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 내용과 형식이 서로 함께 가는 흔치 않은 영화 (스포)
많은 분들이 이 영화의 기술적, 형식적 성취를 찬사하면서도 내용에 대해서는 그닥 후한 점수를 주지 않으시던데요, 저는 오히려 내용과 형식이 서로를 앞서지 않고 하나로 잘 융화된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일관된 이미지는 “하나의 줄로 이어지는 순환”입니다. 영화는 파란 들판의 나무 한 그루 아래서 낮잠을 자는 블레이크와 스코필드의 장면에서 시작하고, 영화의 앤딩은 모든 임무를 마친 스코필드가 첫 장면과 비슷한 나무 아래 앉아 푸른 들판을 바라보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줄기로 연결되는 영화적 장치와 서사는 영화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이들 내용은 하나의 롱 테이크로 이어지는 영화의 형식미와 서로 일맥상통합니다.
두 병사는 폐허가 된 농장 집에 들어서자 밑둥이 잘려나간 벚나무를 보지요. 비록 방금 베어졌지만 가지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벚꽃이 피어 있습니다. 보통 벚꽃은 웬만해서 그 종류를 알아보기 힘드나, 스코필드는 부모님이 사과농장을 하셨기 때문에 단번에 이 벚꽃의 특별한 품종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같아보이는 벚나무들에도 각자의 고유함과 개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5월이 되면 고향의 온 가족이 함께 체리열매를 수확했다고도 말합니다.
스코필드는 독일군의 사격에 쫒기다가 급류 속으로 뛰어듭니다. 물살이 점점 잔잔해지면서 저 편 들판에서 아침 새소리가 들립니다. 전장의 군인들은 서로를 살육하며 생지옥을 경험하고 있지만 자연은 그저 무심하게 생명의 주기를 반복할 따름입니다. 이 때 스코필드의 얼굴 위로 새하얀 벚잎이 하나 둘 씩 떨어집니다. 물가에 다다르자 물에 퉁퉁 분어 서로 뒤엉켜있는 병사들의 시체가 늘어납니다. 한때는 서로 다른 가족의 일원이었고 각자의 고유한 이름이 있었던 병사들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무명의 시체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꽃잎은 송장 위에 흩뿌려집니다.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썪어가는 인간의 육체와 아름다운 꽃잎의 대조에서 묘한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그것은 인간세상의 끔찍한 살육전에 아랑곳 하지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자연의 무상함이고, 자아를 잃어버린 채 한 무더기의 송장이 되어버린 개인 하나하나에게 자연이 건네는 추모이며, 오월이 되면 시체의 양분을 이어받아 풍성한 열매로 다시 태어날 생명의 순환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형식적으로 두 개의 샷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첫 번 째 샷은 스코필드가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며 끝나고, 한동안 암전이 지속되다가 그가 깨어나면서 두 번째 샷이 시작됩니다. 재미있게도 이 한 번의 끊김은 영화의 무대장치에 이미 암시되어 있습니다. 블레이크가 강 바닥으로 무너진 다리를 건널 때, 그는 사선으로 이어진 다리 레일 위를 위태롭게 걷다가 물에 잠겨 끊긴 부문을 한번 건너 뛰어야 합니다. 다리의 잠긴 부분은 롱테이크의 한번의 끊김과 서로 닮아있습니다.
적의 총격에 쓰러지고 나서 한참 지나 정신을 차린 스코필드의 눈에 보이는 것은 끔찍한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입니다. 지상은 거대한 불길이 치솟고 있는 불지옥이지만, 반면 그가 찾아간 지하 공간은 구원과 생명이 있는 곳입니다. 그가 처음에 참호에서 블레이크와 함께 들어간 지하공간은 더러운 쥐와 부비트랩이 터지는 공포의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죄를 용서하는 여인과 새로 탄생한 아기가 있는 성소입니다. 여인은 지상에서 사람을 죽이는 죄를 짓고 만신창이가 된 스코필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그녀의 손길은 스코필드에게 구원과 안식을 줍니다.
책장 서랍 안에는 새로 태어난, 부모도 알 수 없고 이름도 모르는 아기가 있습니다. 스코필드는 지상에서 떠온 젖소의 우유를 내놓습니다. 이것은 그의 친구 블레이크가 죽어갔던 농장에서 가져온 것이죠. 이 우유로 인해 블레이크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연결됩니다. 스코필드는 그 아이에게 “산을 넘어, 바다를 건너 걸어가라”라는 내용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이렇게 삶은 또 순환합니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촬영기술의 화려함에 그저 소비되고 있다는 평에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의 단순한 형식에 인물의 다채로운 서사가 모두 수렴되는 영화는 흔치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이 영화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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