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 평론가 [나를 찾아줘] 평가
출처: http://blog.naver.com/lifeisntcool/220158668143
데이빗 핀처 감독의 10월23일 개봉작
'나를 찾아줘'를 보았습니다.
길리언 플린이 쓴 원작 소설
'나를 찾아줘' 자체가 매우 재미있습니다.
(인물의 이상심리를 진진하고도 상세하게 다뤘습니다.)
그런데 가뜩이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현존하는 최고의 테크니션 중 한 명인 데이빗 핀처가
강력한 영화적 장력으로 더욱 팽팽하게 잡아당겨놓았습니다.
149분이나 되는 러닝타임이 거의 의식되지 않을 정도죠.
범죄 스릴러이자 반전이 존재하는 이야기지만
다루고 있는 주제가 복합적이고 화술 또한 능란해서
'전말'이 다 밝혀진 뒤에도 긴장과 여진이 끊기지 않습니다.
매우 자극적이고 야단스러운 이야기지만
데이빗 핀처의 능란한 손길 덕분에 품위도 잃지 않지요.
조금 뭉툭하고 멍해보이는 표정이
극에 잘 어울리는 벤 애플렉도 좋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텅 비어 있는 얼굴을 보여주는
로자먼드 파이크의 존재감이 가장 크네요.
(1990년대의 니콜 키드먼을 연상케 합니다.)
★★★★
아래의 선 밑에 계속 이어지는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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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의 이상심리를
생생하게 다룬 뛰어난 스릴러입니다.
결혼 생활을 냉소적으로 다루고 있는 필치도 인상적이죠.
하지만 제게 더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나를 찾아줘'가 경쟁 관계에 놓인 이야기들 사이의
각축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반전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전반부를 보다보면
관객은 남편의 이야기와 아내의 이야기 중에서
자연스럽게 후자를 더 신뢰하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부분적으로 감독이나 작가가
관객이 그런 쪽으로 생각하게끔 몰고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그것은
두 이야기가 서로 다른 양태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죠.
전반부에서 남편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시점으로 제시되지만
아내의 이야기는 일기와 내레이션의 형식을 통해
주관적 시점으로 토로됩니다.
(다시 말해 남편과 달리 아내는
이야기를 술회할 수 있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실종 후 며칠 간의 남편 이야기는
혼돈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그의 '현재'를 관찰하는 방식으로 펼쳐지지만
아내의 이야기는 둘이 처음 만난 7년 전에서부터 기술함으로써
'역사'를 끌어들이는 서술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순간을 이야기하는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세월을 이야기한다고 할까요.
(어떤 인물에게 관객을 감정적으로 이입시킬 필요가 있을 때
영화들이 플래시백을 통해 그의 과거를 설명하곤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결국 상충하는 두 이야기 사이에 놓인 청자는
절절한 심리를 담아낸 주관적 묘사와
역사를 끌어들여 술회하는 서술 방식을 지닌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것이지요.
(관객은 흔히 극중에서 내레이션을 하는 인물의 말이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반전은 러닝타임 전체로 놓고 보면
상대적으로 전반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영화 시작 1시간 정도의 지점에 놓여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베일에 가려진 사건의 속내에 대한 미스터리가
극 전체를 지배하는 전통적인 스릴러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닌 게 아니라, 바로 그 반전이 쇼킹하게 드러나는 지점에서부터
두 이야기의 경쟁 양상은 전혀 다른 지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반전이 드러난 후에 아내의 이야기 역시 남편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현재적이고도 객관적인 방식의 묘사로 펼쳐지면서
두 이야기는 같은 조건에서 미디어와 대중 혹은 관객의 인정을 놓고
본격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이때 중요한 것은 더이상 '진실'이 아닙니다.
누가 더 완벽에 가깝고 좀더 그럴 듯한 이야기를
제시할 수 있느냐의 대결이지요.
이 영화의 후반부는 바로 그런 이야기의 설계도들을 드러내가면서
그 싸움의 양상을 마치 게임 중계하듯 펼쳐나갑니다.
그 과정에서 싸움의 핵심을 파악한 남편이 뒤늦게 분발하지만
이야기의 맥 자체를 완전히 수정하면서까지 흥미로운 스토리를
새로 고안해낸 아내가 결국 확고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녀는 설혹 애초에 고안한 이야기의 틀 자체를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중심에 들어앉으려는 욕망이 확고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진실을 밝히는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임에서 패배한 것이고,
더이상 이야기를 주도해나갈 수 없기에 패배한 셈입니다.
그로 인해 상대가 펼쳐낸 이야기의 자장 속에 흡수되어버리는 남편은
아내의 이야기 속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보조화자로서만 남아
그 이야기의 일부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추천인 4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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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소름돋네요ㄷㄷ
이동진평론가의 의견으로 영화를 다시 생각해보니 .. 새로 보이는게 또 있긴 하네요
음.. 역시 평론가는 영화를 보는 시야부터가 일반인과 다르군요.
아래 스포일러 포함 부분을 읽고 나니 저의 지식과 감상이 초라해지는군요..ㅋ
감상하고 난 결론은 같지만 과정이 다르다..(?)
최근 이동진의 영화평 중 가장 인상적이네요.
보조화자로서 아내의 이야기 일부로 살아가야만 한다라니...
와..
오호..... 일반 상업영화에 대한 별넷은 정말 오래간만이 듯 싶군요...ㅋㅋ
근데 이동진씨랑 원래 잘 안맞는 코드인데 요즘은 매우 근접해가네요....ㅋㅋ
이 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98% 이상 일치? ^^;;;
괜히 평론가가 아니라는 걸 이번 리뷰를 통해 보여주네요ㅎㅎ
저렇게까진 생각 안해봤는데, 다음에 또 볼땐 염두해둬야겠어요:-)
평 공감되네요. 어떻게 보면 라쇼몽 같은 화법이었어요.
어떻게 기선 제압해서 이야기를 주도하느냐...
자꾸만 마지막 장면이 생각나요. 찌릿하면서 섬찟한 그 얼굴. 그 표정.
그게 자꾸 보고 싶은 건 대체 왜죠 ㅋㅋㅋㅋㅋ
그래서 또 보러 가려고요. 전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보는 경우는 별로 없어서 좀 신나기까지 하군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