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 (1991) 임권택+김용옥=수작? 범작? 스포일러 있음.
** 종교에 대해 잘 모르고, 종교에 대한 글이 아니라 그냥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존칭은 생략합니다. **
임권택이 "국민거장" 대우를 받을 무렵 그리고
김용옥이 "무서운 신예 철학자" 대우를 받을 무렵 그들이 손잡고 만든 영화다.
"한 시대의 정신을 짊어진 사내의 도망"이라는 캐치프레이즈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참 어마어마한 캐치치프레이즈다.
이런 어마어마한 영화, 우리나라 영화사에 있었던가?
그리고 주인공은 (내 생각에) 엉뚱하게도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었다.
동학의 창시자 1대 최제우나 독립운동을 하고 일제와 싸운 3대 손병희도 아니고 최시형이다.
배운 것 없고 컬러풀한 것 없고 화려한 업적이 없는 (최소한 내 눈에) 2대교주가 주인공인 영화라니 뭔가 비범해 보인다.
거장과 무서운 철학자의 만남 - 뭔가 엄청난 걸작이 나올 것으로 사람들은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범작과 수작 사이다. 개벽이 나온 다음, 임권택과 김용옥의 거장성(?)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이 사람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리는 식의 과대선전을 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사 홍보팀이 비난받아야겠지만)
일단 정신사나 철학적 종교적인 면은 별로 없다고 봐도 좋다. 이럴 거면 김용옥이 왜 각본을 썼는지 모르겠다.
그냥 역사물이다. 하지만, "한 시대의 정신을 짊어진 사내의 도망" 정도의 걸작이 아니었다는 것이지, 영화는 아주 감동적이다. 당시 한창 전성기였던 이덕화의 놀라운 연기가 이 영화를 지탱한다. 폭발적이고 강렬한 연기로 유명했던 이덕화는 이 영화에서 과묵하고 인내력 강하고 투박한 최시형을 아주 잘 연기해낸다.
보고 나니, 최시형을 주인공으로 했던 이유가 이해간다. 1대 최제우가 당국에 체포된 후, 최제우는 일체 음식을 거부하고 순교할 준비를 한다. 신도들은 운다. 암울했던 조선말, 민중에게 희망을 주던 동학은 창시자의 순교와 함께 휘청거릴 것이다. 동학이 지탱되기 위해서는 기둥이 필요하다.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그 자리를 버티고 온갖 탄압과 수난을 버텨낼 기둥이 말이다. 최제우는 엉뚱하게도 최시형을 2대 교주로 지명한다. 투박하고 말수 적고 배운 것 없고 겸손한 사나이다. 양반도 아닌 중인이다. 최시형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평생에 걸쳐 한다. 바로 "버텨내는 것이다."
조정에서는 끊임없이 그를 잡으려 한다. 최시형은 평생에 걸쳐 도망다닌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도 위험하다. 보통 사람같으면 정신이 피폐해지고 회의도 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보통사람이 아니다. 정신이 피폐해지는 일도 없고 회의를 가지는 법도 없다. 그는 평생에 걸쳐 순간순간을 치열하게 산다. 최제우가 정확히 사람을 보았다. 그는 도망을 다니면서 동학의 교세를 키운다.
엄청난 주제가 아니더라도, 이것을 감동적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이덕화의 열연은 정말 대단하다. 투박하고 진실해 보이는 소박한 얼굴이지만, 그 안에 굳건히 흔들리지 않는 바위가 있는 인물을 감동적으로 연기해내기가 얼마나 어려울까? 그것도 무려 동학의 교주다. 내 생각에 이덕화의 최대명연이 이 영화의 최시형역 같다. 별 대사 없이 내면연기만으로 이것을 설득력 있게 표현해낸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덕화는 연기천재로 그때 이름이 높았다. 이덕화의 장점은 지금도 그렇지만 폭발적이면서도 강렬하고 생동감 넘치는 연기였다. 영화에 자주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오는 영화마다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덕화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대사 적고 표정 적은 사람의 내면연기로 표현해야 할 것이 엄청 많았다. 그 배역이 무려 최시형이었다. 이덕화는 이 도전에 성공했다. 그는 대배우의 역량을 증명했다.)
영화 맨처음이 아주 효과적이다. 어느 누추한 작은 방의 문이 열리고 밖으로부터 패랭이모자를 쓴 장사꾼모양의 남자 하나가 들어온다. 오느라 힘들었는지 숨을 헉헉거리며 바닥에 눕는다. 바로 최시형이다. 그가 도망을 다니면서 교세를 확장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후 영화 내내, 그는 이것을 치열하게 버텨낸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영화 맨처음에 이 에피소드를 배치한 것이다.
이 안에 동학의 사상이나 이것이 조선시대 민중들에게 어떻게 파고들어 영향을 미쳤던가 보여주었다면 정말 걸작이라고 주저없이 말하였을 것이다. 척척철학자 김용옥이었다면 이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은 "치열함"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전기적 사실"뿐이다. 사람들 기대대로 "정신사에 대한 대하사극"이 나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최시형이 엄청난 거인이었다고 느끼게 된다.
이 영화는 최시형의 계속적인 도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안에 스릴이나 서스펜스같은 것은 없다. 이 영화는 최시형의 "버텨냄"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영화 후반부에 가서는 최시형의 "버텨냄"으로부터 신도들이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세를 과시하며 교주신원운동을 하자는 신도들, 동학혁명을 일으키자는 신도들이 나타난다. 이들이 대두되게끔 교세를 확장한 사람은 최시형이다. 최시형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학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최시형은 할 수 없이 동참을 명령한다. 하지만, (영화상으로는) 동학혁명을 한 지도자들은 동학혁명군이 폭도로 변하여 약탈을 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을 막지 못하게 된다. 범죄, 폭력, 약탈, 무질서 속에서 동학혁명지도자들은 어찌할 줄 모른다. 최시형이 옳았다.
동학혁명부분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약점이다. 예산제약 때문인지, 이 장면이 간략하게 좀 부실하게 되어 있다. 어찌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일 지도 모르는 데 말이다. 이것도 "최시형이 옳았다"하고 단정지어 치부해 버리는 것은 좀 문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각본에서, 최시형의 부인역으로 이혜영이 나와서, 최시형과 전부인-현부인의 삼각관계같은 소재가 나온 것도 좀 뚱딴지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 나오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영화의 중심주제들 중 하나로까지 하는 것은 좀 문제 같다. 이혜영이 당시 인기여배우였기는 하지만, 최시형의 부인역은 이 영화에서 딱히 중요하지 않은 배역같다.
동학혁명을 하려고 양지로 얼굴을 내밀었던 최시형은 당국에 붙잡혀 단두대에 오른다. 그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치열하다. 투박하고 겸손하다. 이 장면에서 커다란 감동을 느끼지 않기 어렵다. 평생을 동학 교세 확장에 바치면서 치열하게 살다가 늙어버린 최시형이 목이 잘리려 걸어가는 장면은, 지금까지 그의 불굴의 여정에 동참했던 관객들에게 감동을 준다.
(이 장면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덕화는 이 장면을 찍으면서, 베테랑 분장담당할머니에게 낚시줄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한다. 할머니가 왜 그게 필요하냐고 물었다. 이덕화는, 그 장면의 비장함을 살리려고, 최시형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연출하려고 그런다고 했다. 할머니는 탄복했다고 한다. 대배우의 열연이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임권택 영화답게 잠깐 잠깐 실소가 나오는 장면들이 있다. 하지만 웅장하면서도 거대하게 대형벽화를 그려내는 화가 같다. 영화 형식만 대하드라마가 아니라, 그 내용이나 비젼도 대하드라마다. 임권택이 대가라는 평가를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예산을 쏟아부은 대작이다. 무늬만 대하사극이 아니라, 본격적인 대하사극으로 손색이 없다. 이것도 다 임권택이 당시 거장감독으로 성가를 한창 드높이던 때였고, 사람들이 '거징 임권택감독이 이번에는 무슨 걸작을 내놓으려나'하고 기대를 크게 가졌던 때문이다. 커다란 돈이 모여들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추천인 7
댓글 8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이덕화 배우 대단한 분인데.. 좀 일찍 태어나셔서 한국 영화 르네상스 수혜를 덜 받은 게 아쉽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