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차연못 (1979) 일상이 되어 버린 신화. 스포일러 있음.
야차연못은 참 이상한 영화다.
고대 전설이야기를 하는 듯하면서도 무대는 현대다.
어느 탐험가가 사막같은 황무지를 넘어 고대의 집들을 지나간다. 갈대를 엮어 지붕을 만든
일본 고대의 집들 말이다. 유적들을 지나간다는 말이 아니라, 고대의 시간 속을 떠돈다는 말이다.
마치 오늘날 현대의 여행자가 조선시대 민가들을 지나간다는 것과 같다. 환타지 아니면 시간여행물처럼 시작하는데,
아무 설명 없이 이것이 일상인 것처럼 보여준다. 굉장히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뭔가 몽롱하면서도
환상적이고 동시에 지극히 일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영화는 처음이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물을 찾는다. 그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너무 땀을 흘리고 괴로워하기에 금방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마치 파리 한 마리 지나가는가 생각하는 듯 무심히 그를 바라본다.
그의 갈증과 고난이 하도 격렬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그것이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는 어느 신비로운 샘가에 다다라서 물을 마시고 단번에 갈증을 씻어낸다. 이 영화에서, 탐험가의 갈증은
샘가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괴로움을 단번에 초월하게 만드는 그 환상의 샘물에서 이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탐험가는 그 샘물에서 물을 긷고 있는 여자를 발견한다. 여자는 옛날이야기에 나올 법한
조용하고 수줍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 인물은, 마치 일본 노에 나오는 여장남자배우처럼,
여자를 흉내내는 남자배우다. 중성적이다. 이것도 아주 인상적이다. 여기에서 청초한 미녀배우가 등장했더라면
그냥 전설이나 민담을 그린 영화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여장남자배우가 나와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이상한 연기를 펼친다. 존재가 뭔가 함축적인 의미를 지닌 수수께끼같은 느낌을 준다.
홍상수감독 영화 주인공들이 오늘날 옷을 입고 오늘날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무대는 동굴 속
그리고 곁에서 호랑이와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있다는 식이다.
영화는 가부키 무대를 연상시키는 장식적이고 화려한 공간을 활용한다. 영화 전체가 연극 같다.
탐험가는 자기처럼 이곳에 탐험을 왔다가 아까 그 여자를 만나 결혼해서 여기 눌러앉은 친구를 만난다. 바깥세상에서는 행방불명 처리된 사람이다. 자기도 몇년 전 여기 왔더라면 똑같은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도 의미심장하다.
신비한 여자와 만나 신비한 일을 하는 종지기가 된 남자는 탐험가의 mirror image 다.
친구는 늘 정해진 시간에 종각에 나가서 종을 친다. 안 그러면 능선을 몇번 넘어가면 있는 거대한 야차연못이
능선을 넘어 마을을 덮친단다. 탐험가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그러더니 또 무대가 갑자기 바뀐다. 야차연못 속이 무대다. 그리고 용왕공주와 신하물고기들이 등장한다.
아주 현실적인 것처럼 영화가 전개되다가 갑자기 전설 속 인물이 나오고 고대세계가 무대인 듯 한데
또 일상이 나오고 이런 식이다. 야차연못에 갇혀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공주는 훨훨 승천하고 싶다.
하지만 야차연못이 마을을 덮치기 전까지는 여기 갇혀 있어야 한다. 세계관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확 바뀐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주인공이 희미해진다. 종지기와 그 아내의 비극적 이야기가 주제인 것처럼 느껴졌는데, 연못에 갇혀 사는 용왕공주가 강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평범한 영화였다면 "왜 오락가락해?"하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신비한 영화에서는 이것이 맞는 어프로치다. 영화 속 세계는, 아귀가 맞고 논리적으로 일관성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래서는 안되는 세계다.
야차연못을 달래기 위해 인신공양을 결심하는 마을사람들. 인신공양을 하기 적합한 인물은, 마을바깥에 사는
외로운 종지기부부다. 자기들이 희생하기 싫은 마을사람들은, 자기합리화에 자기최면을 억지로 걸며,
종지기의 아내가 인신공양의 희생물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억지로 억지로 갖다 붙인다. 그리고 한꺼번에 몰려와서 부부를 이지메하며 스스로 자결하도록 만들려 한다. 어리석고, 이기적이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지만 한 데 몰려서는 폭력적이고 가혹한 마을사람들. 자기들은 그렇게 죽기 두려워 벌벌 떨면서 남에게는 용감하게 자살하라고
욱박지르며 강요하는 마을사람들이다. 딱 일본의 공동체문화를 표적으로 한 것이다.
종지기가 "내가 종을 울려 당신들이 무사한 것이다."라고 항변해도 듣지 않는다. 어리석은 마을사람들이
종지기부부를 마침내 죽이자, 야차연못이 능선을 넘고 넘어와서 마을을 덮친다.
이것의 특수효과가 대단하다. 잠깐 사이에 덮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것 하기를 기다렸다"하는 식으로
상세하고 길게 엄청난 츠나미의 스케일을 재현해낸다.
그리고 탐험가 혼자 남는다. 이구아수폭포에서 찍었다는데, 갑자기 현대가 되어 버린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꿈이었던가? 아래를 굽어내려다보아도, 신비한 마을도 친구도 그 아내도 어리석은 마을사람들도 다 같이 엄청나게 큰 연못 안에 잠겨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그리고 발 아래는, 넓게 펼쳐진 평평한 수면이 무한히 뻗어있다. 남은 것은, 신비라고는 1도 없는, 지루한 현대뿐이다. 신화니 전설이니 신비함이니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신비하면서도 매력적인 영화다. 관객들은 탐험가에 감정이입한다. 그가 겪는 신비한 세계에 매혹된다.
우리의 일상이 갑자기 신비한 세계가 되어 버린다면? 이 아이디어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 영화의 장점은 바로, 이런 신비하면서도 몽롱한 공간을 아주 흡인력 있게 생생하게 만들어냈다는 것이리라.
일상이면서도 동시에 신화적인 그런 공간 말이다. 관객들이 여기 빨려들어가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설득력 제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처음 시작할 때 탐험가가
일본 고대시대 집들을 헐떡이며 지나갈 때무터 강한 자장을 가지고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그리고, 주인공 탐험가의 관찰자적 시점 그리고 종지기 친구의 신화적인 인물 연기 다
훌륭하다.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야차연못이 마을을 찾아오는 장면은 일본특촬기술의 절정적 장면이다.
추천인 4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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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일본 영화들은 정말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 수준 이하의 애니 실사화 아니면 힘을 못쓰는 침체된 일본영화계와 비교하면 뭔가 씁쓸하기까지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