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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Dilbert Dil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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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남자가 있습니다. 수학자이자 현직 대학교 조교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인상을 지닌 사람이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가장 골치 아픈 부류의 남자에요. '유도리'를 부릴 줄 모르기 때문이지요. 남자는 재직하고 있는 대학교의 입학시험 문제에서 오류를 발견하자 이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를 요구했으나 학교측은 이를 거부합니다. 그 다음해 남자는 부교수 승진에서 탈락했으며, 곧바로 계약기간 만료라는 명목으로 조교수직에서 해임당해요. 이 유도리 없는 남자는 논문심사과정이 부당하게 진행되었음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으나 교수임용권은 학교의 재량이라는 논리로 연거푸 지게 되자 평소 취미로 즐기던 석궁을 들고 담당판사를 직접 찾아가 그를 '꾸짖는' 방법을 택합니다. 아, 보면 볼수록 요령없는 사내에요.

 

 각설하고, [부러진 화살](이하 [화살])은 이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일반적인 법정영화에서는 이 사건을 둘러싸고 사건을 은폐, 혹은 왜곡하려는 악의 세력과 이에 맞서는 순결한 집단간에 벌어지는 지능적인 대결을 보여주겠죠. 혹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체제 내부에서 압박받는 피해자의 자위권 행사에 대해 웅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살]은 그 길을 가지 않습니다. 대신 공판과정을 훑어내려가며 이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주체들을 '까는 데' 집중해요. '법정실화극'이라고 광고하고 있으나 여기서 액센트는 '법정'보다는 '실화'에 맞추어야 합니다.

 

 대체로 법조장르물의 속성이 그렇지만, [화살]이 노골적으로 풍자고발극의 형태를 취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외적인 부분에 기인하지요. 이 사건을 둘러싼 검찰과 사법부의 행태는 어이가 없다 못해 방귀가 나올 지경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증거물을 제출해놓고 과학적인 부분이라고 우기지를 않나(실제 사건의 배경은 겨우 몇년전이다. [살인의 추억]때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증거물을 분실하지 않나, 게다가 사법부는 증거의 확충을 요구하는 피고측의 요청을 누가 봐도 고의적인 태도로 묵살합니다. 그러니까, 낄데 안낄데 구분 못하고 지엄하신 사법부의 권위에 기스를 낸 꼴통에게 쓴맛을 보여주자는 업계종사자들간의 암묵적인 합의인게지요.

 

 실제 사건의 전말이 이따위다 보니, 이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인물을 희화화 시키지 않더라도 자연히 이야기의 분위기는 개그물 비스무레하게 흘러갑니다. [화살]은 이 부분에 주목하구요. 증거수집이나 변론작성, 그 와중에 일어날 수 있는 인물간의 갈등은 최소한으로 줄입니다. 예를 들어 극초반에서 김명호와 박변호사간의 대립이 나오지만, 이는 긴 싸움중에 일어나는 균열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인물을 관객에게 명확히 인지시키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 작용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에피소드가 이런 식으로 사용됩니다. 해서 이런 '부수적인' 요소들을 러프하게 치고 나가면서 [화살]은 큰 줄기인 공판의 진행에 촛점을 맞추어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법체계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데' 집중합니다.

 

 이렇게 스트레이트한 진행은 적어도 본작에서는 그 힘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상영시간이 제법 길고 대부분의 신이 법정을 배경으로 촬영되었어요. 자칫 단조로움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나 중심인물의 존재를 집중적으로 각인시키고 이들을 중심으로 툭툭 끊어치는 흐름으로 구성된 이야기 전개는 상영시간 내내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하더군요. 게다가 극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자잘한 유머신들은 [화살]을 고발극임에도 불구하고 [도가니]나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와는 달리 꽤나 명랑한 분위기로 끌고 가는데 일조합니다. 문제는 이 유머신들이 양날의 칼로 작용한다는 거에요. 몇몇 장면들은 그야말로 깨알같은 재미를 안겨주지만, 개중 반 정도는 '음 내가 이걸 보고 웃어야 하는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더군요. 때때로 어떤 장면들은 큰 흐름 사이를 부드럽게 넘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아 이쯤에서 한번 웃겨주고 넘어가야지'라는 계산이 보이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살]은 좋은 영화입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직시하고 분노하며 때로는 이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합니다. 가끔 손발이 오그라드는 면이 없진 않지만, [화살]은 이 모든 것이 결국 정의로운 길로 나아가게 될것이라는 희망을 견지하고 있어요. 아울러 법조물이 가지고 있는 장르적 재미 또한 놓치지 않구요. 바람직하고, 따뜻하며, 재미있습니다.


 


 

뱀발 : 하지만 제일 손발이 오그라드는 부분은 엔딩크레딧에 나오는 노래였어요. 이봐, 이건 반올림 5탄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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