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상망측하고 신나는 B급의 천국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1974년작 <천국의 유령 Phantom of the Paradise>입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락 뮤지컬 작품이자 그의 영화 중 가장 컬트적인 작품입니다.
영화는 어느 락 공연 클럽에 기괴한 가면을 쓴 의문의 존재가 출몰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천국의 유령>은 호러와 코미디가 결합된 브라이언 드 팔마의 락 뮤지컬 영화입니다. 이 작품은 B급 요소를 영화의 자양분으로 삼는 드 팔마의 작품 중에서도 B급에 대한 그의 취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이죠. 가장 컬트적인 성격이 강한 드 팔마 영화라고 할만한 이 작품의 괴상망측한 이미지는 하위문화적인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전설이 된 일렉트로닉 뮤지션 '다프트 펑크'의 멤버들이 이 영화의 이벤트 상영회를 통해 처음 만났으며,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헬멧의 기원이 이 영화로부터 왔다는 것은 이 작품의 그 컬트적인 명성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무명의 작곡가이자 가수인 '윈슬로우'는 유명 음반 제작자 '스완'로부터 작곡한 노래의 악보를 도둑맞습니다. 스완의 계략으로 노래를 빼앗긴 것은 물론 범죄 누명까지 쓴 채 감옥에 수감된 윈슬로우. 그는 탈옥을 하여 스완을 다시 찾아가지만 끔찍한 사고로 얼굴에 화상을 입고 목소리도 잃어버립니다. 모든 걸 잃은 윈슬로우는 스완이 개장을 앞둔 클럽 '파라다이스'로 숨어들어 가면을 쓴 '팬텀'으로 거듭납니다. '파라다이스의 유령'이 된 윈슬로우. 그는 파라다이스에서 그가 연모하는 가수 지망생 '피닉스'를 보게 됩니다.
영화는 [오페라의 유령]을 기본 골조로 삼고 거기에 [파우스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등의 요소를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드 팔마는 스탠다드가 된 소설들을 가져옴에도 불구하고 스탠다드적인 품격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대신에 그는 대중문화에 대한 자신의 광범위한 취향으로 영화를 채웁니다. 마치 고상함에 대한 격렬한 알레르기 증상이라도 있다는듯 그는 요란법석한 이미지로 구축된 경박한 파라다이스로 인도합니다.
드 팔마는 영화의 메인 캐릭터인 팬텀의 이미지에서부터 특유의 괴기 취미를 드러냅니다. 무명의 싱어송라이터 윈슬로우는 유명 뮤지션이자 음반 제작자 스완으로부터 음악을 빼앗기고 락 공연장의 '유령'으로 거듭나죠. '조두' 형태의 가면을 쓰고 검은 가죽 옷을 입은 채 치아는 모조리 뽑혀 은니로 대체된, 게다가 음성도 잃어서 기계 장치를 통해 말을 할 때마다 기괴한 기계음을 내는 팬텀. 왠지 SF적인 이미지도 풍기는 그는 [오페라의 유령] 속 팬텀의 현대적 혹은 미래적 버전이자 드 팔마가 B급의 옷을 입혀 창조한 그의 프랑켄슈타인입니다.
원제 [Phantom of the Paradise]는 '천국의 유령'으로 번역되었지만 원제에서 말하는 'The Paradise'는 천국이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클럽 공연장의 이름입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클럽 '파라다이스' 공연장의 형태는 오페라 공연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공연되는 음악은 오페라가 아닌 대중음악, 락음악이죠. 이는 [오페라의 유령]을 원전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문화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뒤섞는 드 팔마의 삐딱한 반란적 유희정신을 보여줍니다.
그가 존경하는 히치콕이 어두운 한밤에 벌어지는 살인사건보다 햇살이 찬란한 대낮에 벌어지는 살인사건에 더 관심이 간다고 했던 것처럼 드 팔마도 어울리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즐깁니다.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을 가진 쾌활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어둠의 기운을 풍기는 가면 쓴 기괴한 존재부터가 그러하죠. 이것은 발칙한 취향의 무릉도원이며 온갖 뻔쩍뻔쩍한 취미가 전시된 잡동사니의 낙원입니다.
락/팝계의 마이다스의 손 스완이 이끄는 파라다이스는 이름을 얻지 못한 자들의 꿈과 희망이 저당잡힌 공간입니다. 윈슬로우는 <서스페리아>의 주인공이기도 한 제시카 하퍼가 연기하는 가수 지망생 피닉스를 보고 첫 눈에 반합니다. 그러나 그는 팬텀이 되었고 피닉스는 가수로 성공합니다. 팬텀에게 피닉스는 연모의 대상이면서 그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투영하는 페르소나의 대상입니다.
팬텀은 그가 사랑하고 또 재능있는 피닉스가 자신이 만든 곡들을 불러주길 바라죠. 피닉스는 그 이름대로 팬텀에겐 '불멸의 존재'이고 음지의 팬텀은 양지의 피닉스에게 그의 욕망을 투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과 양은 별개가 아닌 하나가 가진 두 얼굴일 뿐 거짓으로 만든 낙원엔 파멸의 그림자만 일렁입니다.
이 대놓고 유희적인 영화에서도 여전히 드 팔마의 작가적인 관심사는 나타납니다. 일단 관음의 모티브가 있습니다. 악마와 계약해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는 스완은 대중에게 최대한 얼굴을 노출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는 높은 곳에 앉아 어둠 속에서 공연자들과 오디션 참가자들을 바라보죠. 흑암 속에서 반짝이는 음침하고 음흉한 관음의 시선은 물론 권력의 시선이자 강탈의 시선입니다. 음악을 도둑맞은 윈슬로우의 비극도 이 시선으로부터 비롯되죠. 그는 관음의 시선을 통한 비극을 계기로 관음의 대상인 윈슬로우에서 관음의 주체인 팬텀으로 변모합니다.
이 변모는 역시 드 팔마의 또 다른 관심 요소인 '더블' 즉, 이중의 모티브 또한 영화의 기둥을 이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팬텀이 된 윈슬로우 뿐만 아니라 주요 인물들은 모두 분열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선적인 악인 스완, 음악에 대한 열정과 성공에 대한 집착이 구분되지 않는 피닉스까지 모두 이중적인 자아를 가진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취향을 전시하는 이 영화에서, 물론 고전 영화에 대한 드 팔마의 애호도 빠트릴 수 없습니다. 그는 오슨 웰즈 <악의 손길>의 저 유명한 오프닝 폭탄 롱테이크 장면을 서스펜스와 코미디, 뮤지컬이 천덕스럽게 공존하는 불균질한 톤으로 오마주합니다. 심지어 그는 이 오마주에 자신의 주특기인 분할 화면을 녹여냅니다. 드 팔마가 분할 화면을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가장 적극적이고도 창조적으로 구사한 감독은 역시 드 팔마일 것입니다. 그는 걸작에 존경을 바침과 동시에 그것을 자신의 터치로 재해석함으로써 테크니션의 자신감을 드러냅니다.
전설의 로큰롤 밴드 '비치 보이스'를 노골적으로 흉내낸 '비치 범스(해변의 건달들)'가 무대에서 노래할 때 팬텀은 무대 소품 자동차 트렁크에 폭탄을 설치합니다. 하나의 장소를 담는 두개의 시점은 롱테이크로 이어지며 발랄한 분위기 속에서 기묘한 서스펜스가 형성됩니다. <악의 손길>의 자동차는 무대용 자동차 소품으로, 위대한 뮤지션 소년들은 남의 곡을 받아야지만 연주할 수 있는 건달들로 대체된 이 기막힌 가짜 낙원. 이것은 문화의 모사를 통한 드 팔마의 유머이면서 거짓과 바꿔치기가 난무하는 아메리카식 낙원에 대한 그의 진단입니다. 휘황찬란한 거짓된 낙원을 분노와 질시의 시선으로 관음하는 것은 재능도 영혼도 심지어 치아도 바꿔치기 당한 팬텀이죠.
드 팔마는 당연히 애정하는 히치콕에 대한 경배심도 빼놓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 큰 영향을 끼친 히치콕 영화 중 하나는 의외로 <새>입니다.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새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팬텀이 쓰고 있는 가면은 새 머리 형태이고 스완(백조)의 레코드사 로고는 까마귀이며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피닉스(불사조)죠. 이것은 히치콕의 작품에서 새가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이 세 사람 모두가 사실상 괴물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또한 가수로서의 성공 전과 성공 후가 각기 다른 이미지로 묘사되는 피닉스는 <현기증>의 킴 노박을 떠오르게 하고, 그 작품의 킴 노박처럼 피닉스도 남자 주인공의 마음 안에서 '죽지 않는 여인'임은 물론입니다. <싸이코>의 경우 샤워실 장면을 통해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용되는데, <싸이코>의 무시무시한 칼이 뚫어뻥으로 바뀐 패러디에 가까운 인용을 통해, 히치콕에 대한 드 팔마의 오마주사상 가장 자학적인 오마주를 펼쳐 보입니다.
로큰롤 영화답게 락 넘버를 비롯한 수많은 노래와 공연 장면이 등장합니다. 공연 장면들은 아름다운 장면, 괴상하게 뒤틀린 장면,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다 섞여있는데 이 공연 장면들의 묘사는 윈슬로우의 시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동경하는 피닉스의 공연은 아름답고 고결하게 묘사되지만 나머지 공연 장면들은 죄다 웃기거나 기괴하게 희화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음악은 스완 역을 맡은, 배우이자 뮤지션인 폴 윌리엄스가 담당했습니다. 영화 속에선 주인공의 음악을 도둑질하는 역할을 맡은 그가 실제론 이 영화의 음악들을 모두 작곡한 것이죠. '더블'의 작가 드 팔마는 참으로 '이중성'을 좋아합니다.
이 작품은 브라이언 드 팔마의 가장 유희적인 성질을 지닌 영화로서 마구 발산하고, 순수하게 망가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드 팔마가 하위문화의 지휘자 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이 영화엔 소위 '정상성'에서 이탈한 것들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이 묻어있죠. 흔히 말하는 '별종'과 '괴짜'들에겐 드 팔마만큼 쿨한 친구도 없을 것입니다. <천국의 유령>이라는 이 언더그라운드한 컬트 음악영화는 잡다한 취향의 진열장이자 난잡하고 신명나는 B급의 에너지로 충만한 로큰롤 파라다이스입니다.
추천인 31
댓글 23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의상디자인부터 팬심이 드러나는.ㅋㅋㅋㅋ
심지어 폴 윌리엄스랑 작업도 했더라구요 ㅋㅋㅋ 다프크 펑크도 성공한 덕후로군요😄
진짜 이상하고 진짜 재밌어보여요
이것도 볼 영화 리스트에 추...가..
말씀대로 굉장히 이상하고 재밌는 영화인데 또 그만큼 취향도 많이 탈 영화겠지만 B무비의 감수성을 즐기시는 분들이라면 분명 열광할 것이라고 감히 넘겨짚어봐요 ㅎㅎ😄
몇 년 전에 뮤지컬영화제에서 해 줬는데 못봐서 어찌나 안타깝던지...
서스피리아 배우 노래 잘하네요.^^
혹시 저 영화 감독이 캐리 감독??
주인공의 가면이 베르세르크의 '페무토'가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