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시빌 워: 분열의 시대(Civil War, 2024)> : 인간은 살아남지 못한다
모든 이미지 출처: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
*영화 스포일러 주의
어떤 영화는 우리의 감정을 한계까지 끌어냅니다.
조명을 극도로 어둡게 혹은 밝게,
배우의 연기에서 감정을 극단적으로 터뜨린다던가,
음악을 활용해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고요.
공포영화나 신파극 같은 경우가 특히 그렇죠.
저 두 장르는 그러한 감정 끌어내기가 장르의 근본적인 덕목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떤 영화는 극도로 감정 몰입을 자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얼핏 보면 ??? 싶은 순간이 많게 느껴질 수도 있는 오늘의 영화는,
시빌 워: 분열의 시대 (Civil War)
감독 알렉스 가랜드
출연 커스틴 던스트, 와그너 모라, 케일리 스페이니, 스티븐 헨더슨 등
국내 개봉 2024. 12. 31.
의도적으로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는 연출들
이 순간에 이런 음악을?
엥? 지금 이렇게 행동한다고?
<시빌 워>를 보다보면 자주 드는 의문일 겁니다.
전쟁포로를 자비없이 총살해버리는 서부군. 이 때 깔리는 팝 음악이 참으로 흥겹죠. 지금 이런 음악을 깔아??? 싶으신 분들이 많으셨을 것 같네요.
이 영화에서의 삽입곡들은 철저히 우리의 기대를 배신합니다. 흥겨운 팝송이 들릴 때마다 우리의 눈 앞에는 시커면 연기, 치열한 전투가 치러진 후 남은 폐허, 수많은 시체들, 잔인한 전쟁의 광기가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들이 펼쳐지죠.
극에서 가장 살벌하고 긴박했던 장면인 민간인 학살 현장 장면에서도, 이를 자행하는 군인의 선글라스는 오히려 어색하고 튈 뿐만 아니라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각 상황에는 우리가 응당 나올것으로 기대하는 연출이 있는데 말이죠. 이 감독은 연출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물론 아니죠. 네,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인위적인 연출을 최대한 배제한 것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즉 이 영화는 스스로 "극"에서 탈출하여 "현실 보도"의 정체성을 가지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눈치채셨겠지만 바로 극의 주인공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종군기자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리 스미스(커스틴 던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판단하지 않아.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전달할 뿐, 판단은 그걸 보는 사람들의 몫이지."
영화도 마찬가지로 이들의 행적을, 또 전쟁의 상황을 판단(연출)하지 않는 겁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죠. 그렇다면 영화가 극의 정체성을 버려가면서까지 반드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인간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잔혹한 현실
네, 이 영화의 핵심은 전쟁의 비인간성입니다. 뻔하죠?
단지 이걸 전달하는 방식이 정말 세련되었을 뿐입니다.
주인공을 차례로 볼까요.
리 스미스. 베테랑 종군기자입니다. 종군기자 사이에서는 아마 롤모델이자 전설인가봅니다.
그의 동료 조엘(와그너 모라). 마찬가지로 프로 종군기자구요.
새미(스티븐 헨더슨, 참고로 여기서 다시 봐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마찬가지로 베테랑 기자인데 노쇠하여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시(케일리 스페이니). 신참, 사실상 지망생이구요. 억지를 부려 처음으로 종군기자로서 세 사람을 따라갑니다.
제시는 이번이 첫 종군 취재였고, 따라서 전쟁의 참상을 처음 접하고는 몹시도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일반인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이죠. 눈 앞에서 사람이 고문당하고 매달려있는데, 곧 이들을 죽이겠다는데 어찌 안 그럴 수 있겠어요?
리, 조엘, 새미는 반면에 덤덤합니다. 이들은 철저히 자신의 일행은 그저 기자임을 언급하며, 잔혹하고 슬픈 광경 앞에서도 그저 기자로서의 본분에만 충실합니다.
위에서 리가 한 말을 보여드렸습니다. 우리는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은 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스스로를 그저 카메라와 동일시하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스스로를 비인간화 한 겁니다. 전쟁에서 살아남고 기자로서의 일을 하기 위해서요. 제시도 마침내 수많은 일을 겪으며 종군기자로서의 자세에 익숙해져 갑니다.
이제 이 영화를 이해하기 쉬워졌습니다. 전쟁에서,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결국 네 명의 주인공 중 두 명이 사망합니다. 새미와 리. 공통점이 보이죠?
이들은 인간성을 보였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민간인 학살 현장에서, 새미는 처음부터 가까이 가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말했고 실제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원한다면 혼자 도망칠 수 있었죠.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두 명의 동료 종군기자들이 죽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리와 조엘, 그리고 제시를 구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총을 맞고 사망하죠.
백악관 최종 전투. 피로의 누적인지, 혹은 새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리는 돌입 전부터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답지 않게 전장을 힘들어하죠.(반면 제시는 이 때부터 놀랍도록 적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이어지는 최종 전투. 정부군과 서부군이 총격을 주고받는 복도에서, 종군기자들은 복도를 가로지르며 목숨을 걸고 총격 장면을 찍습니다. 제시가 무모하게 한가운데 섭니다. 정부군의 총알이 날아듭니다. 리가 제시를 감싸고 대신 총알에 맞아 사망합니다.
제시가 왜 굳이 그 타이밍에 나섰는지는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종군기자들 누구든 언제라도 총에 맞고 죽을 수 있죠. 하지만 새미도 리도, 결국 타인을 도우려는 인간성을 보이는 순간 죽음을 맞습니다.
이어서 이 영화의 가장 잔인한 장면이 이어집니다. 오랜 동료 조엘도, 심지어 리를 존경하고 흠모했던 제시마저 쓰러진 리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저 대통령을 향해 나아갈 뿐이죠. 마침내 사로잡힌 대통령은 죽기 직전 유언을 남깁니다.
"살려주시오."
죽음 앞에 두려움을 내보인 인간은 결국 예정대로 죽음을 맞죠.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조엘. 베테랑 종군기자로서 줄곧 감정을 잘 조절했으나 결국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한 리와 새미. 평범한 일반인으로 시작했으나 결국 인간성을 억눌러버리게 된 제시.
그러고보니 이동 중에 만난 마을 중 의아할 정도로 평소처럼 살아가는 마을이 딱 한 군데 있었죠? 거기서도 마을 점원이 이렇게 말했네요.
"우린 빠져 있는 거예요."
조엘과 제시가 살아남고 새미와 리가 죽음을 맞이한 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전쟁터에서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고, 인간성을 버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인간성을 버린 사람들을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란 질문까지 생각한다면, 결국 전쟁은 그 어떤 인간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건조하고 담담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닌가 합니다.
사실은 아주 세심하게 신경을 많이 쓴 영화
앞서 "연출을 하지 않는 것 처럼 연출"했다고 말씀드렸죠? 물론 여지껏 설명했듯 실제로는 이 영화, 아주 연출에 신경을 많이 쓴 영화입니다.
반응을 보아하니 고증을 꽤나 잘 하여 밀덕 분들께도 평가가 좋은 것 같구요, 재미있게도 이 영화의 '서부군'은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주의 연합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두 주의 정치성향이 정반대라고 하네요. 논란을 피하고자 아주 고심이 많았겠습니다.
영화는 어느 한 쪽을 결코 편들지 않습니다. 가장 긴장하게 만들었던 민간인 학살 현장 장면에서의 군인은 정부군의 군복을 입었지만 실제 정부군으로 활동하기보다는 이탈한 잔당이라는 느낌으로 묘사됐고, 인정사정 없이 상대방을 사살해버리는 것은 서부군도 마찬가지로 그려지죠. 리가 자신은 그저 보도하는 것 같지만 실은 끊임없이 조국에 경고를 한 것이라고 말한 대사 그대로, 영화의 모든 연출이, 전쟁은 절대 안 된다는 메시지를 온 힘 바쳐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시빌 워: 분열의 시대>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영제인 Civil War 만으로는 우리말로 느낌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워서 부제를 붙인 것 같은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다른 선택도 좋았을 것 같아요. 현실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시빌 워' 하면 캡틴 아메리카가 떠올라 버리는 게 문제여서 그랬겠지만요^^;; 새해부터 생각할 거리를 잔뜩 던져주는 영화들을 만나서 아주 흥미로운 요즘입니다!
블로그에 더 많은 영화 리뷰가 있습니다 :)
https://m.blog.naver.com/bobby_is_hobbying/223725878302
바비그린
추천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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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우파보다는 파시스트 독재자의 위협을 더 강조한 것 같아서.. 더 마음에 들었고, 요즘 시국에 더 와닿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