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F] 더 스퀘어 [The Square, 2017] 자세한 후기(스포O)
' The Square' . 그곳은 관심과 돌봄, 책임, 평등의 공간이다. 예술작품의 공간이기도 한 그 사각형의 모양. 사실 이 사각형이 유난히 강조되는 또 다른 공간이 있다. 바로 아파트의 계단의 가운데 뻥 뚫린 공간이다. 아파트는 수직으로 집을 짓는 곳이기 때문에 계단이 필요하고 그 계단은 아래와 같이 생겼다.
그리고 이 계단들이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면 위에서 보면 아래 그림처럼 사각형 모양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예술공간의 'The Square' 에서 주택공간인 'The Square' 로 이동한다. 그러니까 예술(예술인)과 사회(일반인) 의 어떤 관계를 말하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첫 장면을 떠올려보면 주인공인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가 소파에 누워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일어난다. 그리고 인터뷰에 응하면서 첫 질문을 받게된다. 그 질문은 예술에 관한 상당히 복잡한 문장이다. 물어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한번에 알아듣기에는 상당히 난해한 그런 문장이다. 질문을 받은 수석 큐레이터는 당황하다가 약간 더듬거리며 답변을 한다. 사례를 들며 예술작품의 비공간성과 공간성에 대한 설명(떠올리기로는 ' 예를 들면 기자님의 그 가방이 예술세계로 들어오면 어떤 공간을 획득하는데 그것이 공간성이다'라고 설명했던 기억이다. ) 을 한다. 하지만 기자는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그래서 기자는 형식적으로 ' 아.. 알겠습니다.' 라는 답변과 함께 그 대화는 끝이 난다. 얼마나 웃긴가. 큐레이터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문장을 미술관에 설명이라고 써놓고 사람들에게 이해하기를 기대하다니. 현학적이고 어려운 단어만을 사용하는 예술계의 언어를 희화화했다는 느낌이었다. (후에 나오지만 이 여기자는 남자의 그 권위와 지식, 명예를 욕망해서 남자와 잔다. 반대로 남자도 그 여자를 정복한다는 마음에서 단순한 마음에서 잔다. 서로가 서로를 욕망하는 이유에 대한 논쟁장면이 영화 중반이후에 나오는 데 인상적이다.)
위의 기자와 큐레이터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떠올려보자. (미술관 내에서도 깔끔하고 )공식적인 자리이다. 반면 (영화의 첫장면인) 미술관 내부의 본인의 방에서는 어떠한가. 평범하고 소탈하다. 격식없이 자고 있다.(자는 데 격식 있이 자는 사람이 있을까)
마치 그 다음장면에서 본인이 설명하는 '예술작품의 비공간성과 공간성' 에 대한 설명처럼 예술관 내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지식을 뽐내고 권위있게 또 멋을 내며 사람들에게 예술작품을 설명한다. 반면 그 이외의 공간에서는 예술공간에서의 말과는 다르게 아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때때로는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때리기도 한다(어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 남자의 행동 자체가 공간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 자신이 말한 비공간성과 공간성에 대한 암시가 이런 것일까. 여러모로 첫 장면의 어떤 암시는 되새겨볼 필요가 있어보인다. '위선'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다른 인상적인 장면들도 많지만 일단 건너뛰고 연회장에서 어떤 사내가 원숭이 연기를 하는 그 긴 분량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이 분량이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이자, 상징적인 장면이 아닐까. 영화 보면서 '뭥미' 했다 ㅎㅎ 지금도 그 의미를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추측해보려 한다.
사회자가 외친다. 움직이지 않는게 규칙이고 움직이면은 원숭이가 잡아먹는다 (?)(자세한 멘트는 기억나지 않네요) 이 말이 끝나고 원숭이 연기를 하는 어떤 사내가 등장한다. 이 사내가 누군지 앞장면에서 소개가 나오지만 기억나지 않으므로 그냥 사내라고 말해야겠다.(제가 정신이 잠깐 fade out 되다가 다시 돌아오는 순간이어서ㅠㅠ) 그 사내는 원숭이 연기를 하면서 처음에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그러다가 연회장의 어떤 남자와 신경전을 벌인다. 마치 서로 처음 만난 원숭이들처럼 신경전을 벌인다. 상황은 심각해지고 끝내는 남자가 화를 내며 연회장을 뛰쳐나간다. (소통의 문제일까. 하지만 사람들은 제지하지 않는다. 이곳은 예술의 공간이자 일종의 게임이 벌어지는 곳이다. 한 사람이 신경질이 나서 나가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게임의 규칙이자 또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지 않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지도 모른다. 잘못되고 이상하다면 말려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말리지 않는데 내가 왜' 라는 마음에서 그 사내의 난폭한 행동을 아무도 제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사회의 한 모습임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원숭이 연기를 하는 사내가 더 난폭해진다. 어떤 여자를 옷을 찢고 강간을 시도한다. 그러자 그 여자의 남편 혹은 아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나와 말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갑자기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서 그 사내를 제지한다. 사람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이제야 인지한걸까. 아니면 어떤 사람이 나서서 옳은 행동을 하기 시작하자 뒤늦게 동조하는 것일까. 추측컨대 그 장면은 사람들의 어떤 고상함, 예술을 위시하는 것의 위선을 비판하려고 그런 상황을 부여한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사실 욕망의 동물일지도 모른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공적인 언어, 역할, 태도로 행동하고 또 자기주장,욕망을 억제한다. 하지만 그 원숭이를 연기하는 사내나 연회장의 사람들은 사실 똑같다. 우연히 맘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탐하고 싶고, 맘에 안드는 남자를 보면 싸우거나 없애버리고 싶고.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이 그 사람들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연회장의 그 사내는 연회장 사람들의 사적인 모습이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공적인 연기를 하고 있다. 지식과 예술을 위시하지만 사적인 공간에서는 공적인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행동하곤한다.
주인공이 소매치기를 당할 때 상황을 떠올려보자. 어떤 여자가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흘낏 쳐다보기만 하고 갈길을 간다. 3번정도 그런 상황이 반복된다. 무관심에 대한 희화화 이자 타인의 위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 주인공인 수석큐레이터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핸드폰과 지갑을 찾기 위해 아파트의 모든 세대에 협박편지를 보내고, 그 여파는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물건만을 생각한다. ‘더 스퀘어’ 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미술관에서 설명하는 그 큐레이터가 실생활에서는 얼마나 위선적으로 행동하는지. 그 협박편지로 집에서 부모님에게 도둑으로 오해 받고 외출금지를 당한 소년의 말을 사소하게 무시하는 태도에서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것이 비단 그 사람만의 문제일까.
영화에 이런 장면도 있었다. 연단에서 말을 하는데, 수석 큐레이터가 말하면 모두가 귀 귀울여 듣는다. 반면 요리사가 오늘의 요리에 대해 설명하면 모두가 무시한채 식사를 하러 나간다. 그러자 요리사가 자신의 말을 들으라며 화를 낸다. 그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이다. 즉 예술에 관한 것들은 권위를 가지며 관심있게 귀 귀울이지만, 다양한 사람들에게 관심과 존중을 강조하는 ‘더 스퀘어’ 전시물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도 그 다음에 말을 하는 요리사를 무시한다. ‘가치’ 가 그 자체로써만 의미를 갖고 사람들에게 행동을 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예술’이 어떤 주장을 하면 사람들은 위시하지만 그 공간을 나오면 다 잊게 된다. 예술은 전시되어있을뿐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쯤 기자회견장에서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질문들. 미술전시의 유투브 홍보 동영상에서 ‘더 스퀘어’ 전시물 안에 아기가 불타는 모습에 대한 논란에 대해 사과를 하려하자 이 또한 표현의 자유와 자기검열에 대한 억압이라고 항의를 받는다. 항의를 하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사적인 주장과 본인의 공적인 주장이 일치되어야하고 논란이 있어도 일관성 있게 밀어붙여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검열을 비판하고 표현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주인공은 ‘ 공적인 역할에서의 언어와 사적인 생각과는 구별지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 그것이 그 논란이 되는 ‘ 더 스퀘어’ 에서 아기가 불타는 영상(실제가 아니지만) 에 대해 사과하는 이유라고 한다.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말하는 주인공 본인도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모른다. 그냥 입장문이 오면 읽고 그런 것이다. 피상적인 지식의 이해. 사람들이 공적인 언어를 통해 오히려 자기 진정성은 사라지고 위선만 늘어간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람들은 자기 진심을 속이며 연기를 한다.
마지막에 뒤늦게 진심으로 사과하려고 그 아이를 찾으려 하지만 이미 이사를 갔다. 결국 실망하며 집으로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계속해서 자신의 아이를 쳐다보며 영화가 끝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에게 '더 스퀘어'의 가치는 무엇일까. ‘더 스퀘어’가 말하는 ‘평등한 권리’ ‘도움’ 은 하나의 전시품일까. 그 현대 사회에서 ‘위험에 처한 타인을 도운다’ 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전시’되어 가고 있지는 않을까.(타인의 도움에 대해 사람들을 구경하게 만들뿐)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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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봤는데 노잼이라 내용이 무슨내용인가 하고 이글을보니 쪼금 알거같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