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건: 매버릭' 간단 리뷰(feat. CGV영등포 스크린X관)
1-1. 이제와서 고백하자면, 나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보다 그의 동생 토니 스콧의 영화를 좋아한다. 형과 마찬가지로 CF 감독 출신인 토니 스콧은 1970년대 스콧 프리 프로덕션을 함께 창립하고 영화를 만들었다. 1944년생인 토니 스콧은 형과는 7살 차이다. 살아있었다면 그 역시 80살을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됐을 것이다. 나이 얘기를 굳이 꺼낸 이유는 토니 스콧의 영화는 형보다 훨씬 젊은 감각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리들리 스콧이 묵직한 세계관을 담은 SF영화나 진중한 시대극을 만드는 반면 토니 스콧은 속도감이 있고 가벼운 영화들을 만들었다. 여기서 '가볍다'는 말은 영화적 가치가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관객이 즐기기에 더 부담이 없다는 의미다. 그의 1986년작 '탑건'은 토니 스콧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이다. 그 직전작인 1983년작 '더 헝거'는 영국에서 제작된 뱀파이어 영화다.
1-2. '탑건'의 장점은 붉은 석양빛을 한껏 살린 영상과 전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일렁이는 하늘, 여기에 속도를 더해주는 편집과 촬영에 있다. '속도'는 토니 스콧의 가장 큰 무기다. 그는 1990년작 '폭풍의 질주'에서도 속도감 넘치는 카레이싱 장면을 연출했다. '크림슨 타이드'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잠수함 내부에서 펼쳐짐에도 불구하고 속도감 넘치는 편집과 촬영으로 긴장을 고조시켰다. 속도가 필요하지 않은 장르의 영화에서도 그는 속도를 한껏 살렸다. 긴장감을 높여주는 건 속도라는 원칙이 있었던 모양이다. 속도와 함께 토니 스콧은 원색의 색감을 좋아했다. '크림슨 타이드'의 붉은 조명이나 '마지막 보이스카웃'의 조 헬렌백(브루스 윌리스)이 춤을 추던 전광판의 조명, '더 팬'이나 '트루 로맨스'에서 보여준 원색의 질감은 토니 스콧의 인증마크처럼 세련미를 더했다. 심지어 그는 유작인 '언스토퍼블'에서도 속도와 색감을 살려 영화를 만들었다. 토니 스콧의 이런 속도와 색감은 가볍고 단순하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와 만나 그 매력을 한껏 살렸다.
1-3. '탑건'이 36년만에 속편으로 돌아왔다. 토니 스콧은 세상에 없지만, 언제나 청춘인 톰 크루즈가 자신만의 사단을 이끌고 '탑건'을 부활시켰다. 솔직히 나는 '탑건: 매버릭'에 대해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1974년생 젊은 감독인 조셉 코신스키가 자신보다 30살 많은 감독이며 'CF 출신 영화감독'의 표본이자 교과서같은 토니 스콧의 아성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 넘치는 속도감과 세련된 촬영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탑건: 매버릭'은 처음부터 전작을 따라잡을 생각이 없었다. '탑건: 매버릭'은 '탑건'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탑건: 매버릭'의 이런 선택은 진정 토니 스콧에 대한 '리스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토니 스콧처럼 영화를 찍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바에 '탑건'의 유산을 자기 식대로 '잘' 만들어서 헌정하는 게 진정한 존경이다. 조셉 코신스키에게 한 수 배우고 간다.
2. '탑건: 매버릭'은 아직도 현역에서 뛰고 있는 피트 '매버릭' 미첼(톰 크루즈)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상부의 명령으로 노스 아일랜드에 있는 파일럿 사관학교 탑건으로 향한다. 이미 그는 해군에 낙인이 찍혀 곧 퇴역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를 소환한 사람은 한때 동료이자 현 해군제독인 톰 '아이스맨' 카진스키(발 킬머)다. 피트에게 부여된 임무는 작전에 투입될 젊은 파일럿들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피트가 가르쳐야 할 파일럿 중에서는 한때 그의 동료였던 구스(안소니 에드워즈)의 아들 브래들리 '루스터' 브래드쇼(마일즈 텔러)도 포함돼있다. 피트는 이미 죽은 구스의 아내 캐롤(멕 라이언)의 부탁으로 그를 파일럿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사관학교에 여러번 낙방시켰다. 이 때문에 브래들리는 피트를 원망하고 있다. 젊은 파일럿들과의 불편한 관계와 상부로부터의 압박 속에서 피트는 파일럿들을 훈련시켜 작전에 투입해야 한다.
3. '탑건: 매버릭'의 이야기를 요약했지만, 사실 이게 큰 의미는 없다. 애시당초 이 영화는 이야기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탑건: 매버릭'의 플롯은 전작 '탑건'과 거의 똑같다. '젊은 파일럿들이 훈련을 받아 작전에 투입돼 우여곡절 끝에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한다'. 이 간단한 문장은 '탑건'과 '탑건: 매버릭'을 모두 관통하고 있다. 다만 '탑건: 매버릭'은 36년전의 유산을 계승하는 만큼 인물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할 것이 많다. 피트와 톰 사이에 그 동안의 관계, 피트와 브래들리의 관계, 피트와 페니(제니퍼 코넬리)의 멜로 서사, 브래들리와 제이크 '행맨' 세라신(글렌 파웰)의 라이벌리, 그 밖에 팬보이(대니 라미레즈), 피닉스(모니카 바바로), 페이백(제이 엘리스), 밥(루이스 풀먼) 등 주변 캐릭터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 이것들 중 대부분은 전작 '탑건'도 해결해야 하는 숙제였다.
4. 그러나 '탑건: 매버릭'은 36년전의 유산까지 어우러지면서 숙제가 좀 더 많아졌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탑건: 매버릭'은 이런 숙제에 대해 최다한 간결하게 정리해버린다. 소모하게 되는 캐릭터는 소모하게 내버려두고 설명이 부족한 관계는 부족한대로 넘어가버린다. 심지어 파일럿들의 목표가 되는 우라늄 생산기지도 어느 나라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가상의 국가를 세우더라도 자칫 어느 문화권을 참조할 수 있기 때문에 아예 적국의 아이덴티티를 지워버려서 정치적 여지를 삭제시킨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국기로 정치색을 씌워버린 중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다). 그 대신 훈련과정과 실전에서 보여지는 전투기 액션에 공을 들인다. 영화에서 이야기가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야기가 중요한 관객에게 '탑건: 매버릭'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할 수 있다.
5. 그 대신 전투기 비행장면에서는 영화의 야심이 제대로 드러난다. 나는 조셉 코신스키가 이렇게 '진짜'에 대해 강한 욕망이 있는 줄은 몰랐다. '트론: 레거시'와 '오블리비언'을 찍을 때만해도 그의 독특한 SF세계가 참 마음에 들었다. '온리 더 브레이브'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 '소방뽕'이 차오르는 영화였다. 그렇다고 그 영화에 진짜로 산불을 낼 일은 없었다. '탑건: 매버릭'은 엄밀히 말하면 톰 크루즈의 욕망이 반영된 영화다. 조셉 코신스키는 그 욕심에 보조를 맞춰준 수준이다. 그래서 이건 '조셉 코신스키의 영화'가 아니라 '톰 크루즈의 영화'라고 불러야 할 수준이다. 영화 역사에서 배우가 영화를 지배해버린 사례는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히트'라는 영화에 대해 마이클 만의 이름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건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의 영화다. '톰 크루즈의 영화'라면 '미션 임파서블' 프렌차이즈나 '잭 리처' 정도가 있다(좀 더 양보하자면 '나잇&데이'나 '엣지 오브 투모로우'도 '톰 크루즈의 영화'다).
6. 재미있는 점은 36년전 영화 '탑건'은 '톰 크루즈의 영화'라는 인증을 받지 못했다(1986년 당시는 톰 크루즈는 라이징 청춘스타였고 토니 스콧은 앞서 언급한대로 첫 할리우드 데뷔작이다). 그가 대스타가 돼버린 지금에서야 '탑건'이 '톰 크루즈의 영화'로 기억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탑건'은 제리 브룩하이머와 돈 심슨의 영화였다. 시간이 흘러 토니 스콧이 할리우드의 거장이 되고 '탑건'은 '토니 스콧의 영화'가 됐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 '탑건'은 '톰 크루즈의 영화'가 될 수 있었다. '탑건'이 톰 크루즈의 프렌차이즈가 될 수 있었던 건 그의 현재 위치와 영향력을 보여준다. 최근 배우 안소니 마키는 현재 할리우드 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현재의 관객들은 '아이언맨이 나오는 영화'나 '캡틴 아메리카가 나오는 영화'를 보러 갈 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나 크리스 에반스가 나오는 영화를 찾지는 않는다는 말이었다. 톰 크루즈는 할리우드에서 여전히 티켓파워를 과시할 수 있는 '마지막 무비스타'다. 한때 그가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다른 유니버스의 아이언맨을 맡을 거라는 루머가 돌았었다. '탑건: 매버릭'을 보고 새삼 느꼈는데 나는 그가 MCU 근처에 얼씬도 안했으면 좋겠다. '톰 크루즈의 영화'는 MCU라는 거대한 프렌차이즈와 맞짱을 뜰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마치 '케빈 파이기와 MCU'라는 제국군에 맞서는 저항군의 수장처럼 보인다.
7.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은 '톰 크루즈의 영화'란 대체 무엇일까? 1962년생 톰 크루즈는 한국 나이로 곧 환갑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짜를 고집한다. 이제는 CG가 모든 것을 대신하고 심지어 조만간 로봇이 스턴트를 할지도 모르는 시대에서 그는 진짜로 전투기를 몰고 뛰고 달린다.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에서 도시의 지는 석양을 향해 전력질주하는 톰 크루즈의 뒷모습은 묘한 감동을 줬다. 진짜를 고집하는 그 장인정신이 진하게 느껴진 장면이었다. '탑건: 매버릭'은 그 장인정신이 또 한 번 정점에 이른다. 구스와 똑같이 생긴 아들 브래들리와 포옹하는 마지막 장면은 '탑건' 전편을 연상시킨다. 만약 구스가 죽지 않았다면 그는 구스와 그렇게 포옹을 나눴으리라. 그리고 낡은 비행기를 타고 페니와 하늘을 나는 모습은 파일럿 피트의 마지막 모습이자 '탑건'의 주연배우 톰 크루즈가 36년전의 영화와 이별하는 방식이다. 톰 크루즈는 한 번 더 온몸을 써서 영화를 만들고 캐릭터와 이별한다(이래놓고 '탑건3'이 나오면 그 배신감은 '토이스토리4'와 맞먹을 것 같다).
8. 진짜를 고집하는 그의 방식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드니 빌뇌브 같은 몇 명의 영화감독과 맥락을 같이 한다. 현대의 관객들은 마블영화가 표현하는 무한한 세계나 CG로 구현한 공룡에 익숙하다. 그러나 사실 관객의 마음 속에는 그것이 여전히 가짜라는 걸 잘 알고 있다. CG와 영화 사이에서 타협하는 감독들도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레디 플레이어 원'을 만들면서 CG의 세계 안에 오버룩 호텔을 구현하고 마틴 스콜세지는 '아이리시맨'으로 미국식 갱스터 영화의 숨통을 끊기 위해 디에이징 기술을 활용한다. 누군가는 기술과 타협을 하고 그것을 활용할 때, 누군가는 진짜를 고집하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든다. '탑건: 매버릭'이 구현하는 '진짜'는 20세기 영화를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는 반갑다. 그런데 타협을 모르는 그 고집은 이젠 진짜 무서워지기도 한다. 여전히 관리를 잘한 청춘인 톰 크루즈지만, 이젠 진짜 60살이다. 동갑내기인 밥 오덴커크도 총과 무기의 힘을 많이 빌린다. 웨슬리 스나입스도 에디 머피랑 어울려다니며 코미디 영화 찍는다. 양자경과 양조위는...아오, 난 모르겠다. '탑건: 매버릭'을 보고 나니 톰 크루즈 팬들의 심정을 알겠다. 이 고집스런 무비스타가 진심으로 자연사했으면 좋겠다.
9. 결론: '진짜'를 고집한 톰 크루즈의 장인정신은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토니 스콧에 대한 리스펙까지 잊지 않아줘서 감사하다. 안소니 마키의 말마따나 이제 더 이상 할리우드에 무비스타는 없을지도 모른다. 톰 크루즈는 그 이름만으로 여전히 흥행이 보장된 할리우드의 마지막 무비스타다. 이 배우, 정말 오래 보고 싶다.
(수전증이 있어서 잘 안 나온 파노라마 사진)
(그나마 쨍한 사진)
추신) CGV영등포 스크린X관 리뷰
- 동네극장에 대형관(스타리움)이 있는 건 좋은 일이었다. 거기서 봤던 많은 영화들('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2012',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사바하', '극한직업'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그런데 새롭게 바뀐 스크린X는 극장이 좁아졌다. 상영관 내벽을 덧씌우고 좌석 간격이 조금 넓어졌으며 프라이빗 박스가 생긴 탓으로 보인다. 좁아진 상영관을 보자마자 "스타리움으로 수지타산이 안 맞았구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CGV피셜) 스크린X에서 좌우 스크린은 보라고 있는 화면이 아니라 시야의 확장감을 체험하라고 있는 화면이다. 그런데 시야의 확장감을 체험하기에는 중앙 스크린 상하단에 레터박스가 거슬린다. 이건 마스킹의 문제가 아니라 스크린 크기를 꽉 채우지 못한 문제다. 스크린 비율을 정확하게 계산하지 못해 저기에 맞는 화면비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일반적인 화면비로 영화를 틀었다가는 상영관이 의도한 확장감을 온전히 채우지 못할 수 있다.
- 기분탓인지 모르겠는데 소리가 뭉개진다. 영화 시작 전 나오는 스크린X 소개영상에서도 나레이션이 나오는데 속으로 "어머, 얘 저기야. 쟤가 지금 뭐래는 거니?"라고 생각했다(이럴거면 CGV용산아이파크몰 4DX관에서 틀던 '빈체로~'나 틀 것이지). 영화 소리도 다소 뭉개진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여기서 한국영화를 보면 어떨지 궁금하다. 대사가 제대로 들릴까?
- 어쨌든 새로 만든 극장이라 깔끔하긴 하다. 그리고 다른 스크린X관에 비하면 크다. '초대형 스크린X관'이라는 메리트는 분명히 있다. 그런데 많은 관객들의 예상대로 자리 영향은 분명히 받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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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체로~~'ㅎㅎㅎ^^
1-3 부분이 참 공감되네요 ㅎㅎ 저도 가까운 영등포에 이런 대형관이 리뉴얼해서 좋은데 여러모로 좀 아쉬움은 있더라구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