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린의 발라드 (1977) 이런 영화를 걸작이라 부르지 않으면 무엇을? 스포일러 있음.
오린의 발라드는 한 인간에 대해 이렇게 아름답고 설득력 있게 그릴 수 있는지 감동 받은 작품이다.
우리나라 영화들 중 가장 비슷한 작품을 굳이 꼽으라면 김동리 원작 영화들 - 역마나 무녀도랄까?
1930년대 일본 군국주의가 절정으로 치달아가는 그 때, 장님 방랑연주자 고제 오린의 일생을 그린 것이다.
장님이니까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세상은 군국주의로 치달아가는데, 오린에게는 그냥 깜깜한 전근대주의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다.
까마득한 전통의 세계 - 고제는 부처님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보지 말라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사람들이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행복을 주는 부처님같은 존재들이다. 예술의 세계에 정진하는 사람들이고, 남자와 동침하는 것은 안된다 - 속에서 오린은 산다. 자기 바깥 세상은 어떻게 되든 말이다.
그런데 오린은 고제들 집단에서 보호 받으며 그 일원으로 살지 않는다. 그녀는 그 집단에서 축출되어 혼자 세상을 방랑하면서 산다. 오린은 다른 고제들과는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녀는 쾌락과 세상의 행복을 갈망한다. 다른 장님여인들의 엄숙주의와 금욕주의에는 절대 공감 못한다. 손님들과 거리를 두는 다른 고제들과 달리, 오린은 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농담을 하고 잘 웃고 하다가 밤 새 강간까지 당한다. 오린은 이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자기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고제들과 헤어져 검은 세상을 혼자 떠돈다.
얼마나 고독하고 무서울까?
장님으로 무엇 하나 자기 손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 집도 절도 없이 세상을 한없이 방랑하며, 누가 먹을 것을 주는 사람도 없고, 병이 난다고 치료해주는 사람도 없고, 춥다고 지푸라기라도 덮어주는 사람 없다. 하지만 이런 오린의 일생을 이 영화는 비극적으로 그리지도 않고, 처절하게 그리지도 않는다. 실제로는 굉장히 처절한 인생을 살지만, 오린은 여전히 잘 웃는다. 무슨 일이 생기든 담담하고 태평스럽다. 장님이었던 자길 버리고 간 어머니에 대해서는 "그래도 날 구해준 약장사 할아버지가 잘 대해주었다", 자길 강간해서 일생을 추락하게 만든 사람에 대해서도 "기분 좋았다. 난 그런 게 좋은 사람이었다." 라고 한다. 그렇다고 낙관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이런 생각 바깥에는 장님으로서 일반인이 가지는 행복을 포기하는 운명순응주의가 있다. 김동리 역마에 나오는 사상인,
운명에 순응함으로써 운명을 극복한다 하는 그런 사상이 근저에 있다.
영화 내내 오린이 혼자 세상을 방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오린의 바깥은 군국주의 때문에 과열로 빠져들어가는 세상이 있다.
하지만 오린 혼자 전근대적인 운명순응과 예술의 세상을 떠돈다. 어느 추운 절간에서 자다가 얼어죽을 수도 있고, 병에 걸려 혼자 앓다가 죽어버릴 수도 있고, 굶어죽을 수도 있다. 이런 운명을 다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유유자적하게 그 속을 거닐어다니는 사람이 오린이다. 세상은 합리주의와 근대화가 지나쳐 식민주의와 군국주의로 나아가고 있는데, 오린은 혼자 이렇게 산다.
하지만 이 오린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떠돌이 츠루가와라는 남자가 달라붙는 것이다. 그는 나막신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다. 집도 절도 없이 혼자 헤메다니는 것은 오린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나막신 만들 도구를 살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린을 잠시 따라다니며 도울 테니 돈을 달라고 한다. 오린은 생각할 것도 없이 허락한다.
전에도 이런 사람 많았던 것이다. 달라붙어서 몸을 노리다가 섹스 한번 하고 나면 오린을 버리고 떠나간다. 섹스를 좋아하는 오린이니 마다할 이유 없다. 달관한 척 하지만 실은 외로움에 뼈가 시리는 오린은 이렇게라도 남자가 다가오는 것이 눈물 겹도록 고맙다.
하지만 츠루가와는 다르다. 시베리아에서 도망한 탈주병에다가 살인자, 걸핏하면 주먹이 나가는 깡패다. 세상의 바닥과 가난, 불평등은 다 경험하고 어쩔 수 없이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고 방황하는 것은 오린과 같다. 츠루가와는 오린에게서 성녀의 모습을 본다. 그 모든 고독과 세상의 모순과 아픔을 다 달관으로 승화시키고, 예술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베풀고 다니는 모습에서 말이다.
"나는 성녀가 아니예요"하면서 육탄공격으로 달라붙는 오린을 뿌리치며, 츠루가와는 오린을 봉양하는 정성을 보인다. 츠루가와는 오린이 자기에게 아름다운 성녀로 남아주었으면 한다. 오린은 츠루가와와 함께 하며, 그동안 가졌던 체념, 운명순응주의를 버린다. 혼자가 아니라는 삶의 형태를 비로소 느끼게 된다. 이제 다시는 혼자 세상을 배회할 수 없다. 그동안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세상을 떠돌았는데,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유대 하나가 생겼다. 그것은 츠루가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탈주병에다가 살인자, 폭력배인 츠루가와가 경찰에 잡혀 사형을 받는 것은 시간문제다. 오린도 츠루가와와 함께 잡혀 고문을 받다가 풀려난다. 그녀는 옷이나 몸이나 마음까지 다 넝마가 된다.
츠루가와의 범죄에 대한 증언을 하라고 고문하는 경찰에게 "그는 날 보통여자처럼 느끼게 해주고 사랑해주었어요. 여자는 그것을 위해서는 목숨도 바친 답니다."라고 대답한다. 눈에서 불을 켜며 고문하던 경찰은 그 대답을 듣고 힘없이 등돌린다. 이런 말을 하는 여자를 더 고문해서 무엇하겠는가? 츠루가와가 사형당하자, 오린은 삶의 애착과 삶을 지속할 힘을 모두 잃는다. 여전히 세상을 방황하지만, 예전에는 유유자적하는 나그네처럼 방황했다면, 지금은 힘 없고 괴로운 노인이 비틀거리며 '이 여정 언제나 끝나나?'하고 신음하는 듯 방황한다.
예전 자기를 돌봐주었던 고제들을 찾아가 봐도 다 죽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산중에 터널을 뚫던 인부들이 저 멀리 산봉우리를 보며 중얼거린다. "저 벼랑 위 숲에 걸린 붉은 것이 뭐지?"
숲에 걸려 있는 선명한 붉은 것은 오린이 입었던 기모노 자락이다. 그리고 나무 그늘 아래 작은 오솔길에 있는 것은 이미 백골이 되어 흩어진 오린의 뼈들이다. 그녀는 이 산속에 들어와 혼자 조용히 생을 마친 것이다.
생전 처음으로 행복을 느끼자 그것이 그녀의 몰락의 시초가 되었다는 역설 - 어릴 적 어머니에게 버림 받았던 기억에도 웃고, 강간 당해 고제 조직에서 쫓겨난 기억에도 웃고, 섹스하고 버림 받았던 기억에도 웃었지만, 달관은 했을 지언정 행복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소중하고 행복한 것이 생기자, 그것이 그녀에게 모든 것이 되고, 그것을 잃자 삶은 그녀에게 지옥이 되고 힘든 절벽이 되었다.
고제라는 장님 예술가에 대해 감성적이면서도 심오하게 다룬 걸작영화다. 어딘가 박목월 시 나그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영화를 보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자연적이고 운명순응적인 비극관을 체험할 수 있다. 이 처연한 것은 군국주의라는 벽에 부딪치자 금새 박살이 난다.
여배우 이와시타 시마는, 이 영화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마치 예리한 조각도로 미세하고 희미한 선들조차도 또렷이 각인하는 것처럼 섬세한 연기다. 담담하고 달관한 듯 보였지만, 굉장히 외로웠고 사랑을 갈구했던 여인을 아주 또렷하고 화려하게 묘사한다. 배우 본인으로서도 일생일대의 연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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ごぜ (瞽女)
三味線을 타거나 노래를 하며 동냥 다니던 눈먼 여자.
일본은 70년대에 강렬한 작품들 많이 선보인 것 같습니다.