작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의 실체는 녹색이다. 그러나 녹색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대신 두려움의 도구가 되는 것이 매 작품마다 바뀐다. '엑스 마키나'에서는 과학문명이, '서던 리치'에서는 미지의 존재가, '멘'에서는 종교가 두려움의 수단이 된다. 알렉스 가란드는 녹색이 상징하는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지구의 근간이 되는 근원적 실체를 가장 밑바탕에 두고 그 위에 과학과 상상, 종교를 쌓아올린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인류문명의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실체가 있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아마도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 정도는 '속세의 것'으로 치부해버릴 것이다. 어떤 크툴루 신화보다 대적할 수 없는 근원적 두려움이 자연이다. 알렉스 가란드를 '공포영화 감독'이라고 정의내리는 것에 아직 확신은 없다. 그의 영화들 중 가장 장르성이 강한 게 '멘'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를 공포영화 감독으로 정의내려야 한다면 그는 세계 최초 '친환경 공포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된다.
추신) 아담과 이브 중 '이브'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하면 '하와'다. 현대 히브리어에서 '하바(χaˈva)'로 읽는다고 한다. '하퍼'와 비슷한 발음이다. ...이름을 '이브'라고 하면 너무 직접적일 것 같긴 하다. 다만 이 영화에서 아담은 중요하지 않다. 사실상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남자는 아담이자 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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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네요,,
멘 리뷰 보고 영화보러 갈 것 같네요 고민했는데 차라리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 애석하게도 이전 알렉스 가랜드 영화들을 좋게 보지 않았어서 ㅠㅠ
멘도 볼 지 안볼지는 모르겠지만, 리뷰와 해석이 녹색만큼 신선하고(?) 좋습니다 ㅎㅎ
잘읽었습니다~ 슬쩍 보고 싶어질정도로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