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 <킹덤 오브 헤븐>의 유신론적 분석
영화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을 2달 전에 극장에서 보고 감명받아 쓴 뻘글이네요.
주관적인 분석글이니, 비평이나 태클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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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성향도 성향이고, 작중 종교 비판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인터넷의 많은 리뷰, 감상평 등이 <킹덤 오브 헤븐>을 종교까기 영화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은연중에 유신론적 사상을 기반으로 드러냅니다.
즉 이 영화는 종교에 대한 비판이 대주제가 아닙니다. 신과 신앙을 가진 인간에 대한 고뇌가 중점이죠..
1. 주인공 발리앙과 성경 모티브
아이를 사산한 아내의 자살로 슬픔에 잠겨
신앙을 잃고 신을 찾아 헤매는 인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캐릭터는 성경의 모티브가 굉장히 많습니다.
1)
화염구덩이에서 아내의 유품을 건지다가 생긴 손의 화상(성흔), 스티그마. 심지어 유품도 십자가입니다.
2)
동생을 불타는 검으로 죽여 살인의 죄를 짓는 발리앙. 이건 영화상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이죠. (카인과 아벨)
3)
그리고 바다에 표류해 물에 빠집니다. (세례)
4.
이후에는 우물을 파서 황야에서 물을 얻고(광야에서 샘솟는 물), 척박한 땅을 기름진 농경지로 만들죠.
*
? 여기까지만 보면 걍 모티브만 멋으로 따온게 아닌가요?
이거가지고 유신론적 뉘앙스를 읽는 건 다소 무리수 아닙니까?
합당한 지적입니다. 상징만으로 작품이 어떤 성향을 가졌다고 확신하는 건 위험하니까요.
그러니 다음 부분으로 넘어갑시다.
2. 구호기사단 기사
발리앙의 아버지 고드프리의 부하인 이 구호기사단 기사.
영화 내내 기묘하게 웃고 다니는 양반인데,
사실 이 캐릭터는 노골적으로 신적 존재에 대한 은유입니다.
다음 대화를 잘 듣고 이유를 서술하시오(3점)
황야에서, 덤불에 돌을 던지는 발리앙. 옆에는 구호기사단 기사가 서 있네요.
구호기사단: "빛을 한 점에 모으면 어느 순간 불꽃이 일죠. 난 자주 해봤습니다."
그 말대로 덤불에 불꽃이 붙습니다.
건조한 날씨 + 마른 덤불 + 돌멩이 부싯돌의 합작품이죠.. 노골적인 모세의 기적(스스로 불타는 덤불)의 묘사입니다.
발리앙: "저기 당신의 종교가 있군요. 불똥 하나, 바싹 마른 덤불, 저게 당신의 모세입니다. 허나 저는 저것이 말하는 걸 듣지 못했습니다."
신의 존재는 없다는 무신론적 관점, 그리고 설령 있다고 한들 나에게는 와닿지 않는다는 발리앙의 한탄이 묻어나오죠.
구호기사단: "허나 하느님이 없는 건 아닙니다."
(중략)
"저는 기도하러 갑니다. 이제부터 일어날 일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달라고요."
"백년 전의 일에 대한 복수가 일어날 겁니다. 무슬림들은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잊어서도 안 되고."
그때 갑자기 옆에 있는 다른 덤불에 저절로 불꽃이 솟습니다.
불똥이 튄 것도 아니고 돌멩이를 던진 것도 아닌데 말이죠.
화들짝 놀란 발리앙이 돌아보니,
구호기사단은 그 짧은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저긴 엄폐물 하나 없는 황야인데요. 온데간데 없네요.
저 초자연적인 양반은 이후로 두번 더 등장하는데
하나는 악당(기의 기사들)의 습격을 받고 황야에 쓰러진 발리앙에게
말 그대로 깝툭튀해서 구조해주는 역할입니다.
복선도 뭣도, 심지어 위치파악 등등도 없이 발리앙을 구해주는 기묘한 사람이죠.
두 번째는 패배가 뚜렷한 하틴 전투로, 죽음으로 출정하는 상황입니다.
그는 웃으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하틴 전투에서 이슬람은 백년 전의 복수로 십자군을 전원 학살했고
구호기사단 단원은 목이 잘린 시체로 발견되네요.
이게 중요한게, 이 하틴 전투가 구호기사단원의 말대로 마땅히 받아야 할 업보였다면
저때 신적인 존재로 은유된 구호기사단의 죽음은 예수의 대속,
즉 주인공과 예루살렘 안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학살당할 위기였던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주인공의 활약으로 모두 목숨을 건지죠.
이 신적인 존재가 초반에 한 말이 있습니다.
"참된 신성이란 올바른 행동에 있으며, 신이 바라는 선량함은 머리(행동)와 가슴(마음)에 들어있죠."
"매일 당신이 행동한 바가 당신의 선함 또는 악함을 결정짓습니다."
이 대사는 그야말로 영화의 대주제인데, 이제 이것과 작중 묘사되는 유신론에 엮어보겠습니다.
3. 신앙과 신
발리앙은 아내를 잃은 슬픔에, 그리고 자살한 아내를 신이 거부했다는 생각에 신을 찾는다.
하지만 성지에 가서 "신이시여, 저에게 원하시는것이 무엇이십니까" 하고 물어도
그는 혼자입니다.
신은 그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는 거죠.
백성을 지키기 위해 적들에게 가망 없는 돌격을 시도했을 때
발리앙의 목숨을 구해준 건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과거에 자비를 배푼 이슬람 장수였죠,
신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아닌, 인간이 착한 마음으로 행한 선행이 다시 선으로 돌아온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영화의 주제입니다.
이 이슬람 장수(나시르)는 드문드문 등장하다가, 마지막에 모든 전투가 끝난 후 다시 등장합니다.
이때 발리앙에게 받은 말(그리고 은혜)를 돌려주며 하는 말이 걸작이네요.
"당신에게 신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 많은 일들을 해냈겠소?"
"당신에게 평화가 함께하기를."
그동안 신을 찾아 헤맸고, 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한탄한 발리앙은 그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그가 신에 의지하지 않고 선과 올바름을 믿고 행했을때, 신은 항상 그 옆에 있었다고 감독은 말하는 것이죠..
마치 습격에서 그를 구해준 구호기사단처럼 말입니다.
*
재미있는 건, 이 영화에서 저 장면과 명백하게 대비되는 부분을 찾을 수 있다는 거죠.
하틴 전투의 참패 이후, 예루살렘의 백작이자 키프로스의 영주 티베리우스의 한탄입니다.
"나는 평생을 예루살렘을 위해 헌신했어. 처음에는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알겠군. 우리는 땅과 돈을 위해서 싸웠던 거야. 수치스럽군..."
"예루살렘은 이젠 없네. (가망 없는 전투엔 참가할 수 없으니)난 키프로스로 가네. 함께 하겠나?
이에 발리앙은 거부하죠.
"신께서 자네와 함께 하시길 비네."
"그분은 더 이상 내 곁에는 없으시니!"
말 그대로, 기사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신은 내 곁은 떠났다고 한탄하는 씬인데...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한 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티베리우스는 온전한 자기 의지로 행동해놓고, 나중에야 혼자 후회하면서 '신이 날 떠났어!' 라고 하는 거죠.
적반하장이 따로 없습니다.
애초에 이 영화의 주제가 '스스로 믿는 선한 자에게 신이 함께한다' 라는 걸 고려하면
티베리우스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 방어전, 즉 올바른 길을 갔다면 그에게도 신이 함께했을 겁니다.
*
위의 발리앙-이슬람 장수 씬에서, 발리앙은 신은 항상 내 곁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반대로 티베리우스는 신이 자신 곁을 떠났다고 말하는건 이런 까닭입니다.
위는 선을 행하여 결실을 얻었고
아래는 그동안의 죄를 깨닫고 후회에 차 있지만, 다시 선을 행할 용기는 없기 때문이죠.
4.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영화 초반부. 자살한 아내가 밭에 있는 환상을 보는 발리앙
비록 표정은 흐뭇하지만, 저건 그저 환상일 뿐
그는 신과 구원을 찾는 죄인입니다.
모든 여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발리앙
그런데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네요.
아내가 일하던 밭에 꽃이 피었습니다.
이는 선한 마음으로 행하는 선한 자는 구원을 맞이하며
자살한 발리앙의 아내 역시 분명히 구원되었음을 암시하는 장면입니다.
이와 동시에 발리앙 역시 슬픔에서 해방되어 구원받았다는 걸 의미하죠.
물론 그저 꽃나무 한 그루일 뿐이며
무신론적, 이성적 가치관에서는 별 의미 없는 식물일 뿐이지만
이 작은 미물만으로 사람은 위안을 얻고 신의 존재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드러내는 문답이 그 유명한
"예루살렘은 무엇이죠?"
"아무것도 아니지. 모든 것이기도 하고!"
라는 구절입니다.
저건 단순히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와 성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삶. 신앙, 종교, 그리고 신에 대한 함축적인 질문과 답이니까요.
선행을 이행하지 않는 자에게 신앙은 광신이거나, 혹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들에게는 신이 머물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죠.
하지만 신앙이 없다 한들, 스스로 선을 행하는 자, 머리와 가슴으로 바른 길을 걷는 자에게는 신이 깃들며 함께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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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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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아니지. 모든 것이기도 하고!" 저는 이 대사를 십자군 전쟁에서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전략적 혹은 정략적 가치에 대한 답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놀라운 해석을 이끌어내셨네요+0+


멋진 리뷰입니다!! 발리앙을 카인과아벨, 모세에 빗대었다는 건 느꼈었는데... 님 덕에 해석이 여러모로 더 풍요로워졌네요 ^^
부디 리들리스콧이 후속편 사자심왕 리처드 찍는걸 포기하지 말아주었음 해요...ㅜㅜ

짧은 후기글, 정보 공유글, 굿즈 관련 글 다 좋지만
정성들인 분석글이나 명품리뷰들은 별도로 선정해서
익무에서 더 쉽게, 오래 접할 수 있게끔 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ㅠㅠ

와 정말 이 영화를 와닿게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뭐가 있나 검색하다가 이 영화가 나와서 찜해둔 상태였어요.
반갑.. 글은 영화 본 후 읽어 볼게요.

영화 다시 보고 싶게 하는 좋은 글입니다.


이런 글들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성경쪽으로는 완전 문외한인지라 모티브는 전혀 모르고 봤었는데 굉장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네요.
영화를 굉장히 풍요롭게 만드는 멋진 후기입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맹신이 아닌 이렇게 사유하는 종교인이 많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