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녀 (1971) 걸작. 스포일러 있음.
호금전감독의 걸작 무렵영화다. 호금전감독답게 불교의 메세지가 강하게 들어있다. 아마 이런 점이 서양관객들에게 어필했을 수도 있다. 영화 이름이 a touch of zen 이다. 대놓고 불교적인 영화라고 표방하는 셈이다.
호금전감독 영화들 중 최고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말년의 작품들, 가령 산중전기나 공산영우 등이 더 호금전감독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규모 예산을 들여서 볼 거리를 더 정교하게 만들고 스케일을 엄청 키우고 더 갈고 다듬은 것이다. 말하자면, 1971년판 와호장룡이다. 하지만, 와호장룡은, 감독이 선이나 도에 대한 관심 없이 냉랭하게 그린 데 반해, 이 영화는 불교를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데 일생을 바치는 대가의 작품이다. (주윤발이 와호장룡에서 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감독이나 주윤발이나 이것을 믿지 않는다. 그냥 대사만 읊은 것이다. 하지만 호금전은 다르다. 중국적인 동양화 이천년의 역사나 불도를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서풍이 주연이다. 용문객잔에서 귀양가던 꼬마가 이렇게 자라다니 세월이 참 빠르다.
명나라 말기, 작은 시골에는, 고성제라는 선비가 그림을 그려 팔아먹고 산다. 그는 과거 급제에 뜻이 없는데, 그 이유는
은인자적하는 것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시대가 혼란하니 몸을 굽히고 조용히 사는 것이 몸을 보전하는
것이다 하는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폐허가 된 대저택에 자리 잡고 사는 고성제는 어느날 밤 무언가 이상한 경험을 한다.
영화 처음은, 히치콕풍의 스릴러물이다. 고성제라는 평범한 선비가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가 모험을 겪는다는 이야기다. 히치콕풍의 이야기를 스릴과 서스펜스 그리고 유머를 적절히 섞어가면서 아주 잘 만들어낸다. 거기에다가 호러영화풍을 좀 섞었다. 고성제가 이상한 불빛을 보고 폐허가 된 대저택 속을 방황하는 장면은 걸작 호러영화의 한 장면 같다. 이 쟝르들 중 어느 하나만 만들었어도 그는 걸작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낭자라는 이상한 처녀가 대저택 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가난한 자기보다 더 가난한 처녀다. 고성제는 이상한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양낭자를 수소문하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시골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이제 고성제는 조연으로 밀려난다. 양낭자가 주연이다. (나중에, 고승이 등장하면서, 양낭자도 조연으로 밀려난다.)
양낭자는 고성제의 청혼을 거절한다. 그런데, 고성제의 어머니가, 고씨집안의 대가 끊기게 되었다고 괴로워하는 것을 듣고, 고성제의 아이는 낳아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고성제와 하룻밤을 보낸다. 양낭자를 이상한 남자들이 찾아내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무협영화가 된다.
양낭자는 어느 충신의 딸이었다. 충신이 간신의 모함으로 처형당하면서, 딸도 추격을 받는다.
그녀는 동창의 추격을 피해 이 시골 폐허에 숨어들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창은 여기까지 찾아온다.
그들의 힘은 압도적이다. 모두 무술의 고수들이다.
양낭자는 고성제를 매몰차게 내쫓지만, 자기 여자를 위험에 내버려둘 수 있나? 고성제는 무술 하나 할 줄 모르면서,
양낭자에게 곁에 두고 도와줄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무술도 할 줄 모르면서......빨리 떠나라....하던 양낭자도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는 고성제의 애원에 허락한다. 병법을 배웠지만 써먹을 데가 없던 고성제는
비상한 머리회전으로 양낭자를 오히려 리드한다.
영화는 양낭자와 그의 소수 일행들이 압도적인 동창과 혈투를 벌이는 내용이다. 양낭자는 엄청난 무술실력을 갖고 있지만, 점점 더 두려운 고수들이 찾아온다. 강한 놈 해치웠더니 더 강한 놈이 오고 이 놈을 해치웠더니 더더 강한 놈이 오고 하는 식이다. 영화가 느슨해질 틈이 없이 한 방향으로 질주해 나가는 힘이 있다. 고수들을 자꾸 보내면서 동창의 군대가 서서히 다가온다. 동창의 본진은, 고수 개개인들보다도 더 무섭다.
유명한 대나무숲 대결장면은 오늘날 CGI 무협영화에 길들여진 관객들이 보기에는 심심할 것 같다. 하지만, 미녀인 서풍의 액션연기가 훌륭하다. 유현한 맛이 있다. 심오하고 그윽하다는 뜻이다. 동양화에 나오는 산수화의 그 분위기다. 서풍과 그의 동료가 동창고수 두명과 맞붙어서 혈투를 벌인다. 서로 실력이 비슷해서 쉽게 결판이 안나고, 엄청 혈투를 벌인다.
서풍이 휙 날아가서 대나무 위에 붙어있다가 쏜살같이 날아 내려가서 동창고수를 칼로 찌르는 것이 전율이 돋을 정도다. 그냥 사뿐히 날아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무거운 쇳덩이가 추락하는 것처럼 바람소리를 윙윙내며 무거운 중력으로 쏜살같이 떨어진다. 굉장히 실감난다. 대나무 위를 날아가는 장면이 와호장룡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럴 것 같다.
이런 장면은 호금전의 다른 영화에도 나온다. 차이점은, 이 영화는 예산을 아주 많이 들여서
갈고 닦은 것이라 완성도와 화려함에서 월등하다. 호금전 최고의 장면들이 여기 나온다.
고성제는 동창 본진을 상대할 길은 힘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폐허 대저택으로 유인해서
기만책으로 몰살시키는 길뿐임을 주장한다. 동창 본진은 몰살시키지만, 양낭자와 동료들은 동창 절대고수의 습격을 받는다. 양낭자와 동료들 모두를 갖고 노는 절대고수다.
그리고, 호금전영화에 늘 등장하는 주제가 나온다. 고승이 등장해서 절대고수를 갖고 논다.
그는 속세 밖의 자유인이자 초인이다. 고승은 애초에 무술을 보여줄 필요도 없었다. 그는 눈 하나 깜박임으로써 고수의 정신을 파괴해 버릴 수 있었으니까. 동창고수는 그냥 도망친다.
대취협 이후 계속 등장하는 스토리다. 고승은 도망치는 양낭자에게 무술을 전수해주어서
지금까지 살아남게 만든 사람이다. 양낭자가 지금 무술실력을 가진 것도, 고승에게서 조금 배운 덕분이다.
고승은 왜 양낭자에게 무술을 가르쳤던가? 이 무술로 나가서 사람들 죽이라고?
아니다. 양낭자가 무술로 동창과 싸우고 사람들을 죽이고 자기가 죽을 뻔하고...... 이 모두가
불도에 이르기 위한 방편이다. 양낭자는 절대고수인 동창고수가 도승에 의해 정신적으로 붕괴되고 미쳐서
벼랑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것을 본다. 동창고수가 미쳐버린 것은, 무슨 마귀같은 것이 보여서가 아니라,
숭고한 불도의 절대경지가 보여서 감당하지 못하고 미쳐버인 것이다. 양낭자는 무술같은 것이
의미 없음을 깨닫는다. 동창에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도 버린다. 그녀도 불도의 절대경지를 엿본다.
그녀는 불도에 귀의한다.
고성제는 양낭자가 낳아준 아이를 들고서 양낭자가 떠나는 것을 애타게 지켜본다.
무협영화로 말하자면 대하소설을 쓴 것이다. 그것도 결말은 형이상학적인 것에 이르는. 등장인물들도 아주 다양한
군상을 이룬다.
쟝르도 여럿 섞고. 기존 무협영화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하다.
영화도 계속 반전 반전 반전으로 이어지며 스릴을 자아낸다. 결투장면은 살벌하고 잘 안무되어 있으며,
대나무숲 결투장면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 고승으로 상징되는 불도의 절대경지까지...... 놀라운 이미지들이 속출한다.
홍콩무협영화의 최고경지라면 이 영화다.
추천인 5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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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되면 보고 싶네요
골든하베스트의 풍족한 자금과 인력지원(성룡, 홍금보, 원표까지 이영화에 나왔었죠...?) 등으로 고급진 영화로 완성되었으니까요.^^
호금전 감독이 좋은 영화를 만든것도 있지만, 골든하베스트도 많이 배웠을듯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