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나의 것 (1979) 살인을 통해 이 남자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스포일러 있음.
복수는 나의 것이
당시 사회에 얼마나 충격을 주었을 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주인공 에노키즈는 연쇄살인범이다.
뭐 이거야 연쇄살인범을 다룬 영화는 많으니까 특별할 거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살인은 좀 과하게 말하자면, 최근 벌어진 신촌역 칼부림 사건 CCTV 비디오 수준이다.
칼로 한번 푸욱 찌르면 죽는 것이 아니라, 안 죽는 것을 사오십번 난자해서 죽인다. 그 동안 피해자는
온갖 고통과 공포를 맛보면서 살려달라고 에노키즈에게 애걸한다. 이것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묘사되어서
당시 사회의 갖은 지탄을 받았을 것 같다.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딸때문에 못 죽겠다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남자나,
그런 부탁을 못 들은 체하고 죽을 때까지 수십번 칼로 난자해 죽이는 에노키즈나 지극히 현실적이다.
왜 이런 에노키즈를 주인공으로 했는지, 그리고 왜 살인장면을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자세하게 할 필요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살인이라는 것이 왜 잔악한 범죄인지 뼈 저리게 느끼게 만든다.
인간의 의지라는 것도 얼마나 연약한가? 칼로 혈관을 잘근잘근 썰어 놓으면, 그 어떤 초인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도 힘 없이 죽고 만다. 의지의 힘으로 버티며 남들보다 1초라도 더 살고 죽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의지, 숭고함, 고귀함같은 것은 다 허상이고 과대포장이다.
왜 이런 불편한 진실을 감독은 관객들에게 뼈 저리게 느끼게 만드는 걸까?
이 영화에서 에노키즈는 히어로도 안티히어로도 아니다. 영화는 아주 건조하게 그의 살인행각을 쫓아간다.
에노키즈는 영웅적으로 그려지지도 않고 찌질하거나 잔악하게 그려지지도 않는다. 그냥 살인을 있는 그대로 다큐멘터리적으로 그려낸다. 설명도 해석도 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혼동스럽다. '감독은 우리더러 이 살인행각을 보면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헨리 연쇄살인자의 초상처럼, 에노키즈만을 쫓아가면서 그린 그런 영화는 아니다.
에노키즈를 그렇게 몰고 간 사람들은 그의 아내와 아버지다.
독실한 천주교 집사인 에노키즈의 아버지는 에노키즈가 데려온 며느리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적이고 카리스마가 있고 종교신념에 따라 일상을 영위하는 에노키즈의 아버지는 아들을 간섭한다.
하지만 에노키즈가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가자,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욕정을 토로하며 나체로 덤벼든다.
수줍고 연약한 것 같던 며느리는 성적인 주도권을 가진다.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쫓아 버리지도 않고, 제압하지도 않는다. 가령 며느리가 나체로 덤벼들면 자기도 흥분해서 헉헉거리다가 최후의 순간에 도망가 버리는 식이다.
며느리의 성적인 권력 아래 시아버지는 무력하게 종속된다. 시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죽고 만다.
잡범으로 교도소에 갔다가 온 에노키즈는 아내와 아버지 간 근친상간 때문에 자기 자리가 집에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집을 나간다. 그 이후, 에노키즈는 연쇄살인마가 되어 세상을 떠돈다.
이 말인즉, 에노키즈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현상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아내와 에노키즈의 비중은 4:6 정도이다. 이 영화를 그냥 에노키즈의 범죄물이라고 생각하고 본 사람은, 아버지-아내의 근친상간이 에노키즈만큼이나 큰 비중으로 등장하는 데 놀랄 것이다.
에노키즈에게 강X을 당하고 정조관념 때문에 그와 결혼당한 아내는 시아버지에게 성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그를 위압한다. 견디다 못한 시아버지가 동네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며느리를 강X해달라고 한다. 욕구를 풀어주어서 자신에게 덤벼들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며느리가 한 수 위다. 동네 아저씨랑 섹X하면서 아버님 아버님하고 큰 소리로 신음을 지르는 바람에, 동네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근친상X을 알게 된다.
여기서 에노키즈의 아내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처음 에노키즈가 데려온 여자를 보고, 천주교도가 아니라며 비난하던 근엄한 원칙주의자 아버지는 사실 얼마나 연약하고 심지가 얕고 위선적인가? 이것은 또 무엇을 상징하는가? 에노키즈의 아내와 아버지 간 근친상간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든, 이것이 에노키즈를 낳은 것이다.
제목 그대로 복수는 나의 것이다. 에노키즈가 복수하는 대상은, 아버지와 아내일 수도 있다. 혹은, 아버지와 아내가 상징하는, 사회적인 그 무엇일 수도 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지는 수수께끼 장면도 이런 면에서 보면 설명된다.
아버지와 아내는 에노키즈의 뼈를 바람에 날려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에노키즈는 그들을 떠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악몽으로서 혹은 죄악을 상기시켜주는 아픈 상처로서 달라붙어 있으려고 한다.
그들의 대사에 따르면, 에노키즈의 뼈를 바람에 날려 보내고, 홀가분하게 진짜 결합하려고 한다. 그런데 에노키즈의 뼈가 바람에 날아가 버리지 않는다.
에노키즈는, 아내와 아버지에게,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악몽이 아니다. 늘 현재진행형으로 그들에게 달라붙어 있는 사건이다.
세상을 떠돌면서, 에노키즈는 자신이 피도 눈물도 없이 살해해야 할 대상들을 만난다.
하지만 여관집 여주인 하루와 그 어머니 히사노는, 에노키즈만큼이나 세상에 복수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히사노는 군국주의 희생물이다. 히사노는 전쟁 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는다. 그 때문에, 히사노는 마을사람들에게 인간 이하 취급을 받고 공공연하게 모멸해도 좋을 이지메 대상이 된다.
여관집 여주인 하루는 재일교포다. 마을사람들에게 경멸을 받으며 산다.
히사노와 하루는, 자기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마을 유력자에게 몸을 팔고
그의 스폰으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해 간다.
하지만 그들은 에노키즈처럼 살인을 저지르거나 할 용기는 없는 사람들이다. 자살할 용기도 없고.
그들은 자기 학대와 자기 모멸에 빠져든다. 그들은 에노키즈의 정체를 알게 되자, 무서워하기는 커녕, 기뻐하고 반긴다.
당시 일본사회를 정교하게 상징하고 비판하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에노키즈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그런 괴물을 낳은 에노키즈의 아내-아버지에 대한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당시 일본사회가 괴롭히고 이지메하던 하루-히사노에 대한 영화이기도 할 것이다.
에노키즈는 정직하게 그들을 투영하는 계측기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에노키즈의 잔학한 살인행각은 에노키즈의 아내-아버지의 죄를 정직하게 반영한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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