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츠온천 (1962) 참 아름다운 멜로드라마. 스포일러 있음.
전통적인 아름다운 일본 고전 멜로드라마이면서 동시에 카프카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영화이기도 하다.
형식적으로는 우아한 멜로 드라마이지만, 그 내용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닿지 못하고 평생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계속한다는 이야기다.
피천득의 운명에 나오는 내용처럼 이 두 남녀가 평생을 두고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하는 슬픈 인연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카프카의 소설 성에 나오는 부조리한 상황에 가깝다. 두 남녀 주인공의 관계는 수십년에 걸쳐 이어진다. 하지만 남자는 몇년에 한번씩 여자를 찾아온다. 그리고 떠난다. 남자는 결혼도 다른 여자와 하고, 거기에 더해서 여러 여자들과 바람도 피운다. 하지만 몇년에 한번씩 주인공 여자를 찾아 아키츠온천으로 온다. 그렇게 사랑한다면 왜 여자주인공을 떠나는가? 떠났다면 몇년에 한번씩 돌아와 여자주인공과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이유는? 모호하고 부조리스럽고 두 남녀의 사랑이 잘 포착되지 않는다. 그런데 굉장히 낭만적이고 아름답고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서글픈 사랑이야기임에는 또 틀림없다.
시대가 2차 대전 말기 일본 패망부터 시작해서 1960년대 혹은 1970년대까지다. 슈사쿠라는 대학생이 공습으로 폐허가 된 집에 돌아온다.
슈사쿠는 집도 가족도 없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그는 불치병인 결핵을 앓고 있었다. 갈 곳도 없이, 그는 무작정 기차에 탄다. 기차 짐칸에 짐짝처럼 쌓여진 사람들 속에서 먹을 것도, 가족도,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목적지도 없다. 미군 비행기가 다가온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다 기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친다. 하지만 슈사쿠는 희망도 없이 그냥 기차에 앉아 있다. 그 모습을 본 어느 여인이 자기가 일하는 아키츠온천에 가자고 한다.
굉장히 조심스럽고 고전적 아름다움을 한껏 풍기는 식으로 영화가 구축되어 있다. 여주인공 신코 역을 맡은 여배우만큼이나 아름답고 우아하다. 지금은 사라진 고풍스런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있다. 이 장면까지만 보아도 이 영화가 평범하지 않은 영화임을 알 수 있다. 아키츠온천의 세계 속으로 관객들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있다. 벚꽃이 만발하고 깨끗한 계곡물이 흐르고 산중턱에 나무로 만든 아주 오래된 아키츠온천 여관 건물이 있다. 꼬불꼬불 산길을 돌아들어올 수 있는 길이다.
슈사쿠는 아키츠온천에서 온천여주인 딸 신코를 만난다. 발랄한 소녀 신코는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전쟁 통에 이 시골구석 온천에 와서 답답하게 산다. 둘은 벚꽃이 만발한 온천여관과 동산을 거닐며 서서히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평범한 멜로드라마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슈사쿠는 늘 죽음을 직면하고 위태롭게 살아간다. 그는 자살할 결심을 하고 신코에게 동반자살해달라고 애원한다. 이 이후 이 영화의 주제는 동반자살임이 드러난다. 남자는 자기 인생에 미래가 없음에 절망하여 동반자살하려 하고, 여자는 별 이유 없이 남자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 하나에 동반자살을 결심한다. 슈사쿠나 신코나 별 생각 없이 동반자살하자고 약속한 것이라, 이 서툰 동반자살은 해프닝으로 끝난다. 하지만 동반자살은 이 영화 내내 모티브가 된다. 슈사쿠는 영화 속에서 수십년에 걸친 자살을 한다. 영혼이 죽어가기도 하고, 생명력을 의미 없이 탕진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성공한 후에는 순수성과 인격을 잃어가기도 한다.
사실 이 영화는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랑의 순수성을 지켜간다는 그런 말랑말랑한 내용이 아니다. 슈사쿠는 사랑도 탕진하고 생명과 순수성도 탕진하고 초로의 세속적 노인이 된다. 그들이 평생을 두고 교환한 사랑은 술자리에서 안주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정도로 초라해진다.
평생을 결혼도 않고 아키츠온천을 지키던 신코는 갑자기 슈사쿠에게 동반자살을 하자고 한다. 슈사쿠는 무기력한 목소리로
"생명도 자살도 이미 다 살아버렸어"하고 대답한다. 그들은 삶도 죽음도 다 탕진해 버렸던 것이다. 동반자살하자고 매달리는 신코를 뿌리치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슈사쿠는 떠난다. 신코는 혼자 손목의 혈관을 끊는다. 슈사쿠는 그것을 보고 황급히 돌아와 신코를 구하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슈사쿠는 신코를 안고 목놓아 운다. 무기력한 노인이던 슈사쿠는 삶의 비극을 되찾는다.
그들은 서로를 구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이 나눈 사랑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사랑하되 상대방을 구속하지 않고,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구속당할 생각도 없고, 대부분의 시간은 서로를 떠나, 다른사람과 결혼도 하고 바람도 피고 사회적 업적도 쌓고 그러다가 며칠씩 돌아와 재회하는 그런 사랑 말이다. 남자는 둘이 사랑을 시작할 즈음에 폭발한다. 폐결핵에 절망하여 동반자살하자고 신코에게 조르던 그 장면에서 말이다. 신코는 둘 사이 관계가 끝나갈 때쯤 영화 마지막에 폭발한다. 동반자살하자고 슈사쿠를 붙잡고 매달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중간 - 영화 대부분 동안, 그들의 성격이나 말 그리고 사랑은 뭔가 포착할 수 없이 애매하고 몽롱하고 싸늘하지만 따뜻하다. 마치 이 영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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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감사합니다!
포스터 아름답네요.
다자이 오사무스런 느낌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