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에서 보고 온 비상선언 후기
안녕하세요. 프랑스 파리에 거주 중인 일반인입니다. 운 좋게 지난 칸영화제에 참석했고,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감독 및 배우 분들과 함께 <비상선언>을 관람했는데요. 미루다가 이제야 후기를 몇 마디 적어봤습니다. 나름 최대한 스포를 빼려고 노력했지만 아직 정식 공개되지 않은 작품이다 보니 상당히 조심스럽네요.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 있으면 수정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점잖게 썼지만 개인적으로 그냥.. 개쩔었습니다 ㅎ 아직도 전율이.. 기대 많이 해주세요 비상선언! 감독님 배우님들 다 정말 최고입니다 ㅠ_ㅠ 국위선양 해주심에 그저 감사를..
코로나 시대와 OTT시대의 환상적인 콜라보레이션은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영화 개봉’의 개념 자체를 빠르게 바꾸어놓았다. 넷플릭스 등의 OTT서비스를 통해 영화가 ‘독점 개봉’하는 일을 두고 처음에는 제법 큰 우려와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이것이 관객들에게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일로 자리 잡게 되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이 내게는 영화 관람에 최적화된 극장에서의 감상 경험이 또한 얼마나 대체 불가능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우여곡절 끝에 넷플릭스 개봉을 결정한 <사냥의 시간(2020)>의 경우 큰 스크린과 입체적인 음향이 보장된 환경에서 감상했으면 훨씬 집중도가 달랐을 것 같다는 안타까움을 주었고, 좌석 띄어앉기 형태로 극장에서 감상한 <테넷(2020)>의 경우는 스토리와 별개로 화면과 배경음악이 선사하는 웅장함에 완전히 압도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21년,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과 공간감을 주는 음향 시스템이 필수로 요구되는 영화 한 편이 등장했으니, 바로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이다.
뤼미에르 대극장의 거대함은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미 앉아있는 이들을 압도하는 듯했지만, 상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인천국제공항의 모습이 거대한 스크린에 등장하자 그때부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전율이 흘렀다. 내 자리는 2층 발코니석에서도 좌측으로 치우친 쪽이었는데, 상영 내내 배우들의 말소리보다 다른 배경소리들이 훨씬 크게 들리는 불균형이 있었던 점이 끝내 아쉬웠지만 영화는 어떤 방해요소에도 결코 관객을 한눈 팔 수 없게 하는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어마어마한 라인업으로 제작단계에서부터 주목을 받고 있는 이 영화는 그야말로 대배우들의 ‘연기 대결’이라는 헤드라인이 자연스러울 만큼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빛나는데, 이 대장정의 막을 힘차게 걷어올리는 것이 바로 임시완이다. 개인적으로 칸 영화제는 물론이거니와 이 정도로 큰 규모의 해외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제법 많은 상영에서 많은 관객들이 상영시간에 취침을 하거나 중간에 나가버리는 일이 잦다는 소문을 실제로 확인하고 체험할 수 있었다. 칸이 경쟁부문에 택한 영화들은 대체로 잔잔한 흐름을 가지고 있고, 영화제에 참석한 이들은 어떤 목적으로 왔든 대부분 매일 잠을 줄여가며 아침저녁으로 영화를 보는 피로를 견뎌야만 한다. <비상선언>의 뤼미에르 상영은 심지어 현지 시간으로 밤 열 시 반이 가까운 늦은 시간인 데다가 두 시간 반에 육박하는 긴 러닝타임이 예고되어 있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임시완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부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관객들이 빠르게 영화에 집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무슨 일인가 벌어진다. 재난 영화의 초입으로는 당연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최대한 군더더기 없는 직진을 선택한 감독의 의도가 확연히 느껴지는 오프닝이었다. 영화가 시작된 바로 그 순간부터 이 영화는 시작된다. 선수입장, 그런 건 없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보편적인 재난영화의 공식을 따라가는 편이지만 필요한 클리셰는 취하면서도 동시에 관객의 예상을 배반하기 위한 시도들을 반복한다. 이 점이 내가 이 영화에 느낀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그리고 또한 바로 이 부분이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상영과 감독 및 배우들의 인사가 모두 끝나고 새벽 한 시가 가까운 시간에 대극장을 나서면서 나는 그저 흠잡을 데 없는 영화라며 호들갑을 떨어댔고, 동행은 너무 뻔해서 실망이었다며 차갑게 비판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연출상, 혹은 스토리상으로 낯익은 부분들을 ‘장르’의 활용으로 받아들였는지 진부한 ‘클리셰’로 받아들였는지의 차이로 해석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글쎄, 내 글이니 내 의견을 적자면 이 영화에서 합리적인 맥락 없이 그저 기존의 공식을 따르기 위해 반복된 장치는 없었다. 배우들에 대한 애정과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두 시간 반 동안 한국어를 듣는 자부심으로 이미 내 눈이 멀어버렸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명이 불필요한 부분에서는 과감히 히스토리를 제거하고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납득 가능한 전후 맥락을 설치하는 감독의 선택들이 내게는 다 충분히 논리적이었다.
이 영화를 가장 짧은 한 마디로 축약해보라면 농담을 섞어 <부산행>의 상위호환, 내지는 <부산행>의 비행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영화에는 전체적으로 <부산행>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많다. 물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서스펜스와 익숙한 장르에서 발견하는 신선함 등의 좋은 면에서. 만약 이 영화가 정식 개봉 때 러닝타임을 줄이게 된다면 전반부가 아닌 후반부에서일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예상 가능한 전개를 벗어나기 위해서 약간의 무리수를 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악몽이 반복될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긴장감을 잃지 않는 것이 내게는 그저 용하게 느껴졌지만, 그 느낌 자체가 어느 정도 이미 집중도를 잃었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을 것은 같다.
어쩌면 한국 재난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가 될 이 영화에서 유독 찝찝하게 남는 한 가지 단점을 꼽자면 극중 전도연의 애매함이라고 하겠다. 그가 맡은 국토부 장관이라는 인물이 대체 이 영화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인지를 영화 내내 고민해야만 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부 남자로 구성된 주요 캐릭터들 가운데 여성 캐릭터를 필요에 의해 추가한 것 같다는 이미지를 지우기가 어려웠다. 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지는 그의 연기톤과는 별개로, 그에게 주어진 대사마다 ‘하나마나 하는 말을 왜 하는 거지’하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됐다. 담대하고 현명한 여성 장관이라는 영화 캐릭터의 등장은 분명 환영할 만하지만, 다른 인물들만큼 자연스럽게 전체 스토리에 녹아들지 못한 점이 끝내 아쉬웠다.
중간중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가 터져나왔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하는 인류애적인 장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 한 번은 위트 때문이었다. 이 정도는 스포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언급하자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세계는 <기생충>을 통해 알게 되었던 송강호의 진한 유머가 한 번 강한 펀치를 날리는 장면이 있다. 한국인인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 꽂혀들어간 유머 한 방도 이런 박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구나를 이때 깨달았다.
블록버스터만의 시청각적 쾌감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역시 이 영화는 실망을 안기지 않을 것이다. 파리에서 칸까지 비행기를 타고 왕복한 나에게는 본의 아니게 더욱 실감이 날 수밖에 없었던 장면들. 동행은 이 또한 CG의 어색함이 군데군데 느껴져서 아쉬웠다고 했지만, 나는 특별히 어색한 부분을 포착하지 못했다. 비행 재난 영화에서 상상할 수 있는 짜릿함이 있다면 분명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빨리 이 영화가 개봉해서 결말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으면 좋겠다. 아주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엔딩이다. 특히 한국인 관객이라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같은 무언가를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 재난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관객들로 하여금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내가 저 상황에 있었다면’을 생생히 그려보게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비행기 내 생화학 테러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개인적이거나 국가적인 여러 선택들이 이어진다. 죽음, 또는 그 이상을 목전에 두고 나는 영웅이 될 것인가 빌런이 될 것인가. 이유와 사연을 갖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인류는 조금씩 재난에 능숙해져가고 있다. 인간의 본성 때문에 재난의 역사를 아무리 거듭해도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최근 반복해온 경험과 목격과 기록은 분명 우리들을 이전과는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희생하고, 누군가는 회피하고, 누군가는 감내한다. 재난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고, 돌이켜보면 가해자는 재난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일 때가 더 많기도 하다. <비상선언>은 이미 ‘시의적절한 영화’라는 수식어를 얻고 있는 작품이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 빠르게 질주하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에 탑승한 승객은 하차한 뒤에도 한참동안 진한 어지럼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영화 속과 같은 혼란이 현실에도 계속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분명 악당도 있고, 영웅도 있다. 그런데 좀 많다. 실제 삶에서 우리가 대체로 두 역할을 동시에 맡곤 하는 것처럼 말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던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는 나를 포함해 모두의 진심이었다. 칸 영화제는 ‘경의를 표한다’는 표현의 의미를 실감하기 좋은 곳이다. 영화를 만든 주역들이 바로 이곳에 있고, 겸손히 감사인사를 전하는 그들에게 관객들은 그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존경과 고마움을 표할 뿐이다. 한여름 밤의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우리는 모두, 한 비행기에 탄 승객들이었다.
원문은 제 블로그에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charismee/222444741021)
추천인 67
댓글 25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귀한 후기 감사합니다...
비상선언~~~비상하라!!!
생생함이 느껴집니다
본인의견과 동행분 의견까지 담아주셔서 더욱 풍성하고 읽기 좋았습니다.
본문 중 “선수입장 그런 건 없다”는 부분이 참 잘 와닿아서 어서 빨리 영화가 보고 싶어지네요!!! 👍👍
얼른 보고싶습니다. ㅎㅎㅎ
글을 천천히 다 읽고 나니 영화가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
귀한 후기 감사합니다.
호화 캐스팅의 한국 영화 야심작인데 어려운 시국이지만 좋은 결과 냈으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