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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수다 [페인 앤 글로리] 간략후기

  • jimmani jimm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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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무의 은혜에 힘입어 영화 <페인 앤 글로리>를 시사회로 미리 보았습니다.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신작으로, 작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작이자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국제영화상 부문 후보작이기도 한 영화이죠.

원래부터 작품 속에 자신의 모습과 가치관을 곧잘 투영해 온 알모도바르 감독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투사한 듯한 이 영화는, 숨겨 놓았던 인생의 조각들과 마주하며

예술가로서의 위기로부터 스스로를 건져 올리는 중년 감독의 이야기를 통해

삶과 예술이 어떻게 데칼코마니처럼 마주보며 서로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내는지를 보여줍니다.

 

뛰어난 작품들을 연출하며 세계적인 거장이 된 영화감독 살바도르 말로(안토니오 반데라스)는

불현듯 찾아온 창작의 위기로 영화를 만들 의지도, 글을 쓸 의지도 잃은 상태입니다.

그러던 중 32년 전에 만든 자신의 영화 <맛>을 다시 보게 되고, 나왔을 당시에는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아

시사회 직후 의절까지 한 배우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의 연기를 다시 평가하게 됩니다.

어렵게 알베르토를 만나 화해의 손길을 내민 살바도르는 이후 자신이 지나 온 삶의 자취들과

다시 마주하면서 아득히 멀어졌던 창작의 영감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 삶의 자취들에는 그의 어린 시절을 채워주었던 어머니 하신타(페넬로페 크루즈),

살바도르가 글을 가르쳐 주었던 동네 형 에두아르도, 일생의 사랑 페데리코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사건은 주인공이 겪게 되는 것보다 이미 겪었던 것들로 제시되며,

불현듯 찾아오는 과거의 사건들과 현재가 조응하며 주인공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의식의 흐름' 기법과도 유사한 그리 친절하진 않은 화법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알모도바르 감독은 번잡하기만한 플래시백을 넘어 과거와 현재가 마치 한 몸을 이루는 듯,

현재의 주인공을 호출하는 과거와 그 과거로부터 반응하여 현재를 살아나가는 주인공을 유기적으로 보여줍니다.

 

알모도바르 감독의 작품답게 <페인 앤 글로리>는 오프닝부터 강렬한 색채감으로 관객의 시야를 압도합니다.

마치 동굴같이 흰 회벽으로 둘러싸인 어린 시절의 집, 갖가지 원색이 고유의 질서 속에 배치되어 있는 현재의 집,

입고 있는 옷이나 주변의 자연색으로 규정되는 여러 시간 속의 기억들이 각자의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그런 가운데 펼쳐지는 이야기는 지금껏 본 알모도바르 감독의 어느 영화들보다도 따뜻하게 그려집니다.

제목에부터 고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니 상당히 무겁고도 심오한 영화가 될 줄 알았는데 의외입니다.

살바도르가 어린 시절에 만났던 애틋했던 우정 혹은 사랑과 그로 인한 정체성의 자각,

일생을 관통한 사랑의 기억 속 모습과 현재, 그로부터 영감을 얻는 살바도르의 모습까지 인간적으로 바라봅니다.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상당히 도발적인 내용이 없지 않으나, 영화는 그것들의 도발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대신

어디까지나 살바도르가 밟아 온 삶의 일부일 뿐이라고 미소 띤 얼굴로 말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리한 삶의 일부분들은 고유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현재의 살바도르를 부르고,

그는 그 목소리와 표정을 비로소 기록하기 시작함으로써 세월을 거슬러 예술의 생명력을 다시금 얻습니다.

 

제목처럼 영화는 궁극적으로 고통이 자리한 삶이 예술에 선사하는 영광을 예찬하는 것 같습니다.

가난, 그리움, 분노 등 고통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되겠지만, 그 모든 고통의 순간에는

고통의 존재감을 뚫고 도드라질 만큼 특별하게 빛나는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는 그것마저 무릅쓰고 당당한 삶을 위해 아들의 손을 잡고 뛰쳐나온 어머니가 있었고,

열렬한 사랑의 시간에는 그리움의 고통으로 외면하기엔 너무나 찬란한 기억으로 남은 연인이 있었죠.

그런 존재들로 인해 살바도르는 예술가로서 그 고통의 순간들을 기록할 용기와

그 기록들을 예술로 승화시킬 역량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선순환은 시간을 개의치 않습니다.

무려 50년 전의 기억이 커리어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중년 예술가의 영감을 다시 깨우듯이 말입니다.

거울로만 되어 있는 방에 홀로 들어서면 마치 사방으로 뻗은 무한한 공간이 나로만 채워진 것처럼 보이듯,

예술은 수많은 얼굴을 한 나 자신과 마주보면서 무한에 수렴하는 생명력을 얻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의 알모도바르 감독이 마치 자신을 성찰하며 만든 것 같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 살바도르 역의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알모도바르를 위한 완벽한 거울이 됩니다.

물론 젊은 시절부터 알모도바르 감독과 꾸준히 작업해 온 페르소나 배우이지만

우리에게는 액션 히어로나 '장화신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익숙한데, 이 영화에선 그런 모습들을

완전히 벗은 것은 물론 삶의 희로애락에 수줍게 웃고 우는 지극히 인간적인 예술가상을 구현합니다.

알모도바르 감독이 느꼈을 예술가의 번뇌를 깊고도 따뜻하게 투영하며 배우로서 가장 무르익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더불어 살바도르의 어머니인 야신타를 연기한 페넬로페 크루즈는 특별출연으로 등장하지만,

고단한 삶 속에서도 한번도 목소리 낮추거나 자신을 굽힌 적 없었던

주체적인 어머니의 모습으로 주인공에 버금가는 존재감과 영향력을 영화에 새겨넣습니다.

 

<페인 앤 글로리>는 올해로 칠순에 접어드는 거장 감독이 시간을 초월하여

새로운 창작의 생명력을 얻는 과정에 대한 고백이면서 동시에 그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고통과 영광을 아우르는 삶에 대한 면밀한 시선으로 예술의 생명력을 어디까지나 이어가겠다는

감독의 의지는 무척 신선하고 놀라운 마지막 장면을 통해 보는 이의 마음에 오롯이 새겨집니다.

삶과 예술이 서로를 가감없이 껴안음으로써 서로에게 부여하는 무한한 활기를 느끼게 합니다.

 

익무 덕에 좋은 영화 잘 보았습니다.

추천인 7

  • 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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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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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golgo 2020.01.24. 20:01
아직 안 봤지만... 기생충이 아니었음 강력한 오스카 국제영화상 후보였을 것 같네요.
글 잘 봤습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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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ani 작성자 2020.01.24. 21:03
golgo
감사합니다.^^ 그랬다면 알모도바르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 이력이 이 영화로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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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 2작사 2020.01.24. 20:43
작년 로마에 이어서 거장의 자전적인 영화들이 자주 나오네요 ㅎㅎ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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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ani 작성자 2020.01.24. 21:04
2작사
자전적인 내용인 만큼 더욱 신중하고 각별하게 나오지 않나 싶습니다 ㅎㅎ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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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등 Quril 2020.01.24. 20:44
후기 정말 잘읽었습니다. 정식개봉하면 한번 더봐야겠네요ㅎㅎ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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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ani 작성자 2020.01.24. 21:04
Quril
또 볼 만한 가치가 있죠.^^
댓글
영미용 2020.01.24. 20:44
간럇 후기 치고 너무...긴...ㅎㅎ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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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ani 작성자 2020.01.24. 21:05
영미용
어느덧 제 나름대로 형식으로 굳어졌네요 ㅎㅎ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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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영화다 2020.01.24. 21:44
꼭 봐야겠네요 후기 감사합니다!
알모도바르 감독 영화는 극장에서 첨 보는데 너무 기대되네요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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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ani 작성자 2020.01.24. 22:16
금요일엔영화다
확실히 극장에서 볼 때 감동이 클 듯 합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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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모도바르 2020.01.24. 21:58

제목 때문에 슬픈 내용일 줄 알았는데, 유머러스하고 따뜻해서 좋았어요. 역시 알모도바르는 알모도바르더라고요. 특히 엔딩 보고 쿵 했습니다.

우주의 기운이 호아킨 피닉스에게 쏠리고 있어서 힘들겠지만 남우주연상이 안토니오 반데라스에게 갔음 좋겠네요. 섬세한 연기 좋더라고요.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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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ani 작성자 2020.01.24. 22:18
알모도바르
여기서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연기도 두고두고 회자될 만 하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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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 2020.01.25. 05:22
와 시사회로 보셨군요 ㅎㅎ 저는 다음 주에 이동진 라이브톡 예매해놨어요 ㅎㅎ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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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ani 작성자 2020.01.25. 13:16
1104
라이브톡으로도 많은 유익한 이야기 나올 것 같습니다.^^
댓글
스코티 2020.01.31. 01:33
글 잘 읽었어요. 컨디션 난조 때문이었는지 영화는 기대에 못 미쳤는데 다시 한번 각 잡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연기만큼은 최고였어요. 호아킨 피닉스만 아니었다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가장 강력한 후보가 아닐까 싶네요.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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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ani 작성자 2020.01.31. 08:49
스코티
곱씹을수록 풍미 넘치는 영화였고 연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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