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 smell of success (1957) 가장 느와르적인 걸작. 스포일러 있음.
느와르는 검다는 뜻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사회의 모습을 지극히 차갑고 비정하게 그린 영화들이 필름 느와르다. 하지만 겉만 비정하고 속으로는 감상적이고 여린 영화들이 많다. 그들은 겉보기의 비정함을 "쿨해 보이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 영화 sweet smell of success 는 진짜 필름 느와르다. 비정하고 차갑고 사회의 가장 어두운 모습을 해부한다.
짐승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개기름 번들거리는 욕망을 쫓아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으려 하는 영화다.
누군가 "버튼을 누르면 1달러를 받는 대신, 네가 모르는 누군가가 죽게 된다"는 기계를 준다면, 1달러를 받기 위해 버튼을 백만번 누를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이룬다. 비열하고 비정한 구성원들의 인성을 그대로 반영해서, 이 사회도 약육강식, 비열, 비정, 차가움으로
가득하다. 이것이 이 영화 sweet smell of success 의 세계다.
토니 커티스는 젊고 야심찬 press agent 다. 거물 버트 랭카스터의 딱가리를 해주면서 그에게 빌붙어 산다. 버트 랭카스터는 미국대형신문사에 컬럼을 오랫동안 연재하고 있는, 이 세계의 권력자이자 지배자이다. 그는 토니 커티스가 어떤 기업의 홍보를 부탁해 오면, 자기 컬럼 한 구석에 그것을 언급해준다. 토니 커티스는 버트 랭카스터가 던져주는 고기 쪼가리를 먹고 사는, 권력구조의 최하층민이다. 그는 젊고 야심차고 비열하다.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 남을 파멸시키는 일까지 주저하지 않고 해낼 사람이다.
토니 커티스는 자기가 젊고 능력 있고 야심차서 다른 많은 최하층민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다른 많은 최하층민들도 딱 토니 커티스 같다.
버트 랭카스터는 이것을 꿰뚫어본다. 그래서, 그는 토니 커티스를 경멸하고 인간 취급도 안 한다.
"능력도 안 되면서 날 물어뜯을 생각만 하는 들개같은 놈이다"라는 것을 잘 아니까. 속을 훤히 들여다본다.
버트 랭카스터도 권력만 가졌을 뿐, 똑같은 사람이다.
그는 어느날 토니 커티스더러 만나자고 한다. 자기 누이동생이 있는데, 어느 재즈기타리스트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누이동생이 그 남자를 단념시키도록 그를 파멸시켜 달라고 한다.
세상 모든것을 경멸하는 버트 랭카스터에게 딱하나 남은 애정의 대상이 자기 누이동생이다. 시스터 컴플렉스같은
것이다. 차갑고 비정하고 지성적이고 자기 외에는 모두 경멸하는 버트 랭카스터는 사실 혐오스런 변태다.
자기가 변태라는 것을 숨길 생각도 없다.
그렇다고 누이동생을 행복하게 만드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자기 마음대로 온실에 가두고 자기 마음대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행복하게(?) 살게 조종해야 직성이 풀린다.
자기 누이동생을 자기 우리에 가두어두자고 전도유망한 기타리스트를 파멸시키겠다는 버트 랭카스터나
그것이 좋은 기회라고 기뻐서 달려드는 토니 커티스나 똑같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토니 커티스가,
무고한 전도유망한 기타리스트를 파멸시키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이야기다.
우리가 필름 느와르에서 기대하는 세계가 펼쳐진다. 담배연기 자욱한 재즈클럽, 뒷거래가 오고가는
어둡고 더러운 복도, 사회 밑바닥의 비뚤어진 사람들, 이유 없는 폭력, 뉴욕의 황량한 거리, 비정하고 잔인한 현실 등. 토니 커티스는 이런 세계에 적응해서 거기에서 성공하고자 발버둥치는 사람이다. 어쩌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도 마찬가지 사람들일 지 모르겠다. 토니 커티스는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지극히 전형적이고 평범한 들개다. 버트 랭카스터는 그를 어떻게 이용하면 되는지 잘 안다.
그는 버트 랭카스터가 한번 쓰고 버리는 장기말들 중 하나다. 장기말이 되어 한번 쓰여지고 버리기에 딱
최적화된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권력층의 최하층민인 토니 커티스에게도 밑에 사람들이 있다.
그에게 붙어사는 클럽에서 담배를 파는 소녀는, 토니 커티스에게 자기 자리를 보호해달라고 부탁한다.
버트 랭카스터에게 그렇게 비굴했던 그는, 소녀에게는 또 냉혹하고 경멸하는 태도로 대한다.
토니 커티스는, 자기가 가진 껍데기같은 권력이라도 약자에게 휘두른다. 아마 그녀에게서 성상납을 받을 것이다.
버트 랭카스터가 토니 커티스에게 권력을 나누어줄 리도 없고,
토니 커티스는 이용만 당하다가 비정한 구렁텅이 속으로 파멸해 떨어질 것이 자명하다.
관객들은 처음부터 이것을 짐작한다. 오직 토니 커티스만 모른다. 자기는 야심만만하고 잘 벼려진 칼날처럼
예리하고 들개처럼 민첩하니까, 자기만은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야말로 딱 파멸하는 사람들의
전형이라는 것을 모른다. 다 이렇게 생각하다가 굴러떨어졌다.
그는 차가운 뉴욕의 길거리에서 경찰에게 곤봉으로 얻어맞고 끌려간다.
이 영화에서 유명한 장면이 버트 랭카스터가 자신의 펜트하우스에서 뉴욕의 밤거리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승자로 위풍당당하게 뉴욕의 밤거리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절망에 일그러지고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네가 날 집어삼키고 발기발기 찢고 있구나" "네가 나를 왜곡되고 혐오스런 인간으로 개조하고 있구나"
하는 표정으로 일그러지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뉴욕의 밤거리를 내려다본다.
권력은 권력을 휘두르는 자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타락하게 만든다. 버트 랭카스터도 불안하고 불행하다.
그의 위에 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버트 랭카스터 또한 그에게서 멸시받고 고통받으며 살고 있다.
필름 느와르의 가장 걸작이 뭐냐 한다면, 개인적으로 이 영화라고 대답한다.
가장 필름 느와르의 정의에 충실하다. 쿨해 보이기 위해 느와르를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검고 역겹고 비정하다. 토니 커티스와 버트 랭카스터를 통해서 더 큰 사회를
상징적으로 잘 그려낸다. 두 사람 간 벌어지는 일이지만, 영화가 잘 만들어진 까닭에
아주 거대하게 느껴진다. 사회나 윤리같은 거대한 주제들이 영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잘
떠오르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싫든 좋든 "사회란 무엇인가?" "이 사회에서 버트 랭카스터나 토니 커티스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같은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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