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 보다 유명한(?) 조선일보 출신 전설적인 영화평론가
심훈
소설 상록수의 작가로 유명한 심훈은 식민지 시절 제법 활발하게 활동했던 영화인 중 한 명 이었습니다.
원래 극단 출신이던 심훈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중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기자직에서 해직이 됩니다.
이후 그는 영화계에 투신을 하는데요
이 시기 심훈이 처음으로 출연한 영화가 바로 1926년 作 장한몽 입니다.
이 영화에서 심훈은 신태식이라는 가명으로 영화에 출연하는데
이때 심훈이 맡은 배역이 바로 그 유명한 이수일 역 입니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냐며 몰아붙이던 이수일이 바로 심훈이었죠
이 영화에는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요 당초 이 영화에서 이수일 역을 맡은 배우는 주삼손이라는 배우 였습니다. 그러나 주삼손이 촬영 도중 하차하게 되자 부랴부랴 심훈이 이수일 역을 대신 맡게 되고 주삼손이 촬영한 부분과 심훈이 촬영한 부분을 합쳐서 영화 한 편으로 개봉을 합니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이수일이 전혀 다른 얼굴을 한 ㅋㅋㅋ)
이런 어처구니 없는 촌극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에 고무된 심훈은 아예 연출과 각본, 그리고 주연까지 도맡아서 '먼 동이 틀때' 라는 작품을 발표하지만 흥행에 크게 실패하며 결국 제작사가 파산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영화판에서 한 번 큰 쓴맛을 본 심훈은 1928년 조선일보에 입사합니다.
문화부에서 활동을 했던 심훈은 조선일보에 주로 영화와 관련한 평론과 기사를 남깁니다.
사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매우 의아할 수 있지만 당시 기사를 살펴보면 찰리 채플린을 희극왕, 버스터 키튼을 무소희극명우라고 표현할 정도로 헐리우드의 슈퍼스타들은 당시 조선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가 한 1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동경에서 개봉을 하고 바로 1개월 정도의 시차를 두고 경성에 개봉이 되었다고 하니 세계 주류 문화들이 큰 시차를 두지 않고 식민지 조선에도 상륙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소수에 불과했겠지만)
아무튼 이 시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로서 심훈이 남긴 여러편의 영화평론 중 특히 1929년 4월 30일 조선일보에 남긴 영화평론은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당시 심훈은 개봉 예정이던 두 편의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남겼는데요
프리츠 랑 감독의 메트로폴리스와
알베르 기요 감독의 몽 파리 입니다.
당시 조선일보에 남긴 심훈의 영화평은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메트로포리쓰(Metropolis)'와 '몽, 파리(Mon, Paris)' 두 가지 영화는 고대한지 오래엇다. '몽, 파리'는 현대인의 '히스테리칼'한 말초신경을 자극 식히려는 일종의 춘화도에 지나지 못하겟슴으로 그다지 큰 긔대는 갓지 못하나, 메트로포리쓰 만은…"
사실 프리츠 랑 감독의 메트로폴리스에 대해선 많은 조선인 지식인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평론을 내놓은 것 으로 알려져있습니다만 역시 당시 경성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영화평론가는 심훈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기자질이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심훈은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다시 소설가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1935년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소설 공모전에서 상록수가 입상을 하며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됩니다.
당시 조선에 문학계에선 이른바 개몽을 주제로 한 소설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하는데요 그 중에서도 상록수는 대중적으로 가장 큰 지지를 받았던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한편 동아일보 공모전 당선에 고무된 심훈은 아예 상록수를 영화화 하려고 나섰지만 결국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 그리고 상록수의 지역적 배경이 되는 안산시는 2002년 분구가 되면서 새로 생기는 구의 이름을 상록구로 지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심훈이 당시 남긴 영화/연극 관련 기사 목록 (출처 : http://blog.hani.co.kr/dong5797/59382)
1.로드쇼에 대하여(조선일보 1927.11.18~ 3회 연재)
2. (연극)경성보육학교의 아동극 공연을 보고(조선 1927.12.16~18)
3.조선영화의 현재와 장래(조선 1928.1.1~6 3회)
4.영화비평에 대하여(별건곤 11호/1928.2월호)
5. 영화독어(조선 1928.4.18~24 5회)
6. 아직 숨겨가진 자랑, 갓 자라는 조선영화계(별건곤 12,13호/1928.5월호)
7. 아동극과 소년영화(조선 1928.5.6~9 3회)
8. 서커스에 나타난 채프린의 인생관(중외 1928.5.29~30 2회)
9.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중외 1928.7.11~27 13회)
10. ‘육체의 도’에 나타난 에밀야닝스와 미국영화(조선 1928.10.10) S.C생
11. 모더- 막크리-, 별명 탄식마라 어머니!(조선 1928.10.18) S.C생
12. 관중의 한 사람으로 흥행업자에게(조선 1928.11.17)
13. 관중의 한 사람으로 해설자 제군에게(조선 1928.11.18)
14. 관중의 한 사람으로 영화계에 제의함(조선 1928.11.20)
15. 암흑의 거리와 방크롭트의 연기(조선 1928.11.27)
16. 조선영화총관(조선 1929.1.1~4 2회)
17. 최후의 인 내용가치(조선 1929.1.14~15 2회)
18. 발성영화론(조선지광 1929.1월호-미발굴)
19. 문예작품의 영화와 문제(문예공론 1929.1월호)
20. 영화화한 ‘약혼’을 보고(중외 1929.2.22)
21. 예술가가 되려는 젊은여성에게(조선 1929.4.3) 훈생
22. 젊은여자들과 활동사진의 영향(조선 1929.4.5) 훈생
23. 푸리츠 랑그의 메트로폴리스(조선 1929.4.30)
24. 백설같이 순결한 거리의 천사(조선 1929.6.14) 훈생
25. 성숙의 가을과 조선의 영화계(조선 1929.9.8)
26. (무용)새로운 무용의 길로-배구자 무용을 보고(조선 1929.9.22~25 3회)
27. 영화단편어(신소설 1호 1929.10.28)
28. 산송장 시사평(조선 1930.2.14)-산송장 시사평에 대한 반론(동아 1930.3.16)
29. 영화평을 문제삼은 효성군에게 일언함(동아 1930.3.18)
30. 상해 영화인의 양자강 인상기(조선 1931.5.5)
31. 조선영화인 언파레드(동광 23호/1931.7월호)
32. 1932년의 조선영화-시원치 않은 예상기(문예월간 1932년 1월호)
33. 연예계 산보, 홍염 영화화 기타(동광 38호/1932.10월호)
34. (연극)극예술연구회 제5회 공연관극기(조선중앙 1933.12.2~7 5회)
35. 영화가 산보(중앙 1933.11월 창간호) 백랑생
36. 민중교화에 위대한 임무와 연극과 영화사업을 하라(조선 특간 1934.5.30~31 2회)
37. 다시금 본질을 구명하고 영화의상도에로(조선 1935.7.13~17 3회)
38. 박기채의 1회작 춘풍을 보고서(조선 1935.12.7)
39. 조선서 토키는 시기상조다(조선영화1 1936.10/미완)
40. ‘먼동이 틀 때’의 회고 (조선영화1 1936.10/유고)
추천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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