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의 걸작 <녹색 광선>(1986) 리뷰- 사소한 일상 속에서 불현듯 다가온 은총의 순간 (스포 있음)

(이 글은 애초에 글의 형태로 작성해서 말투가 이런 것이니 양해 부탁드려요.)
(에릭 로메르 특별전에서 상영중인데 에무시네마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네이버 시리즈온과 티빙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향해 영화 전체가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엔딩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글에는 엔딩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으므로 그것을 감안해서 읽어주기를 바란다.)
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의 한 장면
프랑스 누벨바그의 거장 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1986)은 1986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으로 ‘희극과 격언’ 시리즈 중의 한 편이다. 시나리오가 없이 즉흥적으로 연출된 이 영화는 로메르 특유의 아마추어리즘이 절정의 미학으로 승화된 걸작이다. 바캉스 시즌을 잘 보내고 싶은 한 외로운 여성의 여정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하는 이 영화는 종국에는 우리에게 삶의 은총과도 같은 감동적인 순간을 선사한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마리 리비에르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빛을 발한다.
지금은 많이 대중화됐다고 보지만 <녹색 광선>은 로메르 특유의 일기체 형식의 영화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로메르는 이미 ‘도덕 이야기’ 시리즈 중 <클레르의 무릎>(1970)을 통해서 일기체 형식의 영화를 선보인 바 있다. 일기체 형식의 영화는 영화 한 편이 마치 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형식으로 구성된 것을 뜻한다. 일기인 만큼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한 개인의 내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영화에는 일기를 읽는 것처럼 영화의 중간 중간에 날짜가 들어간 자막이 삽입된다. 각각의 날짜에 할당되는 영화의 분량은 일정하지 않다. 어떤 날은 한 두 컷 정도로 보여주는 데 그치는 반면에 어떤 날은 몇 분을 들여서 자세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녹색 광선>은 델핀의 일기장과 유사한 구성으로 전개된다. 영화는 본격적인 여름 휴가가 시작되기 얼마 전부터 시작해서 델핀이 비아리츠 역에서 만난 한 남자와 함께 생장드뤼즈에 있는 해변에서 일몰을 보는 날까지의 여정을 담는다. 중간 중간에 들어가는 날짜 자막의 색깔은 영화의 제목을 반영한 듯한 녹색이다. 카메라는 델핀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잠시 잠깐 다른 사람의 시점이 될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델핀과 근 거리에 있는 사람으로 한정된다. 우리는 이러한 일기체 형식을 통해 델핀의 내면을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녹색 광선>을 장르적으로 구분해보자면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드라마의 중간 지점쯤에 놓여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로맨틱 코미디와 같이 남녀 간의 관계를 가벼운 터치로 그려내는 면이 있으며 델핀이 시종일관 한 남자와의 만남을 갈망하는 모습을 보이며 결국 한 남자와의 낙관적인 미래를 암시하면서 영화가 끝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멜로드라마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류의 영화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으며 굳이 명명을 해야 한다면 ‘로메르 장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해보인다. 이 영화에서 큰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 영화는 여름 휴가를 잘 보내고 싶은 델핀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이다. 심지어 델핀의 일상도 델핀의 구체적인 행동들을 통해서 묘사된다기보다 수많은 말들을 통해 형상화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영화는 델핀과 그녀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간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대화 내용을 통해 관객은 델핀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녀의 내면 또한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델핀의 내면에서 벌어진다. 로메르의 지적이고 삶에 대한 통찰로 가득 찬 대화들을 통해 관객이 델핀의 내면으로의 여정에 동참하면서 델핀이 어떤 선택들을 해나갈지를 지켜보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요컨대 <녹색 광선>은 델핀의 내면의 풍경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인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인 ‘녹색 광선’은 쥘 베른의 소설에서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이 소설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소설에는 자연 현상 중의 하나로 일몰때 빛이 굴절되어 나타나는 녹색 광선을 보게 된다면 자기 자신과 상대방의 진실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델핀은 우연히 비아리츠 해변을 걷다가 몇 명의 노인들이 ‘녹색 광선’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엿듣게 되고 그녀의 일상에서 녹색 광선을 보는 것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된다. 그녀는 영화 내내 그녀를 쫓아오는 남자나 우연히 만나게 된 남자를 모두 거부한다. 그녀가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고 싶은 남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그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마음에 들어할 남자가 나타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리고 결국 우연히 비아리츠 역에서 만난 남자와 함께 간 생장드뤼즈에 있는 해변의 언덕에서 일몰의 순간 녹색 광선을 보게 되고 그녀가 만나게 된 남자가 그녀가 그렇게 찾아 헤맸던 그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델핀이 파리에 있다가 다른 지역에 있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끝에 결국 생장드뤼즈의 해변에 이르는 여정은 일상에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개입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사유할 여지를 준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 델핀이 비아리츠 역에서 만난 남자와 함께 녹색 광선을 보게 되는 감동적인 순간은 영화 내내 우울하고 외로웠던 그녀에게 예기치 않게 어떤 은총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 그녀는 녹색 광선을 보기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녹색 광선’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듣고 바로 일몰을 기다리며 녹색 광선을 보려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어떤 소망만을 품고 있었으며 순간 순간 그녀 본인의 자유의지로 올바른 선택을 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선택들을 통한 발걸음이 종국에는 그녀를 어떤 은총의 순간으로 이끈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성경에서 나오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개역)라는 구절마저 떠올리게 만든다. 델핀이 녹색 광선을 보게 되는 여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녀의 삶에서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그녀를 그 곳으로 이끌었다는 논리가 더 타당해보인다.
이 영화에서 비아리츠에 있는 해변에서 노인들이 녹색 광선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 로메르는 일몰의 과정을 마치 일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이 실제로 찍은 일몰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이것은 영화의 엔딩에서 반복된다. 로메르는 이 장면에서 녹색 광선을 보기 위해 일몰을 보고 있는 델핀과 그녀가 비아리츠 역에서 만난 남자와 같은 위치에 관객을 놓는다. 그들이 보는 것을 관객도 그대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이 일몰 장면의 마지막 순간에 화면에 녹색 광선이 나타난다. 델핀과 한 남자와 같이 숨죽이고 집중해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해가 수평선 밑으로 사라지는 순간에 잠시 나타나는 녹색 광선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과 관객이 완전히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이례적이며 경이적인 일일 것이다. 로메르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로 관객에게 녹색 광선을 실제로 보여주며 델핀에게 도래한 은총의 순간을 관객에게도 똑같이 선사하는 기적을 보여준다. 결국 녹색 광선을 발견하고 환호를 하며 감격에 젖은 델핀의 마지막 표정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신의 은총은 존재한다. <녹색 광선>은 그 자체로 ‘기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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