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 - 전쟁과 시간
"시간은 절대적인가"라는 주제는 물리학자들이나 해야 할 토론이다. 어쩌면 물리학계에서는 시간의 절대성에 대한 토론이 이뤄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에서 학계의 근거까지 찾아볼 생각은 없다. 과학적 근거가 없이도 우리는 "시간은 상대적이다"라는 것을 몸소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말은 평일보다 시간이 빨리 간다"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주말은 실제로 평일보다 시간이 짧다. 대신 살면서 누구나 해보는 "아무것도 안 할 때 시간이 빨리 가더라"라는 한탄을 이야기 할 계획이다. 이 말은 "시간은 상대적이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내 군생활은 천년만년 지나는 것처럼 길던데 남의 군생활은 참 빨리 끝나더라"는 '체감'에서 비롯된다. 시간은 물리적 단위이자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다. '시간을 느끼는 감각'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이 '시간의 경과'를 체감으로 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간은 절대적 측정이 가능할까? 시계가 움직이는 물리적 단위는 초침 하나가 가는 간격만큼 일정하다. 그러나 자연이 만든 시간의 단위는 그렇게 규칙적이고 일정할까? 2월이 28일까지 있는 것과 29일까지 있는 것은 시간의 절대성에 반대되는 근거다. 즉 시간은 절대적 측정이 불가하며 때문에 상대적인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셉션'과 '인터스텔라', '덩케르크'에 이르러 시간의 상대성을 영화에 적용했다. 자각의 범위('인셉션'), 공간('인터스텔라'), 경험('덩케르크')에 따라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이러한 시간의 상대성은 무의식과 우주, 전쟁터에서 각기 다른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테넷'에서도 시간의 상대성을 이야기 할 지 모르겠지만) 그의 '특수상대성이론 3부작'은 "시간은 상대적이다"라고 믿는 놀란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놀란은 "시간은 상대적이다"라고 강조하기 위해 무려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샘 멘데스의 '1917'은 '덩케르크'와 반대지점에 있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 시간의 단위는 절대적이다. 영화적 시간과 영화 밖의 시간이 동일한 단위로 흐르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을 극대화시킨다. 전쟁 바깥에 있는 관객을 전쟁 내부로 끌어들여서 관객과 인물의 시간을 동일시 시킨다. 이것은 체험을 극대화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1917'이 시간의 절대성을 고집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가 쫓아가는 인물은 윌(조지 맥케이) 한 명이기 때문이다. '덩케르크'에서처럼 해변과 배, 하늘에서 각각의 인물을 보여주는 대신 시간을 체감하는 단 사람만이 이야기를 이끈다. 당연히 한 사람에게 시간은 절대적일 수 밖에 없다. 그가 체감하는 시간만이 그가 아는 시간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대적 시간(개인)은 상대적 시간(집단)에 귀속되는 것일까? 이론상 개인의 시간은 집단의 시간에 귀속된다. 그리고 집단은 개인의 합으로 이뤄진 만큼 그 안에서 시간은 상대적이다. '덩케르크'에서처럼 해안가에 떼거지로 있는 군인에게도 시간은 분명 상대적이었을 것이다. 해안가에서 배를 타고 탈출하던 군인은 배가 침몰하자 바다에 빠지고 이어서 보트를 타고 온 민간인에 의해 구조된다. 해안가의 시간이 바다의 시간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1917'은 시간의 상대성에 절대성을 부여한다. 이는 집단의 시간도 일치하고 동일하게 흐를 수 있다는 주장과 같다. 영화 속 윌이 하는 경험은 2시간의 제한을 가지고 관객과 함께 간다. 관객은 윌이 보고 듣고 걷고 뛰는 만큼을 공유하며 그와 동일시 된다. 시간을 절대적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감각을 차단한 채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가 지향하는 바와 같다. 영화는 개인의 경험을 집단이 공유하는 행위다. '경험의 공유'를 극대화하기 위해 영화는 편집으로 시간을 잘라내고 붙이고 늘리고 줄인다. 영화적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다르기 마련이다. 영화에서 15년이 흘러도 현재에서는 30분만 흘렀을 수 있다. '1917'은 편집으로 완성되는 영화적 시간을 부정하고 영화적 경험을 관객과 공유한다. 그 결과 '1917'은 '영화적 체험의 끝'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시네마'를 부정하고 '시네마'의 지향점에 도달한 괴상한 성과에 이른다. '1917'은 편집으로 시간을 늘리고 줄이며 관객의 감각을 조작하고 메시지를 담아내던 과거의 영화이론을 부정한다. 이런 시도가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버드맨'이나 '그래비티'처럼 영화적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일치시키려는 영화는 많았다. 그 와중에 '1917'이 조금 더 특별하게 보인 이유는 이 영화는 '덩케르크'라는 반대방향의 영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집단의 시간', '상대적 시간'으로 대변되는 '덩케르크'와 '개인의 시간', '절대적 시간'을 보여주는 '1917'은 분명 비교할 가치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전쟁터에서의 시간'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나는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다. 인간성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극한의 야만적 현장에서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건지 나는 알 수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의 시간'이라고 설명하면 더 쉬울까? 나는 '죽음과 가까운 순간의 시간은 조금 더 다르게 흐르겠다'라고 짐작할 뿐 그것을 자세히 알 방법이 없다. 그저 '1917'과 '덩케르크'를 보며 '전쟁터에서의 시간'을 '체감'할 뿐이다.
'1917'은 기술적 완성도가 뛰어난 영화다. 전쟁을 체험하게 하기 위한 고도의 장치가 있으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영화에 녹아있다. 여기에 더 의미있는 것은 이 영화가 죽음에 인접한 시간을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그래비티'와도 통하는 지점이 있지만 두 영화가 마주한 죽음은 약간 다르다. 이것은 사방에 죽음이 널린 전쟁터와 공기조차 없는 우주가 주는 감각적 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917'의 기술적 완성도는 결국 '전쟁을 체험'하게 하는데 있다. 공간의 이동을 지워버린다던지 넓은 공간을 활용해 전쟁터를 연출한다던지, 대단히 뛰어나게 '사실'을 묘사해낸다.
그에 반해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윌이 명령서를 전달하러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것이 전부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떠나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이야기적 차이점을 찾기는 어렵다(솔직히 소설로 본다면 '1917'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훨씬 재밌을 것 같다). '1917'이나 '그래비티' 모두 굉장히 뛰어난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 최고의 영화가 되지 못한 것은 '단순한 이야기'에 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버드맨'은 앞선 두 영화와 맥락이 다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해 최고의 영화는 '보이후드'였다고 주장한다). '1917'은 흥미로운 화두를 던졌지만 영화 안에서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여러 가지 텍스트를 필요로 한다). '1917'은 성과와 과제가 명확한 영화다. 물리학과 상대성 이론에 대한 지식만 풍성했어도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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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봤습니다.대단한 야심작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