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미센의 호수 (1966) 에절한 로맨스물. 스포일러 있음.
정통 멜로드라마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영화다.
코메디나 다른 요소들이 들어있지 않은 순수 멜로드라마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부문에 출품했었다는 말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일본적인 애절한 것을 잘 포장해서
최루성의 감동적인 예술품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눈에 띈다. 너무 의도를 갖고 영화를 만들다 보니, 자연스러움이 좀 덜한 것 같다. 서로 만날 듯 헤어질 듯하는 남녀 주인공의 감정선이 너무 작위적인 감이 있다.
하지만, 1960년대 일본 정통 멜로드라마 (장중하고 애절하고 깊이가 있는)의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런 영화 다른 데에서는 볼 수 없다.
교토 부근 비와호수와 요고호수가 무대다.
요고호수는 눈물의 호수라고 불린다. 바위로부터 물이 흘러들어와서 호수를 채운다. 마을사람들은 이것이 눈물이라고 한다. 그 호숫물을 이용해서 마을사람들은 비단을 짠다. 이 마을비단이 유명한 이유는, 사람들의 눈물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비단은 하도 유명해서, 일반적인 용도로 쓰이기보다는 샤미센의 현을 만드는 데 쓰인다.
어느날 요고호수 부근 비단을 만드는 공장에 사쿠라고 하는 아름다운 소녀가 취업을 온다. 소녀는 부모와 함께 살아와서 순수하고 착하지만 재능이 모자라고 평범하다. 머리 굴리는 것같은 거 못하고 외골수다. 아름다운 비단을 영롱하게 짜내는 단순반복작업이 소녀에게는 적성에 맞고 행복하다, 남들은 지겨워하는 비단 짜는 일을,
한 올 한 올 아름다운 비단실이 나오는 광경이 좋아서 신나게 일하는 타입이다. 이 영화에서 공들인 부분이
사쿠에 대한 묘사다. 사랑이니 이별이니 하는 것보다, 투명한 진주같은 소녀 사쿠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데 대한 묘사다. 그리고, 그 사쿠가 하는 누에와 뽕잎으로부터 아름다운 비단실을 뽑아내는 데 대한 묘사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렇다. 이것은 분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업이다.
하지만 이것은 "남의 눈물"이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남의 행복"이 아니라.
이것은 사쿠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누에고치로부터 아름다운 비단실을 짜내며 노는 소녀 사쿠를 세상에서 그낭 놓아둘 리 없다.
우키치라는 소년이 사쿠가 일하는 비단공장에 취업한다. 우키치도 미소년이다. 사쿠와 짝이 잘 맞는다.
우키치는 강단있고 영리하고 성실하다. 자기도 돈을 모아 비단공장을 세우고야 말겠다고 술 한 잔 안 마신다.
사쿠와 우키치는 콤비를 이뤄 비단실을 누에고치로부터 짜 낸다. 영롱한 비단실을 짜내며 뛰노는 소녀 사쿠를 보고 우키치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아름다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았으련만.
우키치는 러일전쟁에 징집된다. 가면 죽는 전쟁이다. 사쿠는 전쟁터에 가는 우키치를 읍내까지 따라간다. 우키치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순간이라, 자기 마음을 사쿠에게 털어 놓는다. 사쿠도 우키치를 기다리기로 한다. 뭐 당시에는 이런 일이 흔했으리라. 영화톤이 굉장히 애절하고 품위 있고 산뜻하다.
감정에 몰입하지 않으면서도 애절한 우아함을 갖고 있다고 할까. 1960년대 전성기 일본고전영화의 특징이다.
사쿠와 우키치가 헤어지는 장면도 신파조나 센티멘털리즘이 전혀 없다. 하지만, 사쿠와 우키치의 에절한 마음이 잘 느껴진다. 이 맛에 일본 고전영화를 본다.
가쿠는 우키치가 떠난 후에도, 비단실을 자아내며 열심히 일한다. 이것이 그녀의 성격이다.
그러던 어느날, 교토로부터 유명한 샤미센선생이 방문하게 된다. 인격자에다가 사회적 권위와 부 그리고 일본 제일 가는 예술적 기량을 다 보유한 사람이다. 마을사람들 전체가 나가 마중하고 파티를 열어준다. 그때 샤미센선생의 눈에 잡일을 하는 사쿠가 들어온다. 샤미센선생은 노랗고 청초하고 수수한 달맞이꽃이라는 곡을 작곡해낸다.
샤쿠가 주인공인 음악이다. 샤미센선생은 공장주인에게 부탁해서 사쿠를 교토에 제자로 데려가려고 한다. 착한 공장주인 부부는, 사쿠에게 좋은 기회가 생겼다고 좋아하면서 수락한다. 사쿠는
"전, 예술이니 음악이니 하는 거 몰라요. 하녀일이라면 즐겁게 잘 해드릴 수 있는데......"하면서 따라나선다. 평생 깡촌에서만 살았던 사쿠도 교토에 가 보고 싶다.
이 영화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우키치와 샤미센선생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쿠의 이야기다.
우키치조차도 조연이다. 영화 마지막까지 사쿠는 소녀다. 남녀 간의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모른다. 우키치는 자신이 비단공장을 만들고 성공하는 데 동반자로서 사쿠를 원한다. 우키치와 함께 한다면, 성공적이고 소박하지만 충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샤미센선생은 예술가로서 늙어가고 있다.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지만, 예술가로서 삶을 향락하는 사람으로서 이미 장님이 되어가고 있다. 그도 인격자라서, 사쿠에게 뭘 강요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사쿠가 아무리 자기 마음을 못 알아먹어도, 여전히 관대하고 사쿠에게 모든 것을 해주려 한다.
소녀였던 사쿠는, 샤마센선생의 성숙한 사랑을 통해서 남녀 간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영화는 사쿠가 샤미센선생을 따라 교토로 가면서 재미가 좀 줄어든다.
비단공장 소녀였던 사쿠는 참 아름답게 그려졌는데, 교토의 미녀이자 예술가의 뮤즈로서의 사쿠는 그냥 미녀다.
하지만, 비단공장에서 일하든, 교토에서 샤미센 학생으로 호화로운 삶을 누리든, 사쿠는 늘 사쿠다. 한결 같다.
이것이 우키치도 샤미센선생도 끝까지 사쿠를 사랑했던 이유이리라.
사쿠는, 자기에게 뭘 아떻게 강요하지 못하고 괴로워만 하는 샤미센선생에게 섹스를 해 준다. 하지만,
그 이후 샤미센선생을 떠난다. 샤미센선생은 사쿠의 노란 달맞이꽃을 꺾은 대신,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된다. 샤미센선생은 땅을 치고 후회한다. 사쿠는 쿄토생활을 청산하고 요고호수로 돌아온다. 그리고, 우쿠치와 단 둘이서 결혼을 한 다음 첫날밤에 우키치와 섹스를 한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우키치가 본 것은, 천장에 목을 매고 자살한 사쿠의 모습이었다. 이것이 약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쿠는 왜 두 사람 모두를 받아들인 후, 자살을 해야 했던가?
어쩌면 일본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가는 일일 지도 모르겠다. 영화 내용 상, 사쿠는 순수하고 맑은 소녀이기는 해도 머리가 복잡하게 잘 돌아가는 사람은 아니다. 감정이 굉장히 복잡하고 섬세한 사람도 아니다.
그런 그녀가 왜 이렇게 복잡하고 섬세한 사랑의 방식을 택하는가? 여기에 대해 별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결말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영화 내내 설득력 있는 빌드업이 필요했었을 지 모르겠다.
우키치는 목 놓아 울면서 나무관 안에 사쿠를 넣어 요고호수에 던진다. 눈물의 호수만큼, 사쿠가 묻힐 장소로
적합한 곳은 없다. 우키치는 사쿠의 관을 던져 넣으려다가, 잠깐 생각하더니 자기도 관 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두 사람을 실은 관은 호수 및바닥으로 갈아앉는다. 아름다운 소녀 사쿠는, 샤미센선생과 우키치로부터 불타오르는 사랑을 받았고 그 결과 죽음을 선택했다. 하도 압도적인 장면이라서, 빌드업을 잘 해서 엄청난 감동을 자아냈으면 좋았으련만.
하지만, 일본영화 특유의 애절함이 극대화된 장면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요고호수는 두 사람의 무게만큼 눈물을 보탰고, 이제 더 아름다운 비단을 자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쿠와 우키치의 사랑은, 길고 긴 요고호수의 역사 속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사건일 지도 모르겠다.
사쿠역을 맡은 여배우가, 사쿠역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닌가 싶을 이미지의 미녀다. 이 영화 성공에 엄청난 기여를 한 사람이 바로 이 여배우다. 이 영화 속에서 빛나는 사쿠의 청순가련한 이미지는, 이 여배우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은, 이 슬픔들을 가라앉히고 정제시켜서 아름다운 비단의 형태로 세상에 탄생시키는 요호고수의 광대한 이미지다. 어찌나 큰 지 바다로 착각되었다던 요고호수. 사쿠와 우키치가 호수 속에 가라앉는 마지막 장면은, 일본 탐미주의 영화의 극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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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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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영화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완전 딴 영화 되겠군요. 각하.
뭔가... 이해하기 힘든 일본의 사생관을 다룬 영화네요.
직접 봐야할 것 같습니다. 소개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