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하얼빈>, 그리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 : '용기'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두 가지 문법
*모든 이미지 출처: 영화 <하얼빈>,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어렸을 적 보았던 많은 모험물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은 "용기"라는 가치관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뭐 용기의 문장, 용기의 검, 뭐 이런 것들요. 그래서 실은 저는 용기를 굉장히 어렵게 생각했습니다. 저건 주인공씩은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삐딱함은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오늘은 두 편의 영화를 한 번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편은 우리 영화, 한 편은 외국 영화인데요. 두 편 모두 "용기"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같지만, 또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정반대에 가깝고, 결국은 두 용기가 모두 가치있다는 점에서 재미있죠.
용기는 정말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것일까요?
하얼빈(Harbin, 2024)
2024. 12 개봉 / 감독 우민호 / 출연 현빈, 박정민, 조우진, 전여빈, 박훈 등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 2024)
2024. 12. 11 개봉 / 감독 팀 밀란츠 / 출연 킬리언 머피, 아일린 월시 등
<하얼빈> : "영웅"에서 "인간" 안중근으로, 그리고 다시금 이를 신화로 올려놓는 작업
<하얼빈>은 인간으로서의 안중근 의사를 조명합니다. 무서운 시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하루하루 목숨을 걸어가며 싸우고 있었고, 안중근 의사 역시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처절하게 살아남고 있었습니다.
영웅이라고 멋진 수트를 입고 부상 없이 전진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현실이니깐요. 오히려 영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웅"의 고결한 이미지에서 안중근이라는 캐릭터를 잠시 끌어 내립니다. 바닥으로, 더 바닥으로.
그래서 이 영화의 초반부에 안중근이 멋드러지게 폼을 잡는 장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이 얼어붙은 강 위를 쓰러지듯 간신히 나아가다 결국 주저앉는 그의 모습을 비추었고, 영화 초반부의 전투 장면들은 그야말로 비참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바닥을 기며 진행됩니다.
바닥을 헤집으며,
진흙을 뒤집어 쓰며,
온 몸은 새카맣게 검어지고,
보통 액션 영화에서 보는 합이 딱딱맞는 격투액션 대신
그야말로 살기 위해 할퀴고 물어뜯는 혈투가 이어지죠.
영화는 안중근의 실책도 짚고 넘어갑니다. 적장을 살려주어 결국 그 복수로 동료들을 잃고 마는 고구마 전개를 보며, 분명 그 장면에서만은 안중근을 욕하는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이 장면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안중근은 "인간" 안중근이니까요.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죠. 결국 그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가 그토록 보고 싶은 "영웅"이 된다는 것.
<이처럼 사소한 것들>: 세상을 바꾸는 데 필요한, 아주 작은 용기 한 스푼
주인공 '빌 펄롱(킬리언 머피)'는 작은 마을에서 석탄을 팔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자기자신도 넉넉한 형편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힘겨워 보이는 이웃 아이에게 선뜻 돈을 줄 만큼 인정이 있죠.
그런 빌이 마을의 대소사를 좌지우지하는 수녀원에 어두운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미혼모나 문제를 일으킨 여성들을 본인 의사에 반하여 가두고 일을 시키며 학대하는 것이었죠.
수녀원 측은 협박에 가까운 경고를 합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못 본 것이다.
아내와 주변인들도 만류합니다. 못 본 척 해. 어차피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아.
함부로 일을 벌이면 본인의 삶의 기반이 위협당할 형국이죠. 빌 펄롱은, 아니 우리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용기를 다루는 두 가지 방법:
극적인 오르락내리락 vs 당연하다는 듯한 잔잔함
두 영화는 실은 서로 전혀 상관없음에도, 비슷한 시기에 "용기"를 주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하얼빈>은 평소 우리에게 한없이 성스럽고 경외로운 존재였던 안중근 의사를 바닥으로 끌어내립니다. 안중근은 그 바닥에서 기고, 헤매고, 의심하고, 의심받고, 처절하게 목숨을 걸고 싸우죠. 지나가듯 대사로 언급되지만 안중근은 아내와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독립전선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전에 개봉했던 <영웅>이 안중근을 말 그대로 영웅대접했다면, <하얼빈>은 인간 안중근의 치부까지 보여줌으로써 그 역시 하나의 인간이었음을 보여주고, 종국에는 역설적으로 그럼에도 조국을 위해 일어섰던 그의 용기가 얼마나 거대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검은 진흙, 검은 옷.
바닥을 기는 전투, 쓰러지듯 간신히 나아가는 빙판에서의 탈출.
그러나 그는 죽음 앞에서 결국 "고결한" 흰 옷을 입고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릅니다. 일제가 그걸 교수대라고 부르든 뭐든 상관 없습니다. 이때 안중근 의사가 오른 것은 천국의 계단, 마지막에 와서야 영화가 보여주는, 안중근 의사에게 마침내 허락된 영웅으로의 상승 이미지입니다.
반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한없이 삼삼한 연출을 했습니다. 빌 펄롱은 흔하디 흔한 맘씨좋은 아저씨이며, 한편으론 소시민적인 모습도 보여줍니다.
그가 작중에서 용기내어 한 일도 흔히 액션영화나 히어로무비에서 보듯 수녀원을 뒤집어엎어버리거나,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거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그저 고통받는 한 소녀를 구해서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었죠. 일반적인 상업영화 기준으로 보자면 뒤가 뚝 끊긴 느낌마저 들 겁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용기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또 어렵게 낸 용기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현재 우리에게 당장 닥치지 않은 망국의 상황보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할, 밥줄이 끊길 각오를 하고 낸 용기가 더욱 와닿기도 하죠.
그럼에도 빌 펄롱은 해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전체 플롯에서 일어난 사건의 가짓수는 많지 않고 그 전개도 매우 단순하지만, 영화 전체에 흐르는 느릿한 문법은 반대로 한 작은 개인이 용기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가치있는 일인지를 가감없이 보여줍니다.
그리고, 빌 펄롱이 이 소녀를 구하겠단 마음을 먹은 계기 역시 엄청난 각성과 깨달음이 아니었죠. 어린 시절 고아가 되었던 불행한 자신에게 주변의 어른들이 보여준 따뜻한 도움의 손길 때문이었습니다. 그 따뜻함을 받았으니, 돌려준다. 대단히 신선한 메시지가 아님에도, 가슴이 뭉클한 감동을 주네요.
마지막 씬이 정말 인상깊었습니다. 다급하게 소녀를 집으로 들여 숨기는 것이 아니라, 평소 귀가 시와 똑같이 집 문을 천천히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평소처럼 손을 천천히, 깨끗하게 공들여 씻고, 마침내 소녀를 손님 모시듯 집으로 들이는 이 연출은,
빌 펄롱의 이러한 행동이 용기있고 정의로운 한 편, 당연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때려박습니다.
<하얼빈>의 마지막 장면도 흥미롭습니다. 거대한 빙판 위의 하나의 작은 점이자 몸부림이었던 안중근은 마침내 관객을 똑바로 바라봅니다. 당신은 준비가 되었냐는 듯이.
오늘 <하얼빈>과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후자를 먼저 보고, 어떻게 리뷰를 쓸까 한참 고민하던 차에 최근 <하얼빈>을 보고는 이거다, 싶은 아이디어가 다행히 떠올랐네요. 두 편 모두 정말 가치있는 작품이니 새해를 여는 영화로 딱입니다. 강력추천합니다!
블로그에 더 많은 영화 리뷰가 있습니다 :)
https://m.blog.naver.com/bobby_is_hobbying/223718053612
바비그린
추천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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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엔딩의 의미가 보다 명확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