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 300 용사전
1962년에 나온 [300 스파르탄]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테르모필레 전투를 소재로해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불과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이 수억의 페르시아 침략군을 막아냈다는... 근래에는 영화 [300]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이벤트죠. (사람들이 [300]에서 받아들인 메시지는 '싸나이는 복근을 길러야한다'는 것 뿐이지만...)
[300 스파르탄]은 [300]의 원전이라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둘이 원작과 리메이크의 관계는 아니지만 [300 스파르탄]이라는 영화가 없었으면 [300]이 나올 수가 없는 그런 사이죠. 프랭크 밀러가 어린시절 [300 스파르탄]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만화가로 유명해진 뒤에 자신의 비전으로 스파르타 300 용사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만들어낸 것이 만화 '300'입니다. 그 만화를 바탕으로 해서 영화 [300]이 나왔고요.
역사적 사건에서 소재만 빌려온 환타지 [300]과는 달리 [300 스파르탄]은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역사극입니다. 그러니 [300]과는 자세가 다르죠. (완벽하진 않아도) 고증에 신경쓴다고 썼고, 촬영 장소도 그리스 정부의 협조를 받아 실제 역사적 장소의 근처에서 찍었다고 합니다.(실제 장소는 현재 옛 상태 그대로 남아있질 않아서...) 영화의 내용도 기록되어 있는 실제 이벤트들을 충실하게 반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모 환타지 영화와는 달리 '진실을 전하는 작품'인가...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저로선 고개를 갸웃하게 되네요.
전 [300 스파르탄]을 보면서 '과연 [300]의 원조가 되는 영화구나'라고 느꼈어요. 약 45년의 간격을 두고 나온 두 영화는 논지가 거의 같습니다.
"동방에서 침략해온 포악한 전제정권에 대항해 자유를 위해 싸운 서방 민주진영의 쾌거!"
페르시아는 세계정복 야욕에 불타는 사악한 독재자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악의 제국이고, 거기 맞선 그리스는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자유진영의 보루라고 하는군요.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여러 나라로 쪼개져서 분열되어 있는 그리스가 '하나의 국가 공동체(요즘식으로 이야기하면 united states)'로 통일되기를 꿈꾸는 이상주의자ㅂ니다. 그런 이상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반대하는 출정에 자기 개인경호원 300명만 데리고 나선 모양이고요.
영화가 제작된 시기가 냉전이 한창이던 때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동쪽의 사악한 제국'과 거기 맞서는 '자유진영의 마지막 보루'가 각각 어디를 뜻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감이 오죠. 고대 그리스를 빗대서 현대의 미국을 찬양하는, 프로파간다의 향기가 솔솔 풍깁니다.
뭐 시기를 생각해서는 이해해줄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애초에 테르모필레 전투란 것 자체가 실제로는 패배한 전투를 훗날 포장하고 미화해서 프로파간다로 써먹어왔던 거고... 그래도 뭔가 한참 어긋나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소련을 페르시아와 동급으로 놓고 까고 있습니다만... 영화 속에서 미국과 동격이 되어있는 스파르타야 말로 20세기의 소련에 가까운 사회였단 말입니다. 그냥 '좋은 건 다 우리거' 식으로 갖다붙이다 보니 그게 모순이란 것 까지는 깨닫지 못했던 모양이죠.
거기서 그치지 않고, 40여년 후에는 [300 스파르탄]의 '정신적 후계자'로, 다시한번 스파르타와 미국을 동일시해서 자유 민주주의 만만세를 부르짖는 또다른 영화 [300]이 나왔으니(그 영화가 나왔을때는 악의 제국 소련이 이미 소멸된 뒤라서 소련 대신 미국의 주적으로 떠오른 중동권을 까는 내용이 되었죠. 또 마침 지리적으로도 현대의 중동지역이 과거의 페르시아와 겹치기도 하니...) 저쪽 사람들은 여전히 뭐가 잘못되어있는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묘한 점은, 그 중간 매개가 된 프랭크 밀러의 만화 '300'은 미국만만세라고는 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는 겁니다. 프랭크 밀러 만화에서는 빠졌던 원작영화의 미국찬양이 영화 [300]에서 잭 스나이더라는 무개념 감독의 손으로 다시 살아난 거죠.
예, 뭐 프로파간다든 뭐든 [300 스파르탄] 역시 오락물로서는 재미가 있습니다. 어찌되었거나 극적이고 재미난 이야기인건 맞잖아요. 이 이야기가 프로파간다로 널리 이용된 것도 근본적으로 재미있기 때문이죠.
영화의 스토리는 이쪽이라고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 물론 30분이면 끝날 이야기를 억지로 두시간으로 늘인 [300]에 비하면야 이야기가 좀 더 충실하긴 하지만 이 영화도 무의미한 러브스토리 같은 걸 끼워넣어서 상영시간을 늘이고 있는건 매한가지라... 그래도 바탕이 되는 사실이 재미있으니 역사서에 기록된 것들을 죽 나열한것 뿐이라 해도 재미 있습니다.
이 영화 역시 중요한건 전쟁장면 스펙터클이겠죠. 고전 영화의 종특인 물량으로 밀어부치기를 시전해 시원스러운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한계는 있는데, [벤허] 등의 초유명한 고전작품들에 비하면 스케일이 아주 크지는 않습니다. 그리스측 기록대로라면 백만이 넘는 인원이 동원된 전쟁이고, 작품 속에서도 페르시아군의 위세를 말로는 엄청 과장하는데('6일동안 페르시아군이 행군하는 것만 지켜봤는데 그것도 전체를 다 본 건 아니다.'라든가...) 실제 그림으로 보이는 건 그렇게까지 위압적이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말로 과장하는 걸 곧이곧대로 CG로 재현해버리는 그런 시대에 보기에는 스케일 면에서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죠.
액션 연출은 좋은 편입니다. 엑스트라 통제가 제대로 안된 감이 살짝 들기도 하지만, 50여년 전에 나온 영화니 지금 보기에 불만스런 부분이 있는 거야 어쩔 수 없는 거고, 온통 CG질에 프레임수 조작에... 자연스런 그림이나 움직임을 보기가 힘들어진 요즘 영화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직접 몸으로 부딛히며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이라는 면에서 구닥다리 영화만의 메리트가 있기도 하죠.
그렇지만 아쉽게 생각되었던 건, 양측의 대치 상황을 설득력있게 그려내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인지 그리스연합군의 규모를 축소시키고 있는데다, 스파르타측 300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화면에 잡지도 않고 있어서 얼핏보면 정말로 300명만 싸운것 같은 인상을 주게됩니다. 단지 300명이 페르시아의 압도적인 병력을 막아낸 것처럼 보이게 되니 극적일지는 몰라도 너무 뻥이 심해보이죠.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거라고는 해도, 페르시아 군이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그리스군을 공격하다가 매번 깨지기만 하는 것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당시 그리스군이 턱없이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막아낼 수 있었던 건 지형의 덕을 톡톡히 보았기 때문이기도 한데, 병목처럼 좁은 길목을 막고 서서는 적이 압도적인 물량의 우세를 제대로 살릴 수 없도록 했던 거죠. 영화속에서는 연출상의 편의때문이었는지 그런 지리적인 상황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고 그냥 넓은 평지에서 양측이 대치하는 것처럼 보여서, 압도적인 병력우세를 자랑하는 페르시아군이 매번 지기만 하는 이유가 쉽게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페르시아군의 입을 통해 '스파르타군이 너무 짱세다'라는 부분만 강조하고 있어요. 아무리 스파르타군이 특급 전사였다고만 해도 고작 수백명이 백배천배 되는 병력을 상대로 싸워서 매번 이기기만 한다는 게 말이 안되잖아요.
근데... 그렇게 매번 지기만 하면서 분해하는 크세르크세스의 모습을 보면서 [마징가 제트]의 헬박사가 겹쳐보여 재미나기도 했습니다. '왜 헬박사는 한꺼번에 전투수를 있는대로 다 보내서 광자력 연구소를 초토화시키면 바로 끝날걸 꼭 한번에 한대씩만 보내서 매번 깨지는가...' 딱 여기서의 크세르크세스가 그런 모습입니다.^^;
글고 뭐... 설득력이 떨어진다고는 해도 '닥치고 근육으로 돌격'에 비하면 많이 사실적이긴 해요^^
[300 스파르탄]은 영화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명작도 아니고 아주 빼어나게 잘만든 작품도 아닙니다. 그냥 그리스/로마 사극이 최고의 오락이던 시절에 나왔던 한편의 오락물이죠. 우리가 왕년에 유행했던 작품군들 중에 유명한 몇개만 알지 나머지 작품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지는 못하잖아요.
[300 스파르탄]은 그래도 후계자라 할 수 있는 [300]이 나오면서 재조명받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렇고, [300]이 나온 2006년 이후로 [300 스파르탄]을 보게 되는 사람이면 이 영화와 [300]을 떼놓고 생각할 수는 없겠죠. 앞으로도 [300]이 기억되는 동안은 [300 스파르탄]은 덤으로 계속해서 거론되고 비교가 될 겁니다.
[300]이 역사에서 소재를 얻어왔지만 고증이라는 측면에서 워낙에 개판이다보니, 그 반동으로 [300 스파르탄]이 더 높은 평가를 받게된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300]의 황당한 환타지 전쟁에 벙쪘던 분이라면 [300 스파르탄]에서 테르모필레 전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었는지, 좀 더 사실에 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도 비뚫어진 편견과 착각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짚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테르모필레 전투에 대해서는 적어도 그 사건을 '서방 민주주의와 동방의 무식한 전제정권의 대립'이라는 시선이 아닌 좀더 객관적인 관점에서 그려낸 다른 작품이 앞으로 나와주길 바래요.
프랭크 밀러가 이 영화를 자신의 창작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이라고 공언했다하니, 밀러의 팬이라면 과연 이 영화가 밀러 소년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탐구해볼 수도 있겠고, [300 스파르탄]에서 만화 '300', 영화 [300]으로 변이하는 과정을 추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수 있겠네요.
요즘 영화의 CG 도배에 지친 사람이라면 예전 영화의 무식한 물량공세로 만들어낸 스펙터클에서 재미를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뭐 이래저래해서, 한번쯤 볼만은 한 영화인 것같아요.
복근은 안보여주는 레오니다스
관대하신 분
관대하신 분의 친위대.
졸병들과 지휘관의 투구 모양이 다른데 이게 고증오류라고 하더군요. 저렇게 얼굴이 트인 건 로마식에 가깝다고... 배우들의 얼굴을 보여줘야한다는 문제 때문에 알지만 고증을 씹어버린 경우인가 봐요.
글구...
테미스토클레스와 아르테미시아 여왕
관대하신 분....인상 좋네요..^^
궁금했던 영화였는데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