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에와 한국 독립영화
영화를 보러 들어가기 전에 아는 분들과 잠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화의 영어제목을 보니 winter's night라서 처음에는 잉마르 베리만 영화가 생각났거든요. 그런데 그 영화는 맞아, 밤이 아니라 light였던 건데요. 혹시 오늘 영화와 연관성이 있을까요.
주최 측이 겨울밤이 오기만을 기다려 시사를 진행한 듯한 영화 '겨울밤에'는 제가 기억에서 잠시 혼동하기는 했지만 결국 밤의 재현과 빛의 표현에 기댄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를 작업한 사람들은 어두컴컴한 밤을 풍성하게 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선결조건을 넘어서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을 텐데 제작진은 예상 대로 조명을 빛으로 입혀 색을 재현하고 깊은밤을 원색으로 다듬는 방식을 따랐더군요. 그 중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로케이션 한 곳에서 나온 그림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관객이 알아주지 않고 여기서 묻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는지 영화 속에서 두 차례 길게 반복되는 롱테이크 장소로 출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해당 이미지와 프레임을 극장 포스터와 전단지로 이중삼중 인쇄하였던데 이러한 자기 현시의 태도는 결국 무엇을 위한 표현이고 형식이었는가라는 의문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영화 겨울밤에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위시한 라틴 어메리카 작가들의 문학기법인 매직 리얼리즘 영향권과 자장 아래서 벗어날 길 없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문학 뿐 아니라 영화로 범위를 넓혀서도 전 세계 창작자들이 큰 빚을 지고 있는 오래된 사조인지라 한국에서 영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연출자가 해당 기법을 자기 영화에도 고스란히 적용했다고 해서 진부함을 연상시킨다거나 오점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난해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 행복한 라짜로도 주인공 라짜로 혼자 다른 인물과 대비되는 설정을 통해 전통적인 이야기처럼 원인과 결과가 성립하지 않는 서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연출자 알리체 로르바커가 16mm 필름 촬영 형식을 고수하여 세월을 뛰어넘은 라짜로의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모습과 얼굴을 담아 필름메이커의 관찰자다운 성격을 보여주었다면 겨울밤에의 제작진은 한 겨울밤에 일어난 꿈만 같은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해 형식으로써의 롱테이크와 기능으로써의 롱테이크를 차용하면서 조명으로 잔재주를 부린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입니다. 그 말은 아트하우스 영화라는 범주 안에서도 한계가 분명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뜻과도 맞닿습니다.
한편으로 아트하우스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자의식 있는 창작자들이 클로즈업은 물론이고 미디엄 샷도 최대한 배제하려 들면서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기 꺼려하는 태도 또한 일종의 유행처럼 보이며 유물의 답습처럼 보입니다. 오즈 야스지로가 다다미 샷으로 자신이 보는 장소와 공기와 인물을 관조했던 것은 그 사람의 형식미였고 에드워드 양이 되도록이면 카메라를 땅에 고정하고자 했던 것은 그렇게 하면 그게 예술처럼 보여서가 아니라 자기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구성과 연속성 확보를 위한 최적의 선택이라고 여겨서였습니다. 그리고 그건 자기보다 몇 살 많은 코폴라가 훨씬 유능하게 했습니다. 페드루 코스타가 자신의 말을 뒤집고 기존 방식에서 벗어난 영화를 들고 나왔다고 해서 평자들이 그의 영화를 색안경을 껴고 보지 않고 인물에게 어마어마한 클로즈업을 들이댄다고 해서 그 장면이 힘을 잃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이 스스로 규정한 고유의 형식미가 다른 부분을 압도하고도 남아서였습니다.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필름 대신 디지털로 촬영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 세계가 빛을 잃거나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영화를 작업한 본래 의도와 결과가 일치하며 작품 안에서 스스로 마침표를 찍은 완결성이 그 자체로 완벽하며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독립영화, 인디펜던트 영화는 말 그대로 상황에 관련되어 있지 않아서 독자성을 살릴 수 있는 작업의 일부입니다. 창작자의 의도가 자주성이나 개성 없이 일종의 유행이나 작법 교본에서 알려주는 방식을 답습할 때 그건 날 것의 정신이나 생명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뿐입니다.
존 카사베테스도, 브라이언 드 팔마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도, 데이비드 린치도,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도 저마다 가는 길은 나중에 달랐지만 그 사람들 초기영화에서 보이는 기운은 얼마나 독립된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고 지금도 변함없이 남아있는지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겨울밤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결합니다. 부부는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성은 무언가를 찾으러 들어가며 남성은 무언가를 잠시 찾아서 나옵니다. 부부와 대조를 이루는 또 다른 젊은 연인들은 서로 관계성이 있는데 제작진은 이들을 될 수 있는 한 모호하게 배치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상실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클로즈업 할 용기가 없으면서 상징으로 내세우고 싶은 겨울밤의 산 속 눈발자국은 최대한 사물에 근접하여 오래도록 노출하고 싶은 어긋난 욕망과 메시지의 불일치. 바로 그 괴상한 강박이 이 영화와 해당 조류에 올라탄 한국 독립영화들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